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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토지 제1부 1 - 박경리 원작
박경리 원작, 오세영 그림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를 처음 읽은 것은 완간된 직후였다. 완간까지 기다리느라 애를 태울 필요는 없었지만, 읽는 내내 새까맣게 타버린 속내를 하고선, 세상엔 이 책을 읽은 사람과 앞으로 읽어야할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 『토지』를 읽은 사람, 앞으로 읽을 사람,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될 사람인지도.
누가, 언제 내셨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프랑스어번역본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부의 전체가 아니라, 1부의 1권을 불어로 번역하는데 10년이 걸렸다는 전설 같은 에피소드. 프랑스인인 역자가 경상도 사투리와 사투하며 일궈낸 성과였다고 한다. 『토지』를 쓰는 일, 읽는 일, 옮기는 일, 만드는 일 등 모두가 필생의 바쳐야만 하는 일임을 절감한다.
오세영 화백의 만화 『토지』를 보는 순간, 원작과 더불어 해외에 소개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대하소설, 대하드라마의 기나긴 호흡이 때로는 우리에게까지 압도적인 시간과 몰입을 강제하는 경우가 있는데(물론 그 시간과 몰입은 경이와 찬사로 이어진다), 원작에 대한 단순한 축약이 아닌, 탁월한 각색과 시각화에 성공했다면 누구에겐들 추천하고 싶지 않을까. 만화화에 대해, 기대보다는 기우와 멸시가 더 컸던 만큼, 『토지』에 대한 애정과 도전이 제대로 승화된 대작을 만나게 되어 마음이 뒤집히는 일쯤에 자존심을 세우지 않을 수 있었다.
평사리의 황금들녘과 신명나는 한가위의 풍물로 첫 숨을 토하는 만화는 이내, 풍요로움 이면에 도사리는 온통 일그러져있는 추한 욕망과 일그러진 인연들로 얼기설기 짜인 인간군상을 가감 없이 비춘다.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보다는, 보다 욕망에 충실해 위선보다는 음모를 택한 이들과 속내를 알 수 없는 뒤틀린 이들, 아직은 순진무구하나 제 가진 것 모두 빼앗기고 부초가 되어야하는 이들이 여러 장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하나하나 구분될 만큼 살아 움직인다.
귀기서린 음산한 눈빛과 짙은 병색에 깃든 파멸을 내재한 최치수, 사찰에 치성 드리러온 대갓집 아씨(윤씨 부인)가 동학당의 거두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태어난 구천이의 한 서린 바람 같은 얼굴, 신분의 벽과 관습 앞에 먼발치에서 평생을 사랑해야하는 용이와 월선이의 차마 손가락질 못할 서글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참판 댁의 절손을 이용해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욕망과 집념의 여인 귀녀, 악덕과 복수를 후대에까지 대물림하는 시리즈 사상 100% 악인일지 모를 김평산, 그리고 아직은 음모와 치정극의 정중앙에 서 있진 않지만 곧 시대적 소명까지 짊어져야할 주역들로 자랄 서희와 길상이와 봉순이.
인물묘사가 압권이다. 드라마세트로 본 평사리가 아닌 작고 조각난 칸 안에 들어찬 배경 안에서 꿈틀대는 들녘과 대갓집과 오막집, 장터와 풍물패들을 그려낸 배경들도 잘 어우러진다. 만화라고 해서 청소년과 아동에게 권할만하다고 단정 짓지 않았으면 하는데, 오히려 입문자용이라기보다는 축약된 만화『토지』의 세계관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는 완독자에게 적합한 작품이었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단시간 내에 읽어 내릴 수 있는, 군데군데 지루하고 벅차오르는 굽이 없이 읽을 수 있는『토지』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1권이다. 모세의 출애굽처럼, 평사리 주민들을 이끌고 간도로 향하는 서희를 미리 떠올려보면서, 곧 원작을 다시 손에 들어야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여러 차례 드라마가 되었으면서도 역시 1부가 가장 숨 가쁘다. 오세영 화백께서도 1부에 가장 많은 공력을 쏟으셨다고 하는데, 십분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