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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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주행 중인 종영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제작년에 막을 내린 <학교 2013>인데요. 극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인 박흥수(김우빈)와 고남순(이종석)의 끈끈한 우정도 눈물겹지만,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불안함과 그들을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대응하는 두 선생의 대조된 모습이, 마치 우리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우울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죠. 하지만 무조건적 사랑이 주어지는 유아기의 짧은 시절이 지나고 나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 후 이름난 회사에 취직해 반듯한 배우자와 결혼하여 이쁜 손주를 안겨드리는 것 등의 성취의 연속만이 이전의 관심과 칭찬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걸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학생들이 가진 불안은 가깝게는 대학진학의 문제이며 멀게는 불투명한 내 미래의 모습(지위, 성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책,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우리가 겪는 불안의 실체와 그 해결책을 강구함에 있어 도움이 될 만한 책입니다.


날 때 부터 본인의 자리가 정해졌던 과거 신분제에서 탈피해 민주주의 사회로 들어선 근대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요. 누구나 가진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원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이 그 첫째요, 이전엔 상상치 못했던 안락함과 물질적 쾌락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된 급격한 기술의 진보가 그 둘째입니다. 허나 평등사상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 이면에, 극빈층의 궁핍과 불행을 당위성으로 포장해버렸고, 넘치는 풍요 속에 무분별한 소비를 일삼는 현대인들에게선 끝을 모르는 탐욕과 이기심이 자라나는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높은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좋은 집과 차, 옷, 가구등을 사들이고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또한 생의 반려자나 일의 파트너를 선택할 때 지극히 계산적인 판단 즉, 학력과 재산, 집안등의 배경에 의해 좌우되는 이른바 '속물근성'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정말 비참한 순간이 나의 일부분으로 '나'라는 정체가 너무 쉽게 판단지어지는 것일 텐데요. 마치 어떤 물건을 보고 '저건 무엇이구나' 하고 인지하듯 외적 모습과 서류상의 몇몇 사항으로 "됐구요. 다음!"이 외쳐지는 서글픈 현실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타인이 나를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주기를 바라죠. 한 사람을 속성으로 증명해 주는 명찰인 '지위'는 이제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수능 날을 받아 놓은 수험생과 면접 날짜를 앞둔 취준생에겐 자신의 꿈이나 이상, 목표보다는 당장의 좋은 결과로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성취를 향한 그러한 경쟁의 과정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단연 또래의 성공, 그리고 그들과의 끊임없는 비교 심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 p.59 


능력주의 사회의 위계 속에서 지위와 돈에 의한 냉정한 평가가 이뤄지는 세태에 작가는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나섭니다. 그것은 크게 '예술', '정치', '보헤미아'와 같이 적극적이거나 혹은 '기독교', '철학'과 같은 소극적인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요. 드 보통은 역사적으로 이런 대안들이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들에 의해 연설과 작품등으로 실현된 것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교회에 나가 말씀도 들어보고 체념한 듯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가장 효과가 있었던 건 소설이나 음악, 공연같이 대중에게 이상적 교훈을 설파하고 정말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주는 대변자 겸 아군과도 같은 예술이었습니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 p.180


만약, 정치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위인이,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바로잡고자 큰 목소리를 낸다면 얘기는 조금 쉬워질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미 높은 자리에 위치한 권력가가 본인들과는 상관없는 하층민들을 위한 이념 전복을 꾀한다는 건 지금의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랜 세월 사회적으로 열등한 위치를 점해온 '여성'이라는 집단을 일상에서부터 교육, 소득, 정치적 참여에 이르기까지 종래의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와 혜택을 누리게끔 당당한 요구를 했던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본인 역시 여자였음에도, 그 대단한 열의를 지위 재정립이라는 커다란 성과로 일구어냈다는 점에 있어 칭송받아 마땅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 밖에 없다. - p.245 ~ 246


광활한 대지와 거대한 빙하, 폐허가 된 역사의 장소 또는 죽음을 앞둔 환자. 이 모든 것을 보며 드는 공통된 느낌은 인간은 다 먼지같은 존재이고 빈부란 것도 요즘 말로 '아이고 의미없다'로 일축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어쩌면 못 가지고 실패한 루저들의 슬픈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가진 자들에겐 꽤 잔인한 허무함을 안겨주는 비책(?)임엔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불안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도, 그것을 내 안에서 바로잡아 누구의 시선에도 신경 끄고 맘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 <학교 2013>에서 강세찬(최다니엘)선생은 이런 현실의 불안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학교라는 전쟁터에서 각자의 무기를 들고 싸우는 도리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계약직 여(장나라)선생은 자신 또한 학교를 잘릴 위험(취직의 불안)에 처해있지만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토닥여줍니다. 냉혈한으로 보였던 강 선생도 사실 정 선생처럼 따뜻하고 바른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 사회가, 현 교육 현실이 그걸 막고 있었을 뿐이었지요.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 p.268


기술의 발전이 멈추지 않고 사회적 지위라는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리의 불안이 완전 해소될 길은 요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안과 자라나는 아이들의 불안이 커져갈 때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하는 것과 위의 대안들과 같은 해법으로 그들과 우리를 다독여 줄지는 각 개인의 몫입니다. 오늘 본 드라마 회차에서 민기라는 학생이 자살 시도를 했는데요. 정 선생에 의해 발견된 그 아이는 가방을 옥상에서 왜 던졌냐는 질문에 "너무 무거워서요"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기대. 어깨 위에 지어진 그 짐은 누군가에겐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혹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셀러브리티로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밖에 내려놓을 수 없었던 커다란 짐이었음을 우리는 여러 번 목격해왔습니다. 불안은 자신이 원한 만큼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죠. 소박한 삶을 살았던 보헤미아의 정신은 그에 있어 좋은 교훈이 될 것 같군요. 지금 여러분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의 정체는 정말 본인이 원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 타인이 만든 기준에 의한 불안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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