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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신유박해를 떠올린다. 정약용과 그 형제들이 살았던 그 시절, 신유박해의 순교자와 배교자들을 떠올린다. 신을 지키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신도들은 한국천주교사의 순교자로 올라있고,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온 마음을 다해 섬기던 신을 최후의 순간 부정하고, 신에 헌신하는 마지막 기도 대신 고문자들의 바람대로 밀고자로 전락해버린 이들은 배교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어떤 배교자들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학문적 위업과 추종을 바탕으로 배교자로서의 추적 대신 명성을 얻기도 한다. 이 환난과 박해의 이야기는 팩션의 고전적인 소재이기도 하면서 순교와 배교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극명히 보여주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1964년 발표작이며,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적이 있는, 유현목 감독이 1965년 영화화한 이력이 있는…… 소설을 수식하는 기나긴 이력들을 지우고 김은국의, 아니 리처드 E. 김의 『순교자』를 만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세계문학의 고전의 반열에 올라 여러 차례의 절판을 거쳐 다시금 한국의 독자와 만나는 『순교자』는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 전쟁문학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펼쳐지는 종교소설이자, 한국전쟁이 아니라 세계의 어느 전쟁의 한 가운데다 가져다두어도 어색할 게 없을 만큼 탈 한국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중공군의 개입이 감지되는 즈음의 전선에서 평양에 본부를 둔 국군 파견대의 이 대위는 정치정보국장 장 대령의 지시로, 평양함락 전 공산당에게 끌려가 희생당한 열네 명의 목사들 사건의 진상조사를 맡는다. 열두 명이 순교하고 두 명의 목사가 생존했다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명령은 ‘진실’의 중심축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는데, 이때부터 시작되는 순교와 배교의 진실공방은 점차 향방을 예측하기 어렵게 흘러간다. 생존자 신 목사와 한 목사는 과연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신을 부정하고 살아남은 것인지, 그들은 무엇 때문에 희생자들의 순교를 증언하기를 거부하는 것인지, 과연 진실이 밝혀지면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세상이기는 한지.
열두 명의 목사의 순교를 최대한 부각해 공산당의 폭거를 선전하고, 기독교세력과 연합해 공동전선을 펴려는 장 대령에게 신 목사가 가진 진실의 발현이 원형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순교한 목사들 우두머리인 박 목사의 절연한 아들이며 이 대위의 강단의 친구인 박 대위가 바라는 것은 한 번도 신을 의심해본 적 없는 아버지의 최후의 순간이 인간다웠을 지이다. 이 대위는 선전에 적합한 진실을 강요하려는 장 대령과 진실이 가진 파괴력을 감당한 신도들을 염려해 위악을 가장하려는 신 목사 사이에서 진실이 진실 그 자체여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한다. 희생자들은 순교자인가, 생존자들은 배교자인가? 무엇을 위한 순교여야하며, 배교자를 비난할 수 있는 자는 또 누구인가?
중공군이 밀려들자 변변한 전투도 없이 퇴각을 결정해버리는 그들의 행보는, 어느 때보다 가장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닿지 않는 신이 부재한 시대의 참극과 일치한다. 신 목사가 폭로한 진실은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이 땅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희망을 부여하며, 상처받고 나락까지 떨어진 신의 백성들을 위한 계시가 된다. 정작 신 목사 자신은 무신론을 벗을 수 없는 굴레를 가졌으면서. 치욕의 순간, 신의 품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순간, 대다수의 목사들은 신을 부정하고, 박 대위의 아버지인 박 목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길 거부했다. 신 목사는 자신의 배교를 위장하는 것으로 희생자들의 순교를 지켜내지만 이 대위에게 있어서 이런 일련의 모든 행위들이 위선적으로 비춘다.
러시아 문학의 중요한 테마인 ‘바보 성자’의 모습처럼, 가장 낮은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신 목사의 행위는 원천적으로 신을 믿을 수 없는 자의 절망과의 사투이다. 이것이 신 목사가 짊어진 십자가이며, 순교자들의 진실을 원칙적으로 밝히고자 했던 이 대위의 구원 없는 시대를 감히 저버릴 수 없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짐 진 모든 자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책무는 완벽하게 절망해버린 인간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희망이라는 볼모가 필요하다는 처참한 인식 때문이다.
장 대령은 기독교 밖에 선 자신들은 ‘국외자’라가 칭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국외자이며 원칙론자인 이 대위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을 최후의 보루로 여긴다. 국외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교자의 존재로 애초에 존재했을 지 의문인 구원을 약속받는 행위들은 너무나 무력하다. 그러나 저마다의 십자가 가운데 유독 흔들림이 덜한 이 대위의 가치 기준이 오히려 가장 ‘덜’ 인간적으로 비추는 것은 왜일까? 믿음은, 희망은, 생존은 그것을 회의하면서도 놓을 수 없어 더욱 격렬히 지켜내는 자의 몫이라고 생각에 잠겨드는 것도 국외자의 서른 결론일 뿐이다.
한국전쟁 속의 한국기독교의 존재했음직한 참상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김은국의 『순교자』는 ‘한국색’이 옅다. 신앙의 고전적인 딜레마를 한국전쟁이라는 소재 속에 잘 빚어내어 세계문학의 고전 속으로 성큼 들어서버린 소설과의 늦된 만남은 기이한 데자뷔 속에서 이루어졌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대심문관’은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신은 필요치 않은 존재라고, 오히려 구원자를 ‘국외자’로 처형한다. 기만과 절망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하는 자들을 위해 순교, 또는 배교의 십자가를 맨 이는 경계를 초월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난다. 스스로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그는 경계를 초월해 더 큰 십자가를 맬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