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의 신 - 천만 방문자를 부르는 콘텐츠의 힘
장두현 지음 / 책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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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건 8년쯤 전인데요. 당시 배구경기를 즐겨보다가 응원하던 팀의 승패에 따라 혼자 웃다 시무룩하다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땐 싸이가 대세였는데 전 남들 다하는 길로는 가길 꺼려하는 이상한 분자라서 이 블로그란 것에다 심정을 혼잣말로 끄적이곤 했었지요. 그 후엔 드라마를 보고 나서 후기를 적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끌어와 링크를 걸어놓고 이곳저곳 꾸며서 제법 개인 홈피 같은 느낌이 물씬 나게 정성을 들였답니다. 요 며칠 새 부쩍 태만해진 포스팅 간격에 이웃분들 한번씩은 겪었다는 블태기가 찾아왔나 싶어 이 <블로그의 신>이란 책을 빌려봤어요. 그렇다고 이 책을 필두로 제가 파워블로거의 부푼 꿈을 실현하겠다, 뭐 이런건 아닙니다.ㅋㅋㅋ 다만 제가 오래 블로그를 꾸려왔음에도 모르고 있는 기능이나 이웃간의 원활한 소통방법 이런게 궁금할 따름이죠.^^)/

나모웹에디터나 자바스크립트로 복잡한 태그 써가면서 홈피를 만들지 않아도 멋드러진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블로그의 장점일 거예요. 쉽고 간단함. 초보 블로거들은 방문자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는데 진짜 소통은 대가성을 바라지 않는 진심과 담백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학교 다닐땐 글 쓰는 거 그닥 좋아했던 기억이 없는데 쓰다보면 느는게 글이더군요. 이 책은 사실 친한 이웃을 늘리기 보다 검색에서 상위를 점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공간을 홍보하는 방법으로 쓰여서 저에겐 조금 맞지 않았어요. 일회성 방문자 한 둘이 모여 몇 천 몇 만의 히트수를 찍는 건 귀차니즘인 제 입장에선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서요.

다만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언급된 팁을 밝히자면 앞사람과 말하듯이 쓰라는 것, 최근에 저도 딱딱한 어투에서 조금 부드럽게 바꿨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더군요.^^; 그리고 너무 완벽한 글을 쓰려 하지 말고 댓글의 여지를 남겨둔 빈틈있는 인간적인 글을 쓰라는 게 기억에 남네요. 남들이 잘 다루지 않는 희귀한 것을 주제로 한 블로그라면 더욱 유니크한 공간이 되겠죠. (이웃분 중에 표절을 다루시는 알라딘님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해요.^^) 그리고 전 포스팅에 이미지를 책 빼곤 거의 넣지 않는데 저자가 예전엔 관련 이미지 탐색에만도 꽤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말에 여르미님등 다수 이웃님들의 고충이 일순 느껴지더라구요. 또 좋은 정보를 담은 블로그를 링크등으로 소개한다면 해당 블로거와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건 말할 것도 없겠지요.(녹색양말님이 이미 실천하고 계시죠.ㅎ)

얼마전까지만 해도 전 포스팅을 발행할 줄만 알았지 이웃과의 소통엔 별 관심이 없었어요. 혼자 보는 일기장 같은 취급을 해왔다고나 할까요.^^; 근데 읽은 책을 공유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상대가 마땅히 없으니 ​안그래도 지겨운 책읽기가 더 지겨웠던 거죠.  지금은 많진 않지만 감당할 만큼의 적당한 이웃님들과 얘기도 나누고 의견도 교환하는데 책의 내용도 더 오래 남고 무엇보다 블로그 할 맛이 난다는 게 너무 좋아요. 책에 소개된 각 분야별 유명 블로거들 이름 속에서 낯익은 닉넴도 발견하니 반갑더군요. 전 sns도 거의 하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도 없어서 앞으로도 지루한 텍스트가 이 공간의 대부분을 채우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주셨고 앞으로도 방문해 주실 분들께 감사할 뿐입니다.

