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갈래 미로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초단편 소설)'이라는 작품집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이내 곳곳에서의 익히 보아 온 기시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의 오랜 TV 시리즈인 '기묘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던 기발한 발상과 규정할 수 없는 일탈의 카타르시스의 원조를 보는 듯했다. 분명 호시 신이치를 원류로 한 미디어믹스가 얼마나 방대할 지, 짐작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활발히 전해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여러 갈래 미로』는 호시 신이치의 초단편을 모아놓은 플라시보 시리즈로 명명된 라인업의 두 번째 책이다. 한 권만 집어 들게 되면, 닮은 듯 다른 듯 다른 단편들이 궁금해 연달아 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한 없이 빨려 들어버릴 것만 같은 우주적 진공관을 그의 초단편들에서 발견한 기분이랄까.


    SF의 선구자라고 하지만, 딱 어느 장르에 매인 작품을 선보이는 것보다, 모든 장르를 초월해 역발상의 신적 존재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한 줄도 너무 길다'라는 말이 있듯, 호시 신이치는 지극히 짤막한 분량 안에서 반전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승부수를 던질 줄 아는 감각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후대의 작가들에게 스며든 호시 신이치에의 오마주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

    일본인이 가장 아끼는 무사도 이야기인 '추신구라'를 패러디하거나(<마을 사람들>), 아돌프 히틀러가 젊은 시절 유태인을 빙자한 수전노에게 박대를 당하고 나서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고(<사건의 발단>), 동화 속의 해피엔딩으로 불멸을 꿈꾸는 철없는 공주님을 등장시켜 연출과 조작된 이미지를 한껏 비웃기도 하는 것(<행동한 공주>)을 보면서, 기존의 권위들을 전복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방향으로도 경계 지어지지 않는 유쾌한 조소들에 매료당한다.

    빈번히 등장하는 지구를 방문하는 우주인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서, 지옥도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지구의 실상을 한껏 꼬집으면서, 여전히 탐욕에 물들어 악마성을 잃지 않는 우리네 본질을 단박에 꿰뚫어 버리고 있다. 온 우주의 가장 사악한 무리들을 수용하는 별로 선택된 지구(<녀석들>)나, 온화한 우주인의 사절을 죽여 최선을 다해 은폐하려는 소동(<사자>)등, 지구에 사는 악다구니들을 능수능란하게 조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SF를 표방한 우주인, 로봇, 첨단기술, 환각제 등의 소재뿐만 아니라, 탐욕에 물들어 있는 욕망의 노예들이 벌이는 아수라장이 쉬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일부러 도깨비를 풀어놓아 치료비를 챙기는 정신과 의사(<작은 도깨비>)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노상강도라고 자수한 범인(<작은 기사>), 지나치게 윤리적이어서 거대 상사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을 처리하는 방법(<기업 내의 성인>) 등, 인간 본성을 폭로하고만 있는데도, 어떠한 반전보다 소름끼치는 효과를 얻는다.

    인간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이만이 쓸 수 있는 글이기에, 분량의 혁신마저 당당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호시 신이치의 초단편의 미로 안에서 헤매다가 가까스로 출구를 찾았나 싶더니만, 그것이 환각이 일으킨 꿈속의, 꿈속의 꿈....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기묘한 이야기'와 '환상 특급'의 품격 있는 원류를 만나게 되어 기꺼이 중독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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