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 - 홀가분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조슈아 필즈 밀번 & 라이언 니커디머스 지음, 신소영 옮김 / 이상미디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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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은 2년 반 전 무렵에 이사를 온 곳인데요. 7년간 살았던 이전 집에서 이 곳으로 옮기게 되면서 수많은 가전제품과 책, 의류, 가재도구들을 처분하는 와중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에는 버리자면 아까웠을 그런 물건들이 '이사'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부딪히게 되니 그 의미를 잃게 되더군요. 사람은 누구나 특정 대상이나 물건에 추억을 싣기 마련이고, 그 추억에 대한 집착을 쉽게 놓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다룰 책 <미니멀리스트>에서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물질에 대한 강박과 그 원흉인 소비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을 방어책을 '미니멀리즘'을 몸소 실천한 저자 본인들의 경험에 비추어 친절하고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애착이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이유는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물건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그렇게 한다. 그리고 아무 의미도 없는 물건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 p,82

​핸드폰을 예로 들어 보죠. 그것은 애초에 통화와 문자 즉,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소통을 해야 할 주변인들보다 그 수단인 스마트폰이란 기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기기들이 출몰하면 신기함과 호기심보다는 불편함을 먼저 느끼는 타입인데요. 그래서인지 아직 피처폰과 두꺼운 종이사전 사용을 고집하며 아날로그의 불편함을 익숙함의 편안함으로 상쇄시키며 만족하고 지내는 중입니다. TV, 디지털카메라, 김치냉장고, 정수기, 에어컨, 커피메이커, 믹서기, 압력밥솥등등... 이미 몇 년전 사라졌거나 저희집엔 처음부터 없었던 품목들의 일부 목록들입니다. 지금은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어떤 물건 없이​ 지내다 보면 그것의 가치를 되돌아 보고 우리에게 그것이 정말 필요한지 아닌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없는 인생이 더 낫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 p.40

기념일을 비롯한 특별한 날, 사람들은 으레 선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감동 받길 원합니다. ​때론 선물하고, 받은 물건의 가격이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죠. 저자는, 그런 물질이 아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을 소중한 이에게 선물해 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선물이 되는 순간, 그것은 훗날 지나친 의미부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요. 옷장, 서랍, 책장 속에 몇 해동안 손이 가지 않은 물건이 잔뜩 쌓여 있진 않나요. 시중에 나와 있는 정리비법에 관한 서적들은 그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쓰지 않는 것들은 앞으로도 쓸모가 없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죠. 나눔과 기부는 그것들을 정리하고 손보는 데 소요될 헛된 시간을 '타인에 대한 기여'로 바꿀 좋은 기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처럼 행복한 시간, 가족 모임 같은 것들을 물건 구입과 연관 지어 생각하도록 길들여졌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 연휴는 트리 아래 놓는 선물 박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가치 때문에 의미 있다.​ - p.204 ~ 205

나 자신이 내가 가진 물건에 의해 정의된다면 내면에는 공허가 자리 잡는다.​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온다. - p.104

또한, 단순히 소유중인 물건을 처분하는 것만으로 '미니멀리즘'​을 실천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물건들을 없앰으로써 그것들이 차지해왔던 시간과 공간을 더 의미있고 소중한 사람과 가치있는 일에 투자하는 것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구요. 20대의 젊은 나이에 억대 연봉을 받던 직업과 좋은 차, 집을 가졌던 그들은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면서, 그 동안 소홀히 해왔던 자신의 건강과 주위의 인간관계를 돌아보고 물질에 집착했던 자신들이 조금은 바보같았음을 고백합니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우리는, 당장은 편리하고 세련된 첨단기기들을 내려놓는 게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허나, 단 몇 분의 시간을 내어 고요 속에 몸을 맡겨본다면 혼자만의 사색이 주는 기쁨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곧 이사를 또 한번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짐을 싸고 수 년 동안 쌓인 잡동사니들을 처분하느라 ​한 동안 정신이 없겠지만 물건을 버리거나 나누면서, 이렇게 될 걸 그 동안 왜 그렇게 죽자사자 끌어안고 있었나 쓴 웃음을 짓게 될 지도 모르지요. 특히 책은 항상 그런 운명을 겪었던 것 같아요. 지금 여러분 곁엔 얼마나 필요한 것들이 놓여 있나요. 만약 그 물건이 가족간에 대화를 단절시키거나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게 만드는 주범이라 생각된다면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당분간 없이 지내는 생활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떠실런지요. 단 몇 시간만이라도 좋아요. 당분간 tv없이 지내자고 결심한 날로부터 3년 반이 흘렀네요. 의외로,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물건들을 대체할 수 있는 건 많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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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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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좋아하는데요. 지난 포스팅에서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다룬 뒤 소설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고른 이번 에세이 <소설가의 각오>는 제목에서부터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설가로써 지녀야 할 책임, 의무, 윤리에서부터 문학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의 올곧은 신념에 부쳐 강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어필하고자 합니다. 그닥 기대를 걸지 않고 쓴 첫 작품이 신인상과 아쿠타가와 상을 휩쓸만큼, 어쩌면 그 속에 내재된 욕망은 처음부터 '글쓰기'였던 걸 뒤늦게 발견한 그가, 소설을 대하는 방식은 정도(正道)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 보입니다. 적당주의를 혐오하고 문단의 타락을 안타까워하며 질책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 글이 쓰여졌던 당시와 조금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오늘날에 깊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관계자들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 하나만 등장하면 문학 전체가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 편집자들은 자기 일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일단은 잡지의 쪽수를 채우기 위해 원고를 긁어 모으느라 분주하다. 필자는 그에 맞춰 날림으로 글을 쓴다. - p.268


