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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는 이 한 권의 책에 지금껏 자신을 매료시켜왔던 문학적 편력들을 거침없이 내보인다. 몇몇의 작품과 작풍과 인생의 작가에 대한 편애도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때로는 독설도 마다하지 않으며 쉽게 타협하지 않는 장르문학에 대한 확신을 설파하는가하면, 경계 없이 어느 쪽으로든 열려있는 미증유의 스토리텔링을 예고한다. 쉽게 눈 돌리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현란하고 촘촘한 수사법을 총동원해 독자를 압박해오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문학적 성취를 미리 설계해놓음으로써 작가 스스로도 함께 매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온다 리쿠는 장르 문학과 대량 소비되는 연재물 속에서도, 매너리즘마저 청량하게 추구할 수 있는 역량이 넘치는, 다작이 반가운 작가이다. 할 수 없는 것을 어렵사리 전하기 위해 분투하기 보다는, 가장 자신 있는 장르의 변주를 거치며, 거듭되는 기시감을 통해 승부한다. 연작과 닮은 이야기들이 싫증이 날 때가 분명 오겠지만, 기꺼이 반해있는 편에 선 나로서는 여전히 그의 이야기에 목마르고 애타는 심정이기에 지금으로선 별다른 이의가 없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풍성한 향연을 베풀어주는 한 권이다. 그리고 거듭되는 자기복제와 변혁을 통해 닮은 듯, 다른 듯한 연작들이 속속 나와 주었지만, 원형이자 구심점이 지닌 메리트는 자못 강렬하다. 4부작으로 구성된 책 속의 책 이야기는 한 권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가 되기도 하고, 성장소설로 변모하기도 하고, 학원풍의 순정만화를 추구하기도 하다가, 어느 작가의 필생의 테마가 되어 앞으로 쓰일 책을 예고하고 있기도 한다.
『삼월은 붉은 구렁』은 4부로 이루어져있고, 책 속의 책「삼월은 붉은 구렁」도 4부로 구성된 책이다(온다 리쿠에게 있어 ‘4’라는 숫자가 갖는 완전무결함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데, 여타의 작품들에서 4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벌이는 사소하고 밀도 높은 심리극이야말로 온다 리쿠의 장기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마니아와 오타쿠의 경계에 선 독서광이라면 「삼월」이 가진 강렬한 도발에 절로 말려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고독한 사람이 모두 독서광은 아니지만, 독서광은 고독하다. 그러나 온다 리쿠는 고독한 독서광과 독서광으로 출발한 세상의 모든 작가들에게 책이란, 독서란, 저작이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지고의 가치임을 내보인다.
책 속의 책이 과연 실존하는지, 저자가 누구인지의 문제는 어느새 극히 사소한 문제로 뒤쳐진다. 극 중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등장하는 석류는 말 그대로 눈가림용이다. 표지에서부터 등장하는 증절모를 쓰고 낡은 가죽 트렁크를 든 신사, 고이즈미 야쿠모야말로 온다 리쿠가 「삼월」의 제국의 정점에 내세운 키워드이다(아일랜드 출신의 여행 작가 라프카디오 헌은 일본으로 귀화해 고이즈미 야쿠모로 변모해 민속과 괴담에 대한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방인, 이(異)세계, 부정확성, 비 일상에 대한 기이한 집착들.
그럴듯하게 정리하여 이해하려고 할수록 「삼월」은 폐쇄적인 강박증이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사방으로 열려있어 어떠한 틀에도 담지 않아도 좋은, 단순하게 재미있고 위안이 되는 한 세계로 다가온다. 왜 읽는지, 왜 쓰는지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일체감. 트릭과 중첩된 복선이 겹겹이 쌓여있지만, 온다 리쿠는 그것을 풀어주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작가이기도해서, 눈치 챌 겨를도 없이 어느새 일상에 스며들어버리는 익숙한 감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