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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삿갓 -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이청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기행과 전설로 점철된 인물의 일대기에는 군데군데 공백기가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치밀한 고증 끝에 발굴되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고증보다는 한층 더 전설적인 에피소드를 가미해 신화의 영역까지 진입해버리는 일도 벌어진다. 김병연, 김삿갓에 대한 전기물들은 저마다 ‘고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더 많은 전설을 창출해내는 역할을 선도해오지 않았나 싶다. 이미 진실여부보다는, 민간설화와 전설의 영역에서 그를 추모하는 일이 상식적인 과정으로 고착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청의『소설 김삿갓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은 ‘김삿갓 탄생 200주년 기념’이라는 소설보다 자못 무거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자의적으로 부여한 타이틀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전설 저 너머의 실제의 김삿갓을 형상화했다고는 하나, ‘실제의 김삿갓’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싶다. ‘저마다의 김삿갓’이 있을 뿐이다.
이문열의 『시인』(아침나라, 2001)은 설화와 전설 속에 존재하는 김병연의 존재감을,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부각시켜 문학과 시의 치열한 가치증명을 꾀하는 유려한 문체가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었던데 반해, 이청의 소설은 세속적인 직설화법으로 세상의 악의와 부조리 안에서 재능과 반비례하게 비루해져가는 김삿갓의 인간적 면모가 부각되어 있다. 두 소설의 출발점의 상이함이 곧 지향점을 말해주는데, 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쪽은 오히려 이청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충신 정시와 역적 김조순을 비교하는 글을 쓰라’는 시제를 받았다는 영월의 그 백일장에서 김병연은 과연 자신의 할아버지의 반역 여부를 알고 있었을까? ‘김삿갓’의 방랑과 일탈의 핵에 해당하는 설화 상에서는 그가 장원을 하고 난 후에야 패륜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김삿갓 전설에서도 드라마를 극대화하는 부분이 된다. 이청과는 달리, 이문열은 스무 살인 그 당시의 김병연은 이미 자신의 집안 내력을 알고 있었다고 전제한다. 영월에 터를 잡기 전까지 반역 죄인의 후손으로 여러 고을을 전전하며 살아야했던 와중에서 주변에 퍼져버린 집안에 대한 평판을 그가 모르고 있을 리 만무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문열의『시인』은 충효의 사상이 전면 충돌하는 백일장의 현장에서 할아버지를 버리고, 과거를 택해야만 하는 피눈물 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김병연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다.
당대에 누구보다 공령시에 능했다는 김병연. 그가 방랑길에서 곳곳에 남긴 유희와 파격이 가득한 희시가 아닌 공령시로써 명성을 펼쳤다는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공령시란 과거를 통과할 수 있는 규격에 맞춘 입시용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과거길이 영영 막혀버린 내력을 가졌다 해도 입신양명의 꿈을 쉽게 저버릴 수 없었던 김병연에게, 넘치는 시재가 곧 반골기질을 돋우는 초석이 되어버린 것은 통절한 구석이 있다. 더 이상 썩어빠질 수 없는 문란한 과거장일지라도, 그의 열망은 가문의 회복과 권력에의 재진입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문열은 유년 시절, 가문의 내력 탓에 도망쳐 지내야했던 시절들이 그를 유랑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그의 편력과 시 세계를 몇 기로 나누어, 금강산과 홍경래의 잔당들과의 만남, 취옹이라는 시선과의 조우들을 통해 그가 공령시, 희시를 벗고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올곧게 풀어내고 있다. 이문열의 ‘김병연’은 문학적 완성을 이룬 전설과 체화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에 대한 헌사 같이 빛이 나지만, 이 또한 후대가 보태는 ‘김삿갓 상’의 일부일 뿐, 전부로 굳어질 수는 없다.
이청의 ‘김삿갓’이 여인네를 희롱하고, 권력의 핵에서 영원히 유리되었으면서도 서당에서 과거의 기술들을 전수하며 잠시의 안위를 챙기면서 제도의 문란함과 영속함을 한껏 조롱하며 육두문자와 말놀음의 절묘한 시들을 뿌려대는 와중에서 ‘홍경래 전’을 집필하기 위해 그 도당들에게 경도되는 모습은 정말 ‘소설’이기에 가능한 구상 같다. 당장 망해도 시원찮을 세상은 분명하지만, 체제전복을 옹호하는 혁명가로서의 김삿갓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구석이 많다.
천재는 세상을 용인할 수 있지만, 세상을 천재를 온전히 품을 수 없다는 막연한 풍설이 김병연에게로 이르면 이보다 더 어울릴 수가 없다. 할아버지를 조롱하고, 썩은 과장을 농락하고, 저급한 지방교육의 행태를 고발하고, 야박하고 교만한 인정들에 일침을 가하고, 권력회귀와 신분상승에의 회환을 가까스로 풀어내버리면서 자신의 멍에인 시에서도 자유로워지는 문제적 인간 김병연, 그리고 김삿갓. 우리 시대의 문장가들이 빚어내는 그의 모습에는, 전설마저 초월한 자유의지의 구현으로 이상화한 경향이 엿보인다. 시가 그렇듯, 인생이 그렇듯, 우리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김삿갓이 있을 수 있을 만큼 그의 거대한 그림자의 명성에서도 자유롭고 싶어진다.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영원을 방랑하는 김삿갓을 전설에 더는 묶어두고 싶지 아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