이처럼, 문학이 쇠퇴하고 사람들이 활자를 멀리하게 된 이유를 영상과 기술의 발달에서 찾으려는 이들에게 가하는 일침은 통쾌하기까지 한데요. 자신이 믿는 바가 곧 소설이 되야 한다는 뚝심 아래, 그는 철저한 독고다이 생활을 고수하며 개 한마리와 함께 한적한 시골에 틀어박혀 규칙적이고도 소박한 삶을 오랜 세월 실천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며 참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오만한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작금의 문학실태를 딱 꼬집어 조목조목 회초리를 든 부분은 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격한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이 뻔히 내다보이는 생활을 철저히 경계하고 글 또한 어떤 것을 쓸지 알 수 없는 과정에서 차차 그 형상을 빚어가는 작업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무릎을 탁 쳤다지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극히 냉정하게 무한한 미지로 놔두는 편이, 어떤 해괴한 것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취급하는 편이, '쓰는 힘'과 조우할 기회가 훨씬 많을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p.56


한편, 사회 곳곳에서 횡행하는 부조리와 젊은 청년들의 나태함에 대해서도 거리낌없는 독설을 내뱉는데요. 이런 관습이 문단으로까지 뻗쳐 지금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분석인데, 흥미로운 건 일본인 특유의 온(효행)의 자세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부분이었습니다. 모두가 당연시하는, 전통적인 모국의 관습조차 그의 레이더망에선 안전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또,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독자들과 방탕한 생활에 찌든 작가들, 극단의 위계질서에 물든 문학계를 향한 지탄은, 그렇고 그런 세상의 이치에 편승되지 않으려는 몸부림 그 자체로 보였습니다. 침묵, 절제, 고독을 벗삼아 그저 꾸준히 써나가는 그의 소설이 오히려 안 팔리는 게 마땅하다는 얘기를 들으며 깊은 씁쓸함을 삼키기도 했지요.


문학은 쓰는 것이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소설쓰기를 목표로 하는 자는, 문학론 따위와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야 한다. - p.207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 p.207


삶을 대하는 태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진실함에서 소설의 영감을 찾고자 하는 그만의 지론은 명쾌합니다. 이러쿵 저러쿵 평을 하는 무리들에게 부화뇌동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소신을 따라 외로운 글쓰기에 천착하는 것. 출세와 명예, 돈, 지위에 대한 욕심을 일체 버리고 한 길을 가는 그에게 소설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등정할 때 필요한 건 오직 시간과 체력, 약간의 여비, 그리고 볼펜이 전부죠. 최근 글쓰기에 대한 책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요. 그 기법을 배우기에 앞서 글을 대하는 태도를 갖추는 게 우선이라고 봤을 때, 마루야마 겐지는 마음만 앞서는 예비 작가지망생들에게 길잡이로써 바른 초심을 주입해 주는 한편, 서두르지 말고 긴 호흡으로 일관된 톤을 유지하며 작품 집필에 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 환경 또한 지루하고 단조로운 나날의 연속일 테지만 견뎌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려 하는 자에게 자연광 이외의 빛은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또 나는 문학상이란 빛에 홀린 독자들을 상대로 소설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 p.330


