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돼지가 주렁주렁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69
아놀드 로벨 지음, 애니타 로벨 그림, 엄혜숙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개구리와 두꺼비>시리즈로 유명한 아놀드 로벨이 글을 쓰고, 부인인 애니타 로벨이 그림을 그린 『돼지가 주렁주렁』, 표지부터 심상치가 않다.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풍성한 사과나무에, 정말로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강렬한 원색과 지면에 그득하게 그려진 무대풍의 장면구성이 기대감을 높인다. 막이 열리고, 닫히고, 대체 이 돼지들에게, 돼지를 키우는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하는.
장에 간 농부와 아내는 통통하게 살찐 돼지들을 보며 옥신각신하지만, 큰소리 탕탕 치는 농부의 말에 12마리 돼지들을 사온다. 그 다음 장면부터 바지런한 아내가 돼지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동안, 농부는 푹신한 침대에 포옥 파묻혀 "다음에 도와줄게"라며 핑계를 댄다. "돼지들이 마당에 꽃처럼 활짝 피어날 때-", "돼지들이 나무에 사과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을 때-", "돼지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주룩주룩 내릴 때-" 등등.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에서는, 남편과 두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 피곳 부인은 가출을 한 후, 엄마가 부재한 가정의 극단적인 상황을 겪게 한다. 반면 농부의 아내는 침대와 일체화한 게으른 남편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남편의 핑계거리를 지성스럽게 연출한다. 극적인 구성, 대도구의 활용, 적극적인 연출, 효과적인 전략전술로 대응하고 있는 아내에게 허울 좋은 귀차니스트인 농부가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상황이 시종 재치가 넘친다.
로벨의 책은 반복과 점층을 통해 주제를 더욱 공고히 한다. 아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데, 벌컥 화를 내지 않으면서, 다양하게 반복해주는 사이 변화와 성장을 유도해내는 지혜로움이 생기 넘치게 다가온다. 장면이 거듭될수록 침대에 파묻혀 게으름의 화신이 되어가는 남편을, 건강한 노동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호통과 윽박지름이 아니다. 어떠한 핑계와 구실에도 진지하게 마주대하고, 몸소 실천해내는 아내 때문에, 농부는 궁극의 게으름을 피워대면서도 몸과 달리 마음이 결코 편치가 않다.
빈둥거리는 농부보다 아내와 더불어, 12마리 돼지들을 정성껏 돌보게 된 그가 더 행복해 이는 것을 설교와 교훈으로 전달하지 않는 미덕이 돋보이는 책이다. 1979년의 발표연도를 떠올려볼 때, 로벨 부부의 변함없는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는 뒤늦은 기회가 새삼 정겹게 다가온다. 깨끗이 정돈된 침상과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농부 부부와 돼지들의 시끌벅적 농장생활에 미소 지으며 책을 덮으면, 말끔하게 정돈된 빈 무대처럼 보이는 뒤표지가 눈에 뛴다. 허전한 상실감보다는, 막이 내리고, 연극이 끝나도, 이제는 건강하게 땀 흘리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삶의 시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또 다른 기대감이 가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