유튜브나 페이스북, 스마트폰 앱을 통해 블로그를 널리 알리고 블로그 운영이 하나의 스펙이 되어 기업과 제휴도 맺고 수익도 올려 하나의 일거리로 블로깅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와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시상식에 초대를 받거나 독자와의 만남, 참석이 제한된 자리에 많은 블로거를 대표해 갈 수 있다는 게 또다른 매력이에요.) 어렵지 않게 다양한 이미지를 곁들여 설명하고 있어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읽어도 꽤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참고로 블로거팁닷컴(www.bloggertip.com)사이트의 주인장이기도 하셔서 자세한 사항은 방문하셔서 이것저것 읽어보시면 책 두배 활용법이 될 것 같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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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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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가 쪽 큰 고모는 수십년 전, 이름 모를 병을 앓으신 적이 있는데 기독교를 믿고 나서 씻은 듯 나으셨다고 해요. 물론 우연의 일치겠죠. 하지만 그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고모께서 독실한 신자 생활을 유지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아요. 사람은 사고나 질병, 경제적 어려움같은 고난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존재에 대한 특별한 의미 부여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한 친구의 위로, 지역사회의 복지, 종교단체의 후원일 수도 있겠죠. 오늘 소개할 책인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 속 주인공 애덤 헨리. 그의 부모는 궁핍한 환경에서 그를 낳고 '여호와의 증인'을 알게 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예의 세번째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법조계의 명망 높은 고등법원 여성 판사 피오나 메이. 예순이 내일 모레인 그녀는 판결문과 서류 더미에 종일 파묻혀 사는 완벽주의 전문직 여성의 전형적 인물입니다. 그런데 소설 초반부터 어째 남편과의 사이가 삐걱대며 위기를 맞는 듯하더니 급기야 더 늦기 전에 뜨거운 열락을 맛보고 싶다는 그는 당당히 외도를 허락해 달라는 뻔뻔함을 보이기에 이릅니다. 어이가 없는 그녀는 아파트 열쇠도 바꿔버리고 그가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하는 척이라도 해주길 바라지만 침묵같은 무소식에 애간장만 타 들어가지요. 이 와중에 그녀가 처리해야 할 사안은 역시 매일같이 밀려드는데요. 그 중 이혼과 위자료 및 양육권 소송을 마주하면서는 비슷한 자신의 처지를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얘기는 종교적 신념과 법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앞서 얘기한 애덤이란 소년이 백혈병에 걸려 수혈이 시급한 상황에 그의 식구들 모두는 따르고자 하는 교리에 반하는 행위라며 한사코 거부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종교는 타인의 피를 내 피와 섞는 행위인 '수혈'을 절대 금기시하고 있죠. 성인에 준하는 18살 생일을 불과 3개월여 남겨둔 시점에서 애덤은 본인 및 보호자의 의견을 따라 '순교자'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지, 아니면 누구라도 설득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게 옳은 것인지 작가는 마치 독자들 모두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동적인 엄숙한 태도로 아이는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피오나를 쳐다보았다. 애덤이 연주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높은 음에 수월하게 맞춰 들어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문간에 서서 아연히 바라보는 머리나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피오나는 더 크게 노래했고, 애덤의 미숙한 활은 더 과감해졌으며, 두 사람은 지난날을 한탄하는 애절한 마음속으로 마음껏 빠져들었다. - p.161

 

그녀는 이례적으로 당사자인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녀 앞에서 즐겨 쓰던 시를 읊고 어설픈 솜씨나마 바이올린까지 켜 보이던 그는, 비록 야위었지만 그녀의 눈엔 사랑스럽고 충분히 본인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보였습니다. 또, 얼떨결에 함께한 공연이 되었지만 그녀의 노랫소리가 얹어진 병실에서의 둘의 교감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동적인 대목이었지요. 아쉬운 듯 붙잡는 그의 목소리가 마지막까지 뇌리를 스치더군요. "또 오실 거예요?"

