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 p.9


사랑과 죄의식, 욕망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간직한 채 세인들의 관심밖에서 수십년간 방치되었던 곳 천산 수도원.

'헤브론 성'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죽은 형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강상호에 의해 우연히 이뤄진 일인듯 보였습니다. 그의 발걸음을 산꼭대기로 이끈 것은 유고집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그 곳을 미스터리하게 묘사한 형의 메모가, 왠지 그에게 남겨진 유지(遺志)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상과 지하로 나눠진 수도원엔 72개로 나눠진 방들이 있었고 흙벽에는 화려하게 적인 성경구절들이 빼곡했는데 , 그 내용이 강영호의 책으로 출간되자 교회사를 전공한 젊은 강사 차동연이란 인물이 관심을 보입니다. 그는 성경이 필사된 벽이 예술적 가치나 규모 면에 있어 '켈스의 책'에 필적한 만한 훌륭한 자료라는 해석을 내놓으며 그러한 성스러운 행위를 한 사람(혹은 집단)이 누군지, 필사를 한 이유와 현 행방에 대해 구체적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5살 소년 후. 그는 사촌 누나인 연희를 마음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연희를 겁탈하고 매정하게 내친 박 중위를 찌른 건 우발적인 동시에 우발적이지 않았다, 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 중위는 연희에 대한 욕정을 실현하려 후와 그의 아버지를 이용합니다. 라면과 빵, 과자로 소년을 회유하고 엄청난 외상 술빚을 대신 갚아줌으로써 '화대'를 치른 그는 그녀를 강제로 유린합니다. 그 일이 삼촌과 의기투합된 일이란 걸 알게 된 연희는 마을을 떠나 종적을 감춰버리고, 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박 중위의 더러운 욕정을 채우기 위한 조력자로 이용된 것에 대해 분개하는 한편, 커져가는 죄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사촌 누나를 욕보인 그를 단죄하기 위한 칼부림이었으나 사실 그 내면에는 그녀를 향한 이성으로써의 금기적 끌림이 행위의 상당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기에 더욱 견딜 수 없었죠.


그가 어리지 않다고 우기고자 한 것은 박 중위와 마찬가지로 자기 역시 연희 누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 중위가 인위적으로 쳐 놓은 장벽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 p.86


세찬 비가 쏟아지던 그 날, 후는 끔찍한 자신의 죄를 평생 부둥켜안고 숨어 지낼 천산 수도원에서의 첫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 곳에서 성경 필사 중에 접하게 된 이야기, 이복 누이인 다말을 취한 암논을 응징한 압살롬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진 것도 운명같았습니다. 1970년대 군부독재 정권 시절, 세상 밖은 어지러웠고 그 들썩임의 영향은 수도원 인원의 절반을 감축하라는 청천벽력의 정부지시로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건의 소용돌이 중심에는 '한정효'라는 핵심 인물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권력자의 오른팔이었던 그가, 아내의 죽음 이후 뒤늦게 깨달은 욕망의 덧없음은 그로 하여금 절대자의 그림자이기를 포기하고 과감히 변절하는 쪽을 택하게 했습니다. 결국, 그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세상에서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수도원의 일원으로 연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성경의 페이지들이 빠르게 그의 머릿 속에서 빠르게 넘어갔다. (...)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 그는 자기를 압살롬과 동일시했고, 애써 압살롬이고자 했지만, 그러나 또한 압살롬이기 전에 암논이며, 압살롬보다 더욱 암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 p.280


인원 감축 과정에서 쫓겨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온 후는 갈 곳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무작정 길을 나선 그는 연희를 찾겠다 마음먹고 전국을 떠돈 끝에 그녀와 재회하지만 자신을 팔아넘기다시피 한 삼촌의 아들은, 연희에겐 잊고 싶은 지난 일의 악몽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괴로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는 또한 잠재되어 있던 후의 욕망과 죄의식을 불러왔고 그것은 지난 날 그가 '사모님'과 부정적 관계를 맺었을 때 단지 의무감이 아닌, 마음 한 곳에 음흉한 쾌락이 연희의 이름과 모습으로 바뀌어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거울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연희가 꿈 이야기를 하며 괴로움을 털어놓았을 때 후가 충격을 받은 것은 연희의 고통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나 공감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은밀한 쾌락이 발각되고 통박되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쾌락을 똑바로 보게 했다. 그는 치욕과 충격의 구렁텅이로 떨어졌고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 p,301


천산 벽서에 관한 비밀을 파고드는 차동연에게 '장'이란 자가 연락을 해옵니다. 퇴역 군인인 그는 한 때 수도원 앞을 지키던 초소 근무를 했던 인물로, 한정효로 인해 수도원 전체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현장에서 목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권력 앞에 무력했던 수도사들과 당시 정권과 한 편이 되어 '형제'들에게 몹쓸 짓을 자행한 자신을 반성하며 얼마 남지 않은 생에 남은 죄책감 모두를 떨어 버리려, 고해성사를 하듯 차동연 앞에서 담담한 고백을 이어갑니다. 천 여명에 달하는 수도사들이 한 순간 자취를 감춘 놀라운 사연이 '장'의 입을 통해 드러나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과거 얼룩진 한국의 현대사였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로 내걸고 맞서 싸운 민주주의(수도원)가 군홧발에 짓밟히고, 정권에 반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유폐되고 처단되는 현실이 소설 <지상의 노래>로 다시금 쓰여지고 회자되어진 것입니다.


젊은 군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일을 했어. 하기야 대부분의 엄청난 일들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 p.220


한 시대가 시작되기 위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했다는 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 p.221


일어난 일은 욕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의도가 일어난 일의 실상에 대해 알려 주지 않는다.(...)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 - p.26


소설은 등장인물이 지닌 죄책감과 죄의식의 굴레들이 서로 얽히고 사랑과 권력에의 욕망이 중첩되면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뻗어 나오는 많은 갈래들이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개인(강상호)의 죄책감이 부른 행동은 역사의 비밀과 진실이 알려지길 바라는 또 다른 이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죄책감을 풀어주는 한편,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천산 수도원의 비극을 만 천하에 드러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3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스토리의 짜임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반면, 아름다운 문체와 치밀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이승우 작가만의 특색인 동어반복적 어법과 짙은 종교적 색채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요. 그러나 확실히 이해되지 않는 문장과 단어 속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초월적 가르침은 현실의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고 소설이기에 가능한 어떤 것이기에, 책을 덮고 밀려오는 섬짓한 감동을 한동안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덧붙여 문학을 어려워하는 저에게 참다운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몇 안되는 작가로써 또 다른 작품이 기대되는 수작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