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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 개정판 ㅣ 문지 푸른 문학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평점 :
선재는 구름그림자에 심취에 있다. 구름그림자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란 그것에 일단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별로 없기에 풀어져 나올만한 이야기 거리는 되지 않는다. 대신 역시 쓸 때 없는 데에만 골몰하는 이상한 아이라는 평판만 공고해져간다. '철학자'라는 별명 또한 책 읽고, 시를 적는 선재의 취향을 폄하하는 조소가 깃든 낙인 같은 것이다. 정작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재에게 주변에서 들려주는 조언이란 철학을 하려면 일단 대학에 가라는 말뿐이다. 부모님을 잃고 자수성가해 선물가게를 꾸려가는 누나가 볼 때의 선재는 현실감각이 결여된 철딱서니 없는 동생일 뿐, 선재의 모든 일상을 관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저돌적인 믿음을 관철할 여건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1996년에 출간되어 알음알음 좋은 입소문을 타고 오랫동안 고요히 사랑받은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은 단순히 대학입시만을 중요시하는 교육에 관해 반기를 드는 고교생의 일탈로 규정지을 수 없는 성장소설이다. 오히려 "햇빛 때문에……"라며 아무도 이해시킬 수 없는 읊조림으로 기억되는 뫼드소 같기도 하고, 외로운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처럼 세상과 겉돌며 한참을 어긋난 시공을 떠돌 것 같은 천형을 짊어진 위태로운 존재감을 가진 아이들의 사투가 인상적인. 선재의 일기나 선재의 주변 환경을 둘러싼 분투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은 정말로 구름그림자의 잔상처럼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애틋함이 서려있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에 등장하는 노동문제에 전향적인 성향의 국어선생님 '왜냐 선생님'은 선재나 윤수의 눈에 유일하게 다르게 비치는 어른이다. 말을 더듬고 수줍은 윤수가 선생님의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과 비례해 학교는 입시 교육에서 벗어난 왜냐 선생님의 수업과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요히 고여 있는 것으로 보이던 윤수가 후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등장해 소요를 일으키는 장은 혁명적으로 보이는 찰나와 더불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곧 경계 밖으로의 추방임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선재와 그 친구들이 무기정학을 받게 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들을 수가 없다. 그저 정체불명의 노인이 사는 외딴 집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기획한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선생님들의 규정에 따라 '반성문을 쓰는 시간'을 강요받아야할 뿐. 무엇을 반성할지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악인 상황에서 선재나 윤수, 경석이들의 사정은 아마 전과는 다르게, 영영 회복 불가능한 상처와 좌절로 아로새겨질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다름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노출시켜 무리를 동요시키고, 이탈하려는 죄를 용서받기에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는 소설 속의 시공이 딱히 90년대이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라고 어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섬에서 보낸 여름'을 끝으로 선재는 여름 한철을 보낸 바닷가 마을을 떠나 누나 곁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세상과 섞여들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타의에 의한 추방이든, 자의에 의한 망명이든 선재는 앞으로 구름 그림자에 대한 명상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둘 것이다. 대안학교를 찾아 기숙사학원을 탈출한 윤수가 그곳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낙관만을 할 순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아날로그보다 더욱 아날로그 같은 한 편의 명상록, 책장 사이사이에 가득한 멍자욱과 생채기가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태풍이 지나면 현실로,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낼 시의 세계로 돌아갈 선재의 다짐은 상처로 가득하기에 더욱 간절히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