 

이 아이는 후에 자신이 한 선택이 불러올 결과 즉,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어가는 아픔과, 죽음 뒤 그 빈 자리에 채워질 슬픔의 눈물을, 자신이 주인공이 된 낭만적인 어떤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피오나가 다녀가고 내려진 판결문을 접한 뒤 소년의 생각은 바뀌었고 지켜오던 신념에 앞서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음을 부모의 눈물로 확인한 그는 고마움에 판사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내용은 다소 황당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보지 못했던 세상을 알려 준 또 다른 존재로써 그녀는 소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한편, 그 무렵 냉전 중이던 부부에겐 화해의 기류가 흐르고 그레이트홀의 꿈같은 연주를 정점으로 둘은 예전의 화목했던 시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허나, 마지막에 소년이 내린 뜻밖의 결정과 그로 인한 참담한 결과는, 사건이 종결되었음에도 그녀로 하여금 빠져나올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안겨준 채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장중했던 <속죄>만큼은 아니었지만 긴장감 있는 스토리와, 심리 묘사에 달인임을 또 한번 증명해준 이언 매큐언의 섬세하고 간결한 문체가 돋보였던 작품이었구요. 판사라는 특수 직업을 가진 작중의 주인공이, 아이가 없고 노년을 앞둔 위기의 가정 주부라는 또 다른 한 쪽의 입장에 서서 도덕과 신념, 법이라는 잣대를 들고 고뇌하는 상황이 작가가 다루려 하는 폭넓은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다음에는 이 작가가 또 어떤 사건과 배경을 가지고 멋드러진 작품을 써 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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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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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생활화 되신 분들은 대개가 책에 대한 강박과 권태가 주는 괴로움 또한 한번쯤 경험해보셨을 거에요. 책을 아예 접하지 않는 분들에겐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독서광이라 자처하는 다수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채워지지 않는 또다른 지적욕구로 애가 타고 초조한 게 사실입니다. 제목부터 강렬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오늘의 책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저를 포함해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인데요. 명쾌하고 논리정연한 저자의 필력은 이 새로운 독서 패러다임에 드높은 신뢰감을 불어넣어 주는 듯 합니다. 

한국의 1인당 연간 독서량이​ 갈수록 내리막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2년 남짓한 독서력이나마 이 시점에서 제가 또래 여성이나 대중의 무리 속에 섞여 책에 관한 담론을 나누기엔 그닥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해보는데요.^^;; 그것은 그간 읽어온 책들에 의거한 얄팍한 자신감이라기보단 독서문화를 접하면서 정독을 하게 된 극히 일부 책들 외에도 미디어, 서평, 대화, 트렌드 변화등을 통해 스쳐간 훨씬 많은 책들의 정보가 제게 준, 파편적인 조각지식들이 결코 적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죠. 그러나 오랜 식견을 자랑하는 전문가(?)들의 집단이나 독서가 보편화된 여타 선진국에서 비슷한 담론이 오간다면, 전 그 속에서 그들이 다 알만한 책을 정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절부절 못할 것이 뻔할겁니다.ㅠㅠ

독서를 하면서 겪게 되는 이 같은 ​비독서에 대한 불안은 오히려 책을 많이 접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 특징인데요. 이것은 마치 지난 포스팅 <불안>에서 언급되어진 바와 같이 비슷한 또래를 향한 부러움과 시기, 질투가 당연시되어지는 현대인들의 심리적 기제와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기존의 독서와 비독서라는 개념의 틀을 깨고 특정 텍스트를 접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우리 모두가 독서와 비독서의 모호한 경계를 끊임없이 유영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내용으로써의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서, 서점에서 책을 훑어만 보거나 타인의 서평읽기, 지인과 나누는 책 관련 수다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예계에선 금기시되는 '카더라 통신'은 책이라는 관심사로 맺어진 제 블로그 이웃분들과 출판계에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광경인데요. 가령, 제겐 어렵지만 몇몇 이웃님의 깔끔한 정리로 접하는 철학도서 리뷰나, 팟캐스트에서 다루어지는 토론등은 직접 읽진 않았지만 대강의 내용 짐작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가 되곤 합니다. 저자는,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책들에 일일이 빠져들지 않아도 각각의 책이 위치한 자리와 관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만이 진정한 자기 창조의 길을 열어둘 수 있는 방법이라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 작가나 평론가의 경우 자신이 쓴 글에 대한 기억이 불분명하거나 인터뷰할 저자의 책을 읽지 않았어도 뚜렷한 본인의 주관과 저자의 세계관 정도만 숙지하고 있다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레 상황을 모면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도 말합니다.

