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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세 명의 사람이 한 덩어리 져 있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몸에서 나온 팔인지, 누구의 다리인지 파악하기 힘들지만 꼴사납거나 민망한 느낌은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이라면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관계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2014.04.30. 자음과모음)》을 읽은 후. 소설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보다 세 사람이 하나가 된 사연을 이해하는 게 더 난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소설 속 이야기를 소소(昭昭)하지 않고 소소(小小)하게 읽었기 때문에 하나로 덩어리 져 있는 세 사람을 평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방문했던 ‘전라북도 김제’에 속해 있는 작은 도시 ‘만경’에 위치한 이모할머니 댁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에서 물 긷는 모습을 보는 건 재미있는 놀이였지만 직접 해보고 싶은 욕망은 없었다. 당연히 우물 속을 들여다본 기억도 없다. 그러나 이모할머니 집이 매각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을 때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우물가, 엄마가 밭에서 따온 과일을 뽀드득 소리가 날 때 까지 씻던 ‘우물가’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서운했다. 내게 우물은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정겨운 장소다. 《소소한 풍경》에서 우물은 죽음과 두려움, 욕망 그리고 무덤이란 의미를 함축한다. 우물의 완성은 등장인물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그들 관계의 마지막이다. 땅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녀ㄱ과 남자ㄴ, 여자ㄷ이 함께 하는 시간이 끝을 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마침내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 속으로 남자ㄴ이 사라졌을 때 남겨진 자들은 헤어질 시점이 되었음을 직감한다. 우물 파기가 세 사람의 합의로 시작된 일은 아니다. 결혼을 실패한 뒤 고향 소소로 내려온 그녀ㄱ이 집주인에게 쫓겨나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던 남자ㄴ을 집에 들이고, 한 달 남짓 후 다시 조선족 여자ㄷ을 받아들인 이유는 각자 마음에 품은 아픈 사연으로 위태로웠던 그들이 서로 만났을 때 서로의 상처를 알아봤다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가족의 죽음 혹은 가족의 살인을 경험한 그녀ㄱ과 남자ㄴ, 여자ㄷ은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이 닿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고 침묵하는 죽음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사랑의 욕망으로 표출된다. 일반적으로 셋보다 둘이 더 완벽하다는 관점은 완벽하진 않지만 안정적이기에 둘보다 셋이 더 좋다고 말하는 ㄱ과 ㄴ 그리고 ㄷ에 의해 삭제된다.
셋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더 좋았다고 나는 기억해요.
셋으로 삼각형을 이룬 게 아니었어요. 셋으로부터 확장되어 우리가 마침내 하나의 원을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역동적이고 다정한 강강술래 같은 거요. 둘이선 절대로 원형을 만들 수 없잖아요. 셋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원형이지요. p.209
《소소한 풍경》은 죽음의 두려움, 사랑의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을 우물, 원형, 숫자3으로 표현하면서 정면으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은밀한 감정을 노출한다. 소설 속 이야기는 혼란스럽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다. 현실에서 누군가의 욕망이 담긴 우물과 마주쳤을 때 나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할 수 있는 건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우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우물을 받아들일 줄 알기 위해서 나의 우물을 찾으러 길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