조금은 미안해졌습니다.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에 걸친 대장정으로 소설을 완성해나갔던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을 보며, 그들의 문학적 지식과 경험, 상상력과 창조력을 단 몇 푼의 돈으로 교환해 얻으면서 정작 그 작품의 가치는 과소평가하고 비싸다고 징징대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소설에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잣대를 드리우고 현실과 타협의 여지 하나 두지 않는 그는, 틀어진 오늘날 문단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습니다. 요즘엔 본인이 지향하는 글만을 써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작가들은 말합니다. 대중성과 영화화 추세에 따른 트렌드도 익혀야 한다고도 하죠. 흔히 배고픈 직업이라 일컬어지는 험난한 그 작가의 길을 정도대로 걷고자 애쓰는 마루야마 겐지의 모습에서 아직은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느껴보려 합니다.


영상 문화가 범람하는 현 시대에도 문자로 표현하고 습득해야 그 감동이 제대로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기에 끝내 문학이 뿌리 뽑히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라 믿습니다. '쓸 만큼 썼으니 이제 더는 쓸 것이 없다'는 말은 그에겐 핑계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캐지 못한 문학의 광맥은 다음 세대에도, 그 다음 세대에게도 넉넉하리만큼, 그 끝을 알 수 없이 풍부하다는 게 꾸중 일색이었던 작가의 유일한 희망적 메시지였기 때문이죠. 저 역시 그 주장에 격한 공감을 표하고 싶고 그것을 증명할 의무는 다름 아닌,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사랑하는 분과 문단관계자들을 포함해 인간관계나 비즈니스 생활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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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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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될 때는 즐겨듣는 팟빵 <빨간책방>에서 다뤄진 책들을 꺼내들곤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책은 방송의 최대 수혜를 입었던 이언 매큐언의 <속죄>라는 작품인데요. 독서에 그닥 취미가 없으신 분들께는 528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과 고전과 같은 빽빽한 자간에 지레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군요. 저 역시 구입 후 한 달 이상을 묵혀 놓고 8월 중순부터 시작한 대장정의 마침표를 어제부로 힘겹게 찍었답니다. 살다 보면 어떤 생각과 행동에 이르게 된 경위를 나 자신조차 설명하기 애매한 경우가 있죠. 철들지 않은 13살 소녀 브리오니. 아이와 어른의 경계지점에 선 그녀는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상하기를 좋아하며 다가올 자신의 앞날(어른)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끓었던 만큼 그러한 내적 혼란을 글쓰기와 이야기로 배출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 p.66-67


1935년의 어느 여름밤, 영국 서리지방의 탈리스 가 저택에서 15살 소녀 롤라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용의선상에 오른 이들은 당시 실종된 쌍둥이들을 찾아 집을 나선 모든 남자들. 유일하게 현장을 목격한 브리오니는 도망치던 그림자의 실루엣과 그 날 오후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조합하여 범인을 파출부 아들 로비라 단정짓고 가족과 경찰 모두에게 확신에 찬 발언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녀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분수대와 서재에서의 일들은 로비와 그녀의 언니 세실리아의 불꽃 튀는 사랑의 시작에 불과했으나 아직 그녀가 이해하기엔 버거운 어른들의 세계를 소리없는 무언극으로, 섹스라는 행위를 단 몇 초간의 시각적 경험에만 의존해 해석한 결과, 정신병자가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력이라는 커다란 오해로 바뀌어 비극의 시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브리오니는 압력이나 위협을 받았다고 자신을 위로할 수는 없었다. 사실 압력이나 위협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녀는 자기가 만든 미로 속에 자신을 가두고 맹목적으로 걸어 들어갔으며, 너무나 어렸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 p.245

 