구체적인 담론 상황 몇 가지와 그에 대비한 대처 요령이 챕터 별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소설과 영화 속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흥미로운데요. 에코의 <장미의 이름>, 몽테뉴의 망할(?) 기억력, 발자크와 오스카 와일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등은 마치 자신들의 책이 이 책의 사례가 될 것임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상황을 너무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았더군요. 우리가 어떤 책의 담론에 끼어들기 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신이 그 책을 읽었는지의 여부가 대다수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저자의 논리는 현 독서문화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다소 충격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저명한 학자나 장서가들도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고​ 쉼없이 출간되는 책들의 홍수 속에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책이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완전한 무지상태로 이 책의 논리를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떤 분야나 특정 책의 관념을 자신의 머릿속으로 표상해 보는 일은, 수 년의 독서경험으로 일정 기준의 지적능력이 수반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는 고수만의 기지니까요.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권장도서의 내용들을 단 몇 페이지의 평론이나 리뷰로 추려 놓은 표본을 참고로 단숨에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자'는 못될지라도, 현존하는 많은 '실재'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박 같은 작금의 교육 실태가, 많은 이로 하여금 독서 강박과 의무감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 이유라고 저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때론 비독서가 그 책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고 기막힌 담론을 뽑아낼 수 있는 전제가 된다는 저자의 의견이 신선한데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그것은 대화나 강연 속 인용, 서평쓰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 대화에서 거론되는 내용 대부분은 화자들간의 의견이나 각자의 방식에 의해 맘대로 짜맞춰진 기억의 줄거리인 것이 사실이기도 하죠. 저 또한 이 자리를 빌어 리뷰나 잠깐 훑어본 책 정보에 의지해 마치 그 책을 읽은 것 마냥 허세를 부려 본 것을 고백합니다.(__) 허나 이제부턴 위의 논리에 따라 그런 이유로 창피해 하지도 않을 것이며, 모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서로의 전환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당장은 도갤에 들어가는 것부터 자제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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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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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이름난 명저를 뒤늦게 접할 때면 호기심과 기대에 앞서 밀려드는 건 다름 아닌 두려움입니다. 독자들이 느끼고 공감했던 것이 나에겐 아무렇지 않게 혹은 대단하지 않게 다가오면 어쩌나, 만약 그렇다면 다들 훌륭하다고 칭찬일색인 작품을 나 혼자 별 볼일 없었다고 솔직하게 서평을 써야 하나 고민이 되거든요. 단순히 취향 탓으로 돌리기엔 문학에 대한 무지함을 저 자신이 너무도 잘 알기에 최근까지도 세계문학과 같은 고전이나 유명한 상을 받았다는 책엔 쉽사리 손을 대기가 어려웠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다룰 책인 <설국>은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 저서이기에 더욱 서평을 써 나가는 제 손가락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네요.^^;;


일단, 소설을 읽은 직후의 느낌은 줄거리보다는 배경이 된 풍경이 머릿 속 잔상으로 깊게 남아, 마치 대사가 별로 없는 잔잔한 겨울 영화 한 편을 극장에 홀로 앉아 감상하고 나온 기분입니다. 우리나라, 특히 여기 부산은 한겨울에도 자주 눈을 보기가 어려운 곳인데요. 사람 키를 훨씬 웃도는 폭설이 내려 덮인 일본 마을의 정경을 담담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 자연미의 극치가 언어의 극치로 하나 둘 모습을 바꾸어 정체를 드러내는 것만 같아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양친이 물려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방랑하는 인물 시마무라. 그가 한 때 인연이 닿았던 눈(雪) 고장의 게이샤 고마코를 찾아가는 기찻간의 모습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p.7


