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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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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최초라니 자랑스러우면서도 궁금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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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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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그저 응시하는 것만으로 10분 이상을 소비해보신 적이 있나요?

처음에는 눈, 코, 입, 피부와 머리카락등이 내 몸에 이상없이 잘 붙어있고 오늘도 다른 날과 변함없는 '나'이구나... 생각되면서도 이 집중을 오랜시간 하다보면 묘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거울 속에 나는 정말 나를 비추는 나인 건지, 한 번도 제3자의 입장에서 날 바라본 적이 없는 나는 이게 진짜 나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해보기도 합니다. 굉장히 낯설어 보일때도 있구요.


중년의 K. 어느 날 그는 아침에 일어나 돌연 이상한 연극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워집니다. 그의 아내와 딸, 키우던 강아지는 물론, 심지어 집안 곳곳에 자리한 소품까지도 평소와는 다른 낯선 향취를 풍기며 그를 밀어내는 듯 합니다. 마치 그를 제외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역할 바꿔치기를 하고 비슷한 옷에 가면을 장착한 채 아내와 딸, 애완견로봇역을 하듯이 말이죠. 더구나 주말에 치뤄진 그의 처제 결혼식이랍시고 모인 친척들은 어딘가 낯이 익지만 역시 일관된 무표정으로 또 하나의 극을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생각 끝에 K는 이 모든 혼란이 전날 밤 친구 H와 머물렀던 술집에서 필름이 끊긴 이후의 시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하고 그 곳에서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아 카페와 영화관을 전전하게 됩니다.


K가 찾으려 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휴대폰이었을까요. 아니면 지난 밤 '블랙 아웃'처리된 자신의 기억이었을까요. 그가 주말 동안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마주쳤던 사람들은 1인 다역을 소화해 내며 능수능란 그를 조롱하듯 스쳐갑니다. 제목 그대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입니다. 매형이자 장인, 매춘부 세일러문이자 딸, 악취나는 노출증 여인이자 아나운서, 포주이면서 독실한 중년여자. 이렇듯 같은 얼굴을 하고 전혀 다른 곳을 동시에 활보하는 그들의 정체는 묘연하기만 합니다. 이 낯익은 복제인간들은 끊임없이 바통터치를 해가면서 이유모를 그에게로의 미행을 계속하는데요. 이윽고 자신이 미친 건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정신과 전문의인 친구 H를 찾아가 그 해결책을 강구해 보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 불륜에 찌든 가정사와 맞바람으로 정상인같아 보이진 않는군요.^^;


K의 의심은 다음 단계로 발전하였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인가, 아니면 하느님으로 위장한 거짓 하느님의 현신인가. 내가 믿는 예수는 과연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실리콘으로 정교하게 만든 인형 리얼돌과 같은 적(敵)그리스도인가. - p.288~289


아무튼 H의 권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누이 JS와 그녀의 전 남편 P교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 역시 급격한 신체변화와 식성, 섬뜩한 취미들로 화들짝 놀래키기에 충분한 모습을 하고서 그를 맞이합니다. 그는 이 모든 현상이 보이지 않는 손인 빅브라더와 같은 거대한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앞으로 일어날 상황과 자신의 생각까지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거라 믿고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행동을 개시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K1(레인저)을 마주하게 되면서 종국에는 그와 그의 모체인 K1은 합체하여 태초의 하나였던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소 난해한 내용이죠.ㅠㅠ


그제야 레인저는 가위바위보로는 K2에게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손바닥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자네 말이 옳았군. 우린 서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한 몸인 거야." - p.333


소설은 작가 최인호가 암으로 투병한 기간동안 쓰여진 유작으로 오랜기간 역사와 종교를 다루었던 그의 문학생활에서 초심같던 스프린터의 가쁜 호흡으로 일필휘지 써내려간 산고의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처음 그의 소설을 접해본 저로써는 곳곳에서 보이는 자극적인 성적 표현과 몽환적인 느낌, 책을 덮고 나서도 뭔가 알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이 선뜻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이미지로 규정되는 건 결코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보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구분됩니다. 생김새, 습관, 식성, 말투, 성격... 이 모든 것은 내가 나임을 드러내주는 증거이자 타인이 나를 구분하는 기준인 것이죠. 허나,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고수하던 스킨 브랜드를 바꾸고 말씨와 식성 따위를 바꾼다고 해서 내가, 내가 아닌 것이 될 수는 없겠지요.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그 섀도 박스에 갇힌 K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낯설지만 익숙한 것은, 나 또한 그와 같이 일정한 틀에 의해 '나'라는 사람이 빚어진 것에 불과하단 걸 어렴풋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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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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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이후로 김인숙 작가의 작품은 두번째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작가의 가치관이 투영되기 쉽지 않아 이번 소설이 처음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공교로운 건 이 책이 세월호를 향한 목소리인 <눈 먼자들의 국가>를 덮은 후 바로 다음 책으로 선택되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내용도 모르고 스포도 안봐서 제목만 읽고는 그저 아름다운 소설이겠거니 생각하고 마음의 정화라도 하려 했건만, 이 무슨 우연의 조화란 말인가.