매번 엇갈리고 말았던 두 남녀의 마음은 그렇게 한 소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그 사랑이 확인되자마자 기약없는 생이별로 이어집니다. 비록, 단 몇 분이었지만 중단된 사랑의 대화는 세실리아에게 로비가 범인이 아닐 거라는 확신을 주었고 범인 지목에 일조한 탈리스 가와 의절을 하고 간호사로 살아갈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죠. 한편, 감옥에 억울하게 투옥되어 5년의 시간을 보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프랑스로 징집되어 비참한 전쟁통에 눈 앞에 쌓여가는 수많은 시체들과 악취, 쉴새없는 폭격이 난무하는 곳에서 로비는 자신을 향했던 브리오니의 증언에 대해 증오를 품으면서도 죽음이 일상이 되버린 전시 상황에 비하면 그녀의 뒤늦은 증언 번복 결심이나 유죄가 무죄로 바뀌는 것 따위야 어찌됐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고도 생각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때에 죄란 과연 무엇인가? 별 의미가 없었다. 누구나 다 유죄이기도 하고 무죄이기도 했다. (...) 우리는 매일 서로의 죄를 목격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둔 적도 없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었나? - p.368-369


그곳에 다다르면 플랑드르 여인과 그녀의 아들에게 그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인간은 오만에서 나오는 자기 비난의 감정에 휩싸이면 너무 많은 책임을 떠안으려 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370


세월이 흐르면서 지난 날 자신이 내렸던 오판이 크나큰 재앙을 불러왔음을 직감한 브리오니는 뒤늦게나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언니에게 사죄의 편지를 써 법적인 절차를 밟으려 합니다. 또 케임브리지 진학을 포기한 뒤 군 전담 병원에서 수련 간호사로 고군분투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에 대한 속죄를 시작합니다. 두 남녀의 사랑을 갈라놓고 한 남자의 인생을 망가뜨린 가해자로써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고자 선택한, 그러나 누구도 원치 않았던 고행과도 같은 삶을 자기위안으로 삼으며 살아간 브리오니를 보며 아직도 자기감상에 젖은 유년시절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구나 하고 혀를 차기도 했지요. 특히 짬짬히 틈을 내어 완성한 소설원고를 잡지 편집장에게 거절당하며 조목조목 지적받는 회신엔 그녀의 삶과 소설에서 진정으로 존재해야 마땅한 것이 빠져있음을 전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펴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히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 p.449


60여년의 세월을 담아낸 이 장대한 서사 구조 속에서 제1부는 단 하루에 걸쳐 일어난 일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마치 나비효과처럼 그 날의 일들로 인해 파생된 이후의 시간들은 단 한순간도 과거 그 시점의 굴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죠. 이 엄청난 일들의 책임을 브리오니 한 사람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로비를 위하는 척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외면했던 에밀리와 잭, 진짜 범인을 알면서도 피해자로 남아 모든 진술을 거부하고 브리오니가 증언을 하게끔 침묵한 롤라, 세계대전이 격동했던 당시 시대상황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치닫고 만 모든 일들은, 어쩌면 여름밤의 저녁을 함께 했던 모두가 나눠 가져야 할 책임의 소산일것입니다.


소설을 쓴 이언 매큐언은 등장인물의 복잡내밀한 심리묘사와 영화처럼 생생히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은 상황설명에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브리오니, 로비, 세실리아 세 사람의 시점에서 마치 각각의 인물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한 듯이 칭찬받기 좋아하고 상상력 풍부한 사춘기 소녀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가 하면, 파편적인 사랑의 기억에 의지해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버텨내려는 로비의 심정을, 어린 나이였던 것을 감안하고도 첫사랑의 배신과 질투에 의한 결과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브리오니의 행동을 어쩔 수 없이 증오하고 마는 그의 고뇌를 섬세한 남성적 필치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특히, 온전히 사료조사에만 의존한 2부의 전시 퇴각 과정의 에피소드들은 작가 본인조차 경험하지 않았지만 독자들 모두를 처참한 살육현장에 이끌고 와 있는 듯한 현실감으로 책장을 넘기는 손에 속도를 붙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브리오니는 비극적 결말에 자신의 소설로나마 속죄하려 했습니다. 한낯 문학 따위가 무슨 힘이 있을까 싶지만 결국 사건의 발단 역시 한 사람의 상상력에서 기인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글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요. 책 속에는 까무러칠 만한 반전이 몇 번 나오는데요. 아직 읽지 않은 독자분들을 위해 언급하진 않았습니다. 잔잔한 원작의 감동을 충분히 즐기고 싶은 맘에 영화로 각색된 <어톤먼트>도 보지 않았는데 영상화된 이야기는 또 어떨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대장정을 시작하기 전에 책의 길잡이가 될 빨간책방 <속죄>편을 참고하시면 더욱 좋은 독서가 되실 것 같습니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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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사회 - 현대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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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이를 취하고 있거나 임자(?)가 있는 암컷을 건드리면 으르렁대는 것과 같이 짐승들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본능적인 분노만을 표출하며 살아갑니다. 살인적 기근이나 천재지변, 전쟁이 닥치지 않는 한 현대인들이 사는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생존의 위협에 따른 분노가 다시 들끓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지만, 이제는 발전된 문화, 가치관, 이념, 이상의 대립으로 집단과 계층, 세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소위 정신적 차원의 분노사회가 극에 달한 시대가 눈 앞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화를 내면서도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과연 분노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 배출구와 해답은 무엇인지 오늘의 책 <분노사회>를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분노는 인간이 언제나 관념을 향해있고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감정이다.​ 만약 한 사회가 분노로 넘쳐나고 있으며, 그 분노가 만성화되어 있고, 심심치 않게 분노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면, 문제는 그 사회의 관념에서 찾아야 한다. - p.14