명문장으로 손꼽히는 구절이죠. 하지만 언뜻 생각해 봐도 나라와 나라 사이를 뜻하는 '국경'이란 단어가 왜 현 단위의 경계를 일컫는 말로 번역되었는지 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찾아 보고자 독자분들이 쓰신 서평을 두루 찾아 보았는데 그 결과 '국경'이란 단어로 번역된 버전이 '접경'이나 그 외의 표현으로 바꿔 쓰여진 것에 비해 첫 문장의 강렬함이라든지 뒤에 따라오는 문장을 묵직하게 받쳐주는 느낌이 월등히 나은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분들에게 '국경'으로 익숙한 문장이니 그것이 이상하다고 하는 제가 더 이상한 건지도요. 아무튼 이 소설은 서사에 초점을 두고 재미를 느끼려는 분들에겐 다소 단조롭게 흘러가는 스토리가 지루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된 게이샤 일을 자청하여 약혼남 유키오의 요양비를 대고 있는 고마코.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열정을 바치는 그녀를 시마무라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애처로운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한편,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와 눈을 가진 요코는 기찻간에서의 첫만남에서부터 왠지 그를 잡아끄는 순수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죠. 작가는 고마코와 요코라는 두 여주인공의 이미지를 말투에서부터 몸짓, 표정, 심리변화에 이르기까지 놀랍도록 세밀하게 묘사해 놓았는데 이를 보며 단순한 사물이나 인물의 움직임을 이렇게도 표현할수가 있구나 하며 연신 감탄했더랬죠. 특히 비유나 감상을 구체적이게 하여 그 멋이 살게 한 것 하며 인물의 대사나 문체가 무심하고 간결한 것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쓸쓸함, 허무함, 고독한 절제미를 한껏 강조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계절이 지나가고 곤충들이 사멸해가는 모습은 인생의 덧없음과 필연적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일본 고유의 전통이나 복장, 고장의 풍습은 작가의 솜씨로 곱게 버무려져 그 동양적 미와 아름다움이, 읽는 이로 하여금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들기도 하죠. 고마코의 취기 오른 모습은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교태로도 비춰지지만 때론 기녀라는 직업이 가지는 고단함과 슬픈 내면을 전달하기에 모자람이 없으며 그녀을 지켜보는 시마무라와 독자에게 애틋하고 처연한 그리움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원문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그래서 이 서정적 감성을 우회하지 않고 직접 느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드네요. 아직은 이러한 낯선 일본의 서정문학을 이해하기엔 그 배경지식이 턱없는 수준이라 많이 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꼭 한번 일본의 혹독한 겨울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구도 강하게 이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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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반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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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 분들에겐 아무래도 '죽음'이란 단어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테죠. 예전에 제가 느꼈던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관과 그 위에 뿌려지는 흙, 검은 상복같은 파편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요즘 제게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그것은 '나'라는 자체가 사라진다는 '무(無)'가 주는 공포입니다. 내가 사라진 세상, 내가 두고 가야 할 것들, 다시는 못 볼 사람들. 생각하기조차 싫지만 책이란 걸 읽으면 읽을수록 이 '죽음'이란 키워드는 일정한 간격으로 제게 찾아오더군요. 오늘 다룰 책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우리가 살면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것과 성공의 기준들이 '죽음'이란 거대한 그림자를 만나면 그 빛이 얼마나 덧없고 쓸쓸하게 퇴색해버리는지를 경고하는 '메멘토 모리'의 대표격 문학 작품입니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거의 접한 적이 없었던 터라 등장인물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발음도 어렵고 거기서 거기인 듯한 이름들이 초반엔 누가 누군지 많이 헷갈렸답니다. (표트르와 표도르가 뭐가 다른건지;;) 하지만 곧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다가오는 죽음을 향한 주인공의 분노와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이름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 없이 빠른 속도로 소설에 몰입되더라구요.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반일리치는 자신과 남이 느끼기에 전혀 남부러울 것이 없는 듯한 인생을 산 인물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죽음의 기운은, 여지껏 살아온 그의 삶 전체를 의심해 보게 하고 반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두려움 그 자체였죠.


