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서 1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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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연휴의 일요일 오후, 어린 조카를 데리고 집에 온 오빠는 태블릿으로 게임에 몰두한다. 곧 조카가 제 아빠를 따라서 게임에 빠져들고 서재의 아빠와 마찬가지로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페이지를 넘기며, 게임 중독이냐며 책도 좀 보라고 가볍게 지나가는 말을 던졌다. 그러자 조카에게서 자못 명쾌한 대답이 흘러나왔는데 "할아버지랑 고모도 책이 재미있으니까 게임처럼 읽는 거잖아요. 그럼 책 중독이에요?" 어쩌다가 게임과 독서가 동급이 되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즐겁기 때문에 책을 읽고, 더 많이 읽고 싶은 욕구 때문에 놓을 수 없으며, 가끔은 페이지를 다 넘기면 뭔가 더 나은 존재로 레벨 업이 되어있을 것 같은 기대치가 있기도 했으니까.


게임에 몰두하던 오빠와 조카 옆에서 내가 읽던 책은 '미미' 여사의 『영웅의 서』였는데, 양 옆에서 들려오는 게임음이 거슬리기는커녕 너무나 적절한 BGM이 되어주기도 했다. 사회파 스릴러나 미스터리, 에도 시대극이 아닌 판타지 소설작가로서의 미미 여사와 만나는데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는 없는. 각자가 그렇게 자신에게 가장 재미있는 일을 몰두하고 있을 때, 오히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웅의 서』와 마주할 수 있어서 묘한 공감대를 느낄 수도 있었다. '영웅'을 봉인하기 위해 그에 사로잡힌 오빠를 구하러 이야기의 원천으로 뛰어드는 유리코의 모험담은 판타지이자 성장소설이며, 가족을 끌어안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동급생 둘을 살해하고, 상처 입힌 후 실종된 중학생 오빠의 흔적을 좇다가 '영웅'의 실체를 태고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책들에게 듣게 된 11살 유리코는 '영웅'에 사로잡힌 오빠를 구하기 위해 '인을 받은 자'가 된다. "생각하고, 말하고, 회자되면서 탄생하는 '영웅'이라는 원천에서 그의 사본으로 위대한 일을 완수해낸 자를 '영웅'이라고 칭하고, 이것은 다시 원천적인 존재로서의 '영웅'을 강력하게 만든다"는 현명한 책들의 모호하기 그지없는 언질 속에는 영웅의 양면성에 대한 깊은 경고가 자리 잡고 있는데, 빛의 영역에서의 영웅의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의 사악함을 장악해 영역을 넓히려는 속성이 도사린다는 것이 그것이다. 구국의 존재로서의 전자는 '영웅'으로, 불온한 기운의 그것을 '황의를 입은 왕'이라고 편의적인 구분을 할 때 유리코의 오빠인 히로키는 '황의를 입은 왕'의 '최후의 그릇'이 되어 봉인된 영웅을 깨어나게 하여 이 세상, '테두리'의 멸망의 원인이 되어버렸다니, 유리코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업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오빠를 구하고자 하는 어린 소녀의 열망이 이야기의 원천적 반향으로 만들어진 '테두리'마저 구할 수 있다고 한다지만, 판타지의 속성상 어린 소년소녀에게 짐 지워진 업의 무게는 날로 육중해져가는 경향이 있어 간혹 독자의 동정심을 자아내지 못하기도 하진 않은지. 그러나 이 책에서의 유리코는 마법의 망토와 애완동물 모양을 한 조언자, 냉소적인 성향의 능력자들로 둘러싸여 있다할지라도 기꺼이 판타지의 경계를 누비며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숨겨진 신분을 회복해 왕국을 얻는 식의 RPG의 전례를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나약하고, 여리기 그지없어, 중요한 일과 대면할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도 없고, 동요를 숨기지도 못하는 어린 소녀의 시선에 따라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행복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끝을 향해 가야할 뿐이니.


동급생의 왕따 사건에 반기를 들고,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고 개선하려고 했던 히로키의 '정의'는 학생의 본분에서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담임의 '교육관'에 따라 의도적인 왕따에 처해졌던 숨겨진 진실 앞에서 오빠가 왜 영웅의 책 '엘름의 서'에 사로잡혔는지 알게 된 유리코는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다. 불의와 정의가 한 순간에 뒤바뀌고 부정한 것들이 승리를 얻을 때 반기를 들었던 가엾은 영혼이 결코 선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무엇보다 강대한 초월자로서의 영웅이자 황의를 입은 왕에게 끌리는 것을 이해하며, 더욱 상심하게 되는 어린 동생의 여정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이쯤 되면 '인을 받은 자'라는 위치는 최후의 스테이지에서 마왕을 물리치는 최고의 아이템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미야베 미유키는 영웅의 양면성 이전에 '이야기'의 심장부에 대해 방대하고, 지속적으로 책 안에서 풀어내고 있는데, 태초에 이야기가 있어 '테두리'가 생겨났고, 인간이 담겨 이야기의 허구적 속성상 '거짓'을 자아내는 죄업을 받게 되는 것이라 말한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현실을 뒤바꾸는 흐름이 되어 거대한 전환을 불러오기도 하고, 다분히 계산적인 의도대로 이야기를 이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추적이 유리코의 여정에 가득하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억겁의 굴레가 될 수도 있다. 히로키의 해방과 영웅의 봉인은 애초부터 유리코에게 부여된 미미한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상처뿐인 길이었다 해도, 허구로 가득한 이야기의 심장부를 거슬러, 절대적으로 변치 않아야하는 히로키의 순수했던 마음과 같은 가치들을 마주하고 잊지 않으려면, 유리코는, 아이는 자라지 않을 수 없다. 성장은 고통이고, 세계는 허구로 가득 찼다 해도, 영웅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아닌 미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몸부림이 왜 그토록 필요한지, 소년 소녀의 상처와 성장, 영웅담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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