​분노는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그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관념'의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 수 없듯, 한 개인이 믿고 추구하려는 관념과 이 사회가 지향하는 관념이 항상 같을 수는 없겠죠. 분노는 바로 그런 사회와 개인이 바라보는 관념의 갭에서 온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정당한 방법이 아닌 무차별적 증오로만 해결하고자 한다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살인, 범죄, 자살과 같은 극단적 파괴로만 치닿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내 주변의 온갖 불만들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나와 내 가족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과 맹목적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진정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이미 많이 겪어왔고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죠. 지금 한국엔 수많은 사공(집단과 개인)들이 제각기 자기 목소리만을 높여 서로의 이익을 쌓기 바쁘고 정작 그 목소리를 높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만이 있는 현실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후 독재정권 시기를 거쳐 급격한 경제성장의 시기를 지나오기까지 사회적 기반이 되었던 집단주의는 여전히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어 틈만 나면 편을 가르고 각잡힌 위계질서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흐르곤 합니다. 허나 X세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때 지난 고정관념이며 기성세대들에겐 지켜야만 하는 자신들만의 방어벽이라 이들의 갈등으로 인한 분노 역시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특히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집단에 의지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얻고 특정한 반대 집단을 지목해 공격하고 비난하는 현상에 대해 '개인주의의 퇴보'라 일컬으며 지적한 부분은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사회는 사회대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삶을 지배하는 분노의 원천인 잘못된 교육 제도나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각자의 영역에서 타개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 개인이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시대의 사회란 것도 결국 쪼개놓고 보면 개개인의 모임이니 각자의 의식전환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유겠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연일 뉴스에서 터져나오는 사건, 사고에 반응하는 요즘 우리들을 보면 나만을 위한 이기적 분노가 아닌 도덕적이고 바른 사회를 위한 정당한 분노에 불씨가 당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민 의식이 합리적 수단과 맞물려 사회의 밑바닥부터 바꿔나간다면, 역사적 혁명과 같은 단시간의 변화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바라는 사회상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우리 각자는 홀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세포를 이루는 몸은 부모로부터. 성격, 가치관, 꿈, 생활패턴, 바라는 이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전무하고 그렇게 탄생한 개개인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사회와 자신의 연계점을 찾고 바람직한 '내'가 모여 만드는 사회야말로 모든 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고로 책의 저자 정지우씨는 팟캐스트 <뼈가 있는 책>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작가인데요. 시대를 정면으로 분석하고 날카롭게 비판한 이 책을 집필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젊고 당찬 젊은이인 듯 합니다. 목소리만 들어선 30대 중반 내외로 짐작되는데 그의 다른 저서들 또한 깊이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책과 함께 들어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사회는 개인들이 그 사회를 믿고, 생활 속에서 그 사회를 실현하고 있을 때만 존재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저 온갖 집단 갈등들로 넘쳐나는 군중집합체밖에 되지 않는다. - p.82​

현대 사회 개인의 소외라는 것은 내면을 간직하고자 하는 개인, 그러나 내면의 소통이 차단되어 있는 현실이라는 요소들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 p.89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면, 거의 반드시 잘못된 우리의 인생 과정, 즉 잘못된 가정교육과 공교육에 지배당해왔던 지난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그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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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그저 응시하는 것만으로 10분 이상을 소비해보신 적이 있나요?

