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블로그 - 익명의 변호사
제레미 블래치먼 지음, 황문주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처음부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인상이었기에, 유쾌함과 신랄함 이상을 기대하진 않았다. 법정 스릴러나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꽉 짜인 플롯과 반전의 묘미를 얻으려 했다면 선택부터가 잘못이었을 것이다. 철저하게 목적성에 맞는 글을 읽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에, 이 씁쓸한 기운은 예상 밖의 결론을 안겼다. 가볍게 읽기를 지향하며 창조된 글임은 분명해도 여운은, 터지지 않는 실소 안에서 부유하며 분출될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칙릿이 대세를 이루었던 2006년에 이어, 올해의 트렌드는 [Blook(블로그와 출판물의 결합)]이 계보를 잇고 있다. 대형 커뮤니티 안의 블로그들마다 화제성과 실력을 겸비한 인기블로거들이 있기 마련이다. 인기검색어나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폭발적인 반응이 곧 공식적인 데뷔(?)로 이어지기도 하고, 유명세에 아랑곳없이 묵묵히 거대한 방문자를 거느리면서도 자기색을 잃지 않는 드문 케이스도 볼 수 있다. 『익명의 변호사』는 오프라인의 실험적인 시도가 주류매체들에게까지 회자되면서 인기블로그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리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는 관행에 안착한 듯하다.


  하버드로스쿨 출신의 저자는 실제 로펌에서의 인턴근무를 바탕으로 ‘익명의 블로그’를 만들었다. 자신이 거대로펌의 인사 담당파트너라는 가정으로 출발한 실험적 글쓰기는 온, 오프라인에서 선풍적인 화제를 모았다. ‘익명의 변호사’는 우리가 늘 보아왔던 존 그리샴 류의 법정스릴러와는 차별적인 노선을 걷는다. 인사이더 사건처럼 ‘비밀’스럽기는 하지만, 법조비리의 폭로가 아니라 부당하고 뒤틀려있는 로펌 내의 인간 군상들의 암투가 과장되어있기는 하지만, 묘하게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지만은 않다.  


  인사담당 파트너 쯤 되다보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사장뿐인데, ‘익명의 변호사’에게는 ‘머저리’라는 만만치 않은 적수가 있다. 이런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익명의 이메일계정을 만들고, 18년간의 성공지향적인 로펌생활에서의 유일한 배출구로 블로그를 시작한다. 적당한 닉네임과 사건들, 슬쩍 바꿔놓은 지명과 결과들로 위장했어도 날로 늘어만 가는 방문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아는 사람, 자기네 로펌이라고 착각을 한다. 아니, 그만큼 비인간적이고 상식과 동떨어진 관행들이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폭로의 장이 된다.


  로펌이란 철저하게 고객의 돈을 합법적으로 강탈해내는 영리단체이다(라고 익명의 변호사가 말한다). 사회적인 기여와 봉사,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구현을 위해 변호사가 된다는 신참내기들을 회유하는 방법은, 회사차원에서 준비하는 몇몇의 청사진이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익명의 변호사가 말한다). 감히 휴가를 가거나 회사의 사무용품을 낭비하고, 등급에 맞지 않는 부대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역시 말한다). 변호사는 로펌이 마지막까지 써먹는 부속품이다(라고도). 모든 것이 날조이면서, 그렇게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현실의 반영이라는 것에 오싹해져온다.


  익명의 블로그가 더는 익명적이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에 우리 ‘방문자’들은 동정을 느낄 수도 없고, 마냥 