이반일리치의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산층 가정의, 가장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업무능력과 적절한 인성은 빠른 승진가도를 타게 한 밑거름이 되었고 그렇게 높아가는 연봉으로 집을 꾸미고 식구들의 만족을 채워주며 자신 또한 카드놀이 등으로 동료들과 소소한 취미를 즐김으로써 목표였던 '고상한 삶'의 정석을 유지해나가는 듯 보였지요. 허나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은, 익숙치 않고 멀게만 보였던 '죽음'이 자신에게 곧 닥쳐올 거란 걸 직감한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날이 커져가는 통증에 가족과 그의 동료들은 공감하며 함께 걱정해 주긴 커녕 이반일리치가 죽음으로써 자신들 각자에게 미칠 영향을 계산해 보기만 급급했습니다.


그는 절망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너무나 빨리 와버린 생의 마지막은, 그 자신의 지나온 과거 모두를 들춰 가며 속으로 질문하게 만들었지요. '내가 잘못 산 것인가?" 독자인 저의 시선에서 봤을 때 가정에 소홀했으며 지나치게 일에만 몰두하고, 판사인 자신의 직책에 남모를 우월감을 지녔던 것은, 비록 추켜 세울만한 부분은 아니지만 현대 남성 누구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더욱 이 소설이 대중적 교훈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고의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중차대한 대역 죄인이 될 만한 원한을 살 일이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고 느끼니까요.(실제로도 그렇게 살고 있구요.)


한 때 그를 둘러쌌던 주변인들 모두가 돌아섰을 때 그는 죽음의 문 앞에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행복을 느낀 것은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돈이나 권력등의 배경이었단 것을요. 그리고 계속 이어질 삶을 향한 자들과 죽음을 향하고 있는 자신의 대비된 모습을 보며, 헛된 욕망과 성공에 대한 집착에 젖어 살았던 지난 날 본인의 행동을 뉘우치며 깊은 회한과 허망함에 빠지게 되죠. 한편, 힘없이 늘어진 그의 육체와 정신을 위로해 준 이는 뜻밖에도 평소 그가 관심조차 두지 않던 하인 게라심이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섣불리 경시하는 것들에 대해 '죽음'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경험이, 비로소 올바른 그 기준을 바로 세워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드라마 얘기를 좀 해 볼께요. 2011년에 방영된 <49일>이란 드라마는 판타지한 요소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저에게도 인상깊게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이 된 주인공 지현(남규리)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 세 방울을 받아야만 새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스케쥴러(정일우)의 조건 혹은 그 세계 나름의 원칙에 따라 이경(이요원)의 몸을 빌려 눈물을 받으러 돌아다녀 보지만 녹록찮은 그녀의 고군분투는 저로 하여금 당시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죽는다면 순수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나는 그런 눈물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인간은 후회도 쉽지만 그걸 잊는 것 또한 금방이라는 걸 소설은 강조합니다. 군대를 가서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고 깨우친 뭔가가 많더라도 민간인이 되는 순간 지독한 회복성은 무섭게도 빨리 가동된다는 공공연한 사실이, 고통과 죽음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되더란 얘기죠.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하라'. 어느 영화에도 등장했고 처세술 서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명언인데요. 이 말은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각자의 삶에 기준이 되는 가치와 걸어온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 보는 입장에서 매일의 반성과 깨달음을 쉬지 말고 이어가라는 '메멘토 모리'의 또 다른 말로도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놓쳤다는 사실보다 더욱 그를 절망스럽게 한 것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기란 더욱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 p.87


(...) 이반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이 거짓말 때문에 사람들이 이반일리치 자신이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반일리치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아픈 아이 대하듯 그렇게 가엾게 여겨 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원했다. - p.111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지난 삶에서 가장 좋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그 당시에 만족스럽게 여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시절 행복을 느꼈던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다른 누군가를 추억하는 것과 같았다. - p.130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그 자신에게 말했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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