처음에는 눈, 코, 입, 피부와 머리카락등이 내 몸에 이상없이 잘 붙어있고 오늘도 다른 날과 변함없는 '나'이구나... 생각되면서도 이 집중을 오랜시간 하다보면 묘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거울 속에 나는 정말 나를 비추는 나인 건지, 한 번도 제3자의 입장에서 날 바라본 적이 없는 나는 이게 진짜 나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해보기도 합니다. 굉장히 낯설어 보일때도 있구요.


중년의 K. 어느 날 그는 아침에 일어나 돌연 이상한 연극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워집니다. 그의 아내와 딸, 키우던 강아지는 물론, 심지어 집안 곳곳에 자리한 소품까지도 평소와는 다른 낯선 향취를 풍기며 그를 밀어내는 듯 합니다. 마치 그를 제외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역할 바꿔치기를 하고 비슷한 옷에 가면을 장착한 채 아내와 딸, 애완견로봇역을 하듯이 말이죠. 더구나 주말에 치뤄진 그의 처제 결혼식이랍시고 모인 친척들은 어딘가 낯이 익지만 역시 일관된 무표정으로 또 하나의 극을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생각 끝에 K는 이 모든 혼란이 전날 밤 친구 H와 머물렀던 술집에서 필름이 끊긴 이후의 시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하고 그 곳에서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아 카페와 영화관을 전전하게 됩니다.


K가 찾으려 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휴대폰이었을까요. 아니면 지난 밤 '블랙 아웃'처리된 자신의 기억이었을까요. 그가 주말 동안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마주쳤던 사람들은 1인 다역을 소화해 내며 능수능란 그를 조롱하듯 스쳐갑니다. 제목 그대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입니다. 매형이자 장인, 매춘부 세일러문이자 딸, 악취나는 노출증 여인이자 아나운서, 포주이면서 독실한 중년여자. 이렇듯 같은 얼굴을 하고 전혀 다른 곳을 동시에 활보하는 그들의 정체는 묘연하기만 합니다. 이 낯익은 복제인간들은 끊임없이 바통터치를 해가면서 이유모를 그에게로의 미행을 계속하는데요. 이윽고 자신이 미친 건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정신과 전문의인 친구 H를 찾아가 그 해결책을 강구해 보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 불륜에 찌든 가정사와 맞바람으로 정상인같아 보이진 않는군요.^^;


K의 의심은 다음 단계로 발전하였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인가, 아니면 하느님으로 위장한 거짓 하느님의 현신인가. 내가 믿는 예수는 과연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실리콘으로 정교하게 만든 인형 리얼돌과 같은 적(敵)그리스도인가. - p.288~289


아무튼 H의 권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누이 JS와 그녀의 전 남편 P교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 역시 급격한 신체변화와 식성, 섬뜩한 취미들로 화들짝 놀래키기에 충분한 모습을 하고서 그를 맞이합니다. 그는 이 모든 현상이 보이지 않는 손인 빅브라더와 같은 거대한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앞으로 일어날 상황과 자신의 생각까지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거라 믿고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행동을 개시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K1(레인저)을 마주하게 되면서 종국에는 그와 그의 모체인 K1은 합체하여 태초의 하나였던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소 난해한 내용이죠.ㅠㅠ


그제야 레인저는 가위바위보로는 K2에게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손바닥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자네 말이 옳았군. 우린 서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한 몸인 거야." - p.333


소설은 작가 최인호가 암으로 투병한 기간동안 쓰여진 유작으로 오랜기간 역사와 종교를 다루었던 그의 문학생활에서 초심같던 스프린터의 가쁜 호흡으로 일필휘지 써내려간 산고의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처음 그의 소설을 접해본 저로써는 곳곳에서 보이는 자극적인 성적 표현과 몽환적인 느낌, 책을 덮고 나서도 뭔가 알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이 선뜻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이미지로 규정되는 건 결코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보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구분됩니다. 생김새, 습관, 식성, 말투, 성격... 이 모든 것은 내가 나임을 드러내주는 증거이자 타인이 나를 구분하는 기준인 것이죠. 허나,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고수하던 스킨 브랜드를 바꾸고 말씨와 식성 따위를 바꾼다고 해서 내가, 내가 아닌 것이 될 수는 없겠지요.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그 섀도 박스에 갇힌 K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낯설지만 익숙한 것은, 나 또한 그와 같이 일정한 틀에 의해 '나'라는 사람이 빚어진 것에 불과하단 걸 어렴풋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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