기차사고. 이젠 뉴스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집단사고의 한 형태가 되버린 것. 그 날 사고현장에는 웹툰작가 백주와 희중 부부,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된 그들의 아이가 있었다. 기차에 불이 피어올랐고 조안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창밖으로 내던졌지만 결국 자신은 살아남았고 아이는 목숨을 잃게 돼 떨칠 수 없는 평생의 죄책감이 시작된다. 사고의 책임과 원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기관사부터, 자살을 시도한 트럭운전사, 그에게 급여를 미룬 사장, 환경단체, 하물며 철새들까지. 따지고 들어가자면 하필 그날이 생신인 고인이 된 희중의 부친과 대전집으로 초대한 어머니까지 끝도 없었다. 재난을 당하면 도대체 누구에게 원망을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는 현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생환자인 조안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셀 수 없는 많은 약에 의존하는 의미없는 생활로 하루하루를 그야말로 지옥처럼 살아간다. 그런 와중에 윗층으로 이사 온 백주가 기차 사고 현장에 있었던 또다른 목격자였던 건 그저 우연일까.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 갇혀 소통하길 거부하는 조안은 백주에게만은 왠지 마음을 열고 아픔을 나누고 싶다. 백주의 기억 속 죽은 정희와 똑 닮은 그녀가 마치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백주는 죽은 정희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사고로 삼촌과 그녀까지 모두 잃게 될 줄 몰랐던 그의 행동이 오랜 후회를 낳게 했고 그것은 아래층 조안에게 옮겨가 위로로 바꾸어 전해진다.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매일을 술에 절어 지내고 약사인 자신조차도 발작과 두통에 시달리지 않는 날이 없는 희중. 그의 어린 과거 속 아버지는 또 다른 진실과 거짓으로 봉인된, 알 수 없는 연막 속에 가려져 가슴 속 깊이 비밀로 간직되어 있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소년기. 12살 희중의 여름방학을 악몽으로 얼룩지게 만든,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 사건은 '노란 머리핀'이라는 작고 예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와 어머니와의 비밀로 함구된 그 무시무시한 사건파일은 또래들로부터 주목받고 싶었던 치기어린 감정의 비극적 결과였다. 이야기는 희중과 조안, 백주, 상윤 각각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매 순간을 기록한다. 잘 읽히지만 지금 우리 시대를 너무도 리얼하게 반영한 소설이라 아이러니하게도 책장을 쉽사리 넘기지 못했던 책이다. 모든 사고는 수많은 우연과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된다. 그런 이유로 어느 누구에도 책임을 묻지 못하는 우리는 자책감과 절망에 빠진다. 아픈 가정사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죽고 517호로 이사 오는 백주의 사연이 밝혀짐은 기실 우리 모두 각각의 사연이 없지 않음을, 실로 알 수 없는 수많은 고리로 얽혀 있을 가능성을 말하는 듯 하다.


사고로 식구와 지인을 잃은 사람에게 10년, 20년이면 다 잊어지지 않느냐는 타인의 질문은 이 소설을 읽고나면 무심하고 소용없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주 어릴때 죽은 자식이 있는 부모는 세월이 흐르면서도 잊지 않고 그 아이의 생일을 챙기고 나이를 더해나간다 한다. 살아있으면 몇살일텐데.. 부질없는 마음이지만 그게 부모의 마음이고 결코 없어지지 않는 슬픔인 것이다. 미치지 않고선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들의 애환을 사무치도록 잘 그려낸 소설이 너무 아프고 애절하다.



"내가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무서웠어.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직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말이야" - p.320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다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다시 여름방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그런 개같은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고. 나한텐 당신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우린 그렇게 완전해질 수 있는데... 다시는 혼자가 될 수 없었어 조안."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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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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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저녁 무렵에 막잔을 들이키고 남은 마른안주거리를 싸들고 기분이라며 치킨이라도 튀겨 들고 오시는 날엔 남동생이랑 나랑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나에겐 '아버지'보단 서른이 넘은 지금도 아빠로 머물고 있는 그는 이미 고인이 된지 15년이 훌쩍 넘었다. 얼마전 납골당 만료일이 다가와 또 한번 찾아간 그 곳엔 여전히 시간이 멈춰있는 듯 고요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 울컥했다. 우리 아빠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세상과 자본주의에 힘을 다해 봉사하고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마다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자리. 가장이자 남편이자 한 집안의 기둥이었던 내 아버지를 단 한번이라도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 생각한 적이 있던가.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소설에선 수많은 아버지가 등장한다. 독재적 기질이 다분한 폭력적인 아버지, 존재감 없이 침묵하며 묵묵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아버지, 생업을 위해서라면 치사함도 자존심도 버림은 물론이요, 타국에서의 객지생활과 참전의 투지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들....

지금 우리 세대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피부로 그닥 와닿지 않는 존재다. 이야기 속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라는 굴레가 현대의  아버지들의 목과 어깨를 짓누르는 지금. 더욱 그것을 생각해 봐야 하는게 당연지사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놓치고 보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인물들의 애환과 꿈, 희망 그리고 그들에게 노동이라는 짐을 끝도 없이 지워주는 비정상적인 사회구조를 비판한다. 내가 읽은 게 틀리지 않다면 희한하게도 시인인 화자의 이름은 소설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소설로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선명우'라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아버지상이 투영되어 있다. 그는 세 딸을 두었고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자신과 결혼한 아내가 있다.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은 결코 불행하진 않았으나 만족스러웠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늘 딸들과 아내에게 밀려나 물주로서의 가치만을 인정받고 아빠니까 당연히 아플수도 희로애락을 느낄 수도 없는 '붙박이 유랑자' 신세임을 자각한 어느 날, 그는 눈내리던 막내딸 시우의 생일날 소금푸대를 실은 트럭기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지난 날 기억 속 깊이 봉인되있었던 염부인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회한으로 남은 아버지의 임종을 기억하며 그는 불구가 된 김승민과 그의 가족에게 모든 걸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식구들과의 인연은 자연스레 끊어지게 된다. 한편, 아내인 혜란과 세 딸들은 명우가 없어진 다음에야 그의 존재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건 그 동안 아버지와 남편에게 무심하고 잘못했던 과거의 후회와 이어진 사업실패로 인한 빚더미들 뿐이다.


시인인 '나'는 명우의 친딸 시우와 아버지 명우의 만남을 연결하는 결정적 인물이지만 그 역시 아버지에 대한 아픈 그리움과 이혼이라는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행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울한 소설이지만 현대사회에 깊이 스며든 자본주의 구조의 잔인함에,  날카로운 비판과 작가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 이야기가 우리 모두를 반성하고 또 불편하게 한다. 아버지도 인간이기에 첫사랑이 있었고 그 또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걸, 그리고 언제나 씩씩하고 강한 이미지만을 강요받는 자리이지만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는 걸 작가는 연이어 강조하고 있다.

명우는 원래의 가족에게 끝내 돌아가지 않는다. 그와 가족 사이에 놓인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가족과 그를 영원히 묶어지게 할 방법은 요원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기존의 생산성 지향의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과 이별하고 새 가족과 욕심없고 소박한 인생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귀가하지 않은 명우를 두고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좋지 않게 보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책을 덮고 이건 아니다 싶은 결말이었지만 명우가 비워두었던 공백기의 세월들이 원래의 가족들과의 간극을 이미 벌려놓을대로 벌려놓았고 그가 세운 나름의 철학 또한 대화로 풀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너그럽게 받아들여지는 끝이라고 위안했다. 인생의 달고 시고 쓰고 짠맛을 경험하고, 어느 날 문득 느껴진 자신에게 부당하다 싶은 현실이란 폭풍 속에서 도피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길을 튼 주인공 명우는 진심 행복해 보였기에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고 싶다.

사실 이런 자본주의 구조만을 탓할 현실은 아니지만 아직도 돈 때문에 가족 간의 존속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연을 끊거나 다투었다는 소식을 들을때면 작가와 같은 비관적 논리에 쉬이 빠질 수 밖에 없단 생각이 든다. '빨대'와 '깔때기'로 무장한 소비중심적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현명한 태도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가장이 될 이 사회의 모든 젊은이와, 노동에 찌든 지금의 아버지들에게 주어진 어려운 숙제를 나 또한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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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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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품 <고래>로 유명한 소설가 천명관의 단편소설집이다. 

하지만 그 유명하다는 <고래>를 아직 읽지 못한 나는 이번 단편집을 접하면서 다소 거칠고 서슴없는 그의 문체에 짐짓 놀라면서도 빠르게 읽히는 가독성 좋은 이야기 구조와 심각하지만 여유있는, 그러나 곧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노동과 삶'이라는 적잖이 예민한 주제로 버무려진 이 책을 유쾌하게 읽어내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천명관이 괜히 이야기꾼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이 책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드라마시티>나 <베스트 극장>과도 같은 분위기로, 깊은 여운을 주거나 새초롬한 마무리로 뒷이야기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형식을 취한다. 사람은 자신이 죽게 되면 곧 영혼은 어디론가 떠난다고 종교계는 말하고 있지만 <봄, 사자의 서>에서 과음 후 잔디 위에서 홀연히 죽음과 대면한 실직노동자의 육체는.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몸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이승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슬프고 쳐연하기만 하다.

외딴 섬의 두 여인 경숙과 유자가 청일점 동엽을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는 희극적 이야기 <동백꽃>은 섬여자들의 애환이 몇 대째 대물림되는 안타까운 현실과, 인생의 목표를 찾아 섬을 떠나려는 사내들의 아이를 배어서까지 행복을 탈환하고자 하는 발버둥이 결국엔 '사교병'이라는 헤프닝으로 인해 어이없게 실패로 마무리되는 허탈함에 헛웃음만 나오는 것이 오늘날 시골처녀의 삶과 다를 것 없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주인공 경구는 현대인의 핵가족들처럼 식구들끼리 식사를 함께 하지도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없다. 이혼한 아내와, 지금은 얼굴도 보기 어려운 아들과 딸이 그의 초라한 마지막을 지켜줄지도 의심스러운 전부인 것이다. 이런 그에게 일상의 쌓였던 분노는 무심코 건네받는 칠면조가 불씨가 되어 전성기 시절의 상징이었던 트럭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편, 귀농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은골에서의 시골생활이, 감자농사 실패와 축사의 악취에 못 견뎌 이혼과 함께 파탄나 버린 비극을 그린 <전원교향곡>은 너도 나도 뛰어드는 귀농시도에 대한 대책없는 판단을 지적하는 듯 우리 인생이 다 우리 맘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또, 불면증에 잠 못 이루면서 하루 하루를 뜬 눈으로 살아가는 <파충류의 밤>의 수경이, 자살의 늪에서 건져올린 사춘기 아이는 그나마 삶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을 만한 무언가의 가치와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천명관 작가는 이야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일탈, 이혼, 우울, 자살이라는 비극적 코드를 그저 심각하게 그리고만 있진 않다. <핑크>에서 대리기사인 주인공에게 손님으로 가장하여 시체의 운반과 자살시도를 생각하는 대범한 핑크색 뚱녀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주인공의 손길에 마지못한 듯 걸어나오지만 이 또한 훈훈한 결과로, 현실을 냉혹하기만 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면을 그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작가는 밤, 무덤, 육체노동자와 같은 비관적이고 어두운 단어들의 맞은 편에 봄과 꽃. 그리고 '달리다'라는 가능성이 담긴 형용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의 절망과 희망적인 뉘앙스를 동시에 암시한다. 때로는 손톱만한 알약에 의지해 아픔을 참으며 일해야 함에도 손에 들어오는 건 단지 몇 푼 밖에 안되는 대리기사. 믿을 건 몸뚱아리 하나뿐인 공사판 일용직 노동자의 입장에 서 있어도 사람의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제각기 살아가면서 곧잘 하게 되는 생각이 자신보다 재수없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다시 없을 거란 자괴감 혹은 패배감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지만, 다 똑같은 인생이다. 일확천금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우리는 서로를 보듬고 의지해 가며 걸어가야 하는 존재. 나약하지만 어차피 달려야 하는 인생이라면 웃음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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