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의 행진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화려한 수상경력은 잠시 잊자. 전작에서 받은 인상을 기대하지 말자. 명성에 갇혀서 강박적으로 사로잡히지 말자... 이것이 내가 오가와 요코를 만나는 방법이다.


    『미나의 행진』은 구석구석 아주 치밀하게 계산된 장치들이 어우러진, 좀처럼 빈틈을 찾을 수 없는 노련함이 묻어난다. 순박한 소녀와 병약한 미소녀의 이야기라고 단순히 치부하기엔, 찻잔 속의 태풍의 파고에 책장 너머의 존재들을 격양시키는데 사용된, 투명한 반듯함과 애처로운 향수가 조용히 넘쳐흐른다. 감각적인 표지부터 삽화까지, 테라다 준조의 일러스트의 존재감이 경이롭다. 오가와 요코와 테라다 준조의 1972년 이야기는, 빛바랬지만 결코 잊혀 지지 않는 ‘한때’를 가진 이들을 위한 품위 있는 소품마냥 반짝인다.


    토모코는 가정형편 때문에 부유한 이모네에서 중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프레시’라는 라듐이 첨가된 주스를 주력 생산하는 음료회사를 경영하는 이모부 네의 대저택은, 거품경제에 구축한 졸부들의 호화주택이 아닌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동화의 성이었다. 독일인 로자 할머니, 현실감각이 마비될 만큼 ‘젠틀’한 이모부, 정물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이모, 천식을 앓는 미소녀 사촌동생 미나, 저택의 실세인 고메다 씨, 정원일과 사육사를 겸하는 고바야시 씨, 스위스에 유학중인 류이치 오빠. 그림 같은 저택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친척들이 온유하게 사는 이곳에는 피그미하마인 ‘포치코’도 산다.


    천식으로 투병중인 미나는 피그미하마 ‘푸치코’를 타고 등교를 하고, 희귀한 그림이 있는 성냥갑을 모은다. 스러져버릴 것만 같은 연약한 이 소녀는 생을 초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어서 토모코를 경탄케 한다. 평범하고 평균치의 외모와 상식을 가진 토모코는 곧 알아차린다. 이 꿈의 저택의 사람들의 작은 왕국은 묘한 은폐와 망각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중년의 프린스 차밍, 이모부에게는 또 다른 가정이 있다는 것과 가족들의 암묵적인 담합으로 만들어진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1972년의 일본에는 상처 속에서 함께 단단해져가는 여러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뮌헨 올림픽(이스라엘 선수단이 테러에 희생되었던)에서 배구 금메달을 따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했고, 지아코비니 유성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저택의 근방에서 산불이 났으며, ‘푸치코’가 죽었다. 이모부가 돌아왔고, 미나는 난생 처음으로 걸어서 학교에 갔다.


    살면서 너무 귀해서 유리병에 넣어 마개를 꼭 닫아 맨틀피스 위에 올려놓고 싶어지는 ‘한때’를 가진 그 시절의 소녀들을 만났다. 속치마만 입고 광선욕실에서 보냈던 그 시간들 안의 미나와 토모코를 사로잡은 모든 것이 표지 안에 그려져 있다. 하마, 올림픽, 저택, 유성. ‘푸치코’가 죽은 후, 미나는 홀로 선다. 이스라엘 선수단을 애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배구팀은 금메달을 땄고, 아무도 나서지 못한 이모부의 부정을 돌려놓은 것은 곧 저택을 떠날 토모코. 유성이란 이미 죽어버린 별들의 잔해인 것처럼 ‘한때’의 이야기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박제된 시간의 별무리여서인 것은 아닐까.


    소소한 일상들이 더하고 더해져 소녀가 장년의 시간을 맞이하면서 불러내는 ‘그때’의 이야기는 별이 그렇듯, 가장 찬란한 죽음의 잔해인 별무리마냥 빛이 난다. 다시 오가와 요코의 전작들을 떠올리고, 최근에 읽었던 영화화된 소설도 불러오고, 줄줄이 읊을 수 있는 수상경력도 되새겨본다. 오가와 요코는 백면상을 가진 소설가이다. 어떤 얼굴로, 무수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섬광이 번뜩인다.


    토모코, 미나, 푸치코, 성냥갑에 적힌 메르헨들, 도서관의 핸섬한 자라목 오빠, 이제는 맛 볼 수 없는 프레시, 흉한 기숙사로 바꿔버린 아시야의 저택, 다사다난했던 1972년이여, Auf Wiederse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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