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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링 짐 ㅣ 매드 픽션 클럽
크리스티안 뫼르크 지음, 유향란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그린 게이블즈의 앤』의 사랑스러운 다이애나는 "난 악당과 결혼해서 그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거야!"라고 했다, 로맨스를 꿈꾸던 소녀시절에.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갖는 환상은 자신에게만은 다정한 사람이 되어 정착하리라는 희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환상이 깨지고 나면 나머지 인생을 한탄으로 보내버리게 되는 일들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 속에서 마주하게 된다. 드라마, 영화, 소설, 그보다 더 많은 현실에서. 바람처럼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남자가 그의 발치에 몸을 던지는 무수한 여자들을 팽개치고 나에게만 충실하리라는 여자들의 심리를 이 소설 『달링 짐』에서 때로는 매혹적으로, 환상이 거치고 나면 고약스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달링 짐'이라고 불리는 그는 아일랜드의 선술집을 떠돌며 옛 이야기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낯선 이의 방문이 하루의 이슈가 되어버리곤 하는 시골 마을에서 그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여자들의 암투는 실로 노골적이다. 여자들의 망상을 극대화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 섹스심벌이 지나는 자리에 미심쩍은 살해, 강도 사건이 뒤따르는 것조차 또 다른 희생자가 될 게 분명할 여자들을 막을 수가 없다. 피오나, 아오이페, 로이진이라는 세 자매와 이모 모이라를 둘러싼 한 가족의 파멸로 치닫는 통속극으로 치부하지 않도록 세심히 신경 쓴 트릭이 정교하게 얽혀 치정극에 신비함을 부여하는 솜씨는, 궁극적인 이야기꾼이 바로 저자임을 되새기게 만든다.
짐은 악당이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매력을 너무도 많이 지니고 있는 비현실적인 인물이지만 그를 간파하고 경계하는 것은 여론을 거스르는 일도 치부된다. 범죄의 은폐를 위해 아오이페를 성폭행하고 이모와의 결혼을 계획하는 짐에게 세 자매는 복수를 감행하지만 그들은 곧 이모가 만든 덫에 걸려 희생양이 된다. 이것은 피오나와 로이진의 비망록이라는 형태로 해고된 우체국 직원 니알에게 전해지고, 짐이 청중을 홀리던 전설과 교차되면서 마술적인 울림마저 갖게 된다. 요컨대 이 치정극을 통속성에만 머물게 하지 않기 위해 동원된 기교는 기기묘묘한 옛 이야기와 마법의 세계와 결합해 신비로움을 획득하고자 애쓴다.
『달링 짐』은 질시와 암투, 복수와 또 복수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이야기가 지닌 마력의 심장부를 건드린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해서 이야기꾼을 조르게 되는, 현실보다 더 믿음직스럽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믿어버리게 되는, 끊이지 않고 전해지는 속에서 불멸을 획득하는 그런 거대한 기운에 대한 홀림이, 강렬한 구심점을 잃지 않는 것이 이 아름답지 못한 복수극을 특별하게 기억되도록 한다. 짐 스스로가 전설의 일부가 되고, 세 자매의 말로는 진실의 퍼즐을 맞추고 온전히 기억하려는 이에 의해 세간에 전해진다. 모든 것은 이야기의 일부이며, 그보다 더 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문도, 애정도, 파멸도, 응징도 이야기의 마력을 능가할 수 없다.
무료한 일상과 안온하지 그지없을 내일에 질식해버릴 것 같은 여자들에게 일생일대의 로맨스를 연출하는 짐과 같은 남자들의 존재는 일생을 멋진 모험 속에서 살게 하는 설렘을 약속할 수도 있다. 풍부한 울림을 지닌 목소리와 불온해보이지만 나무랄 데 없는 외모로 로맨스의 화신인양 다가오는 나쁜 남자는, 환상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의 깊디깊은 욕망 속에서 숨 쉬고, 더욱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그 나쁜 남자가 개심하여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남자로 화하는 결말 또한 환상의 일부이지만, 결코 실현가능하지 않는 희소성 때문에 인생을 건 도박을 하는 여자들을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 속에서 만난다. 깨어진 환상만큼 씁쓸하고 치명적인 것은 없다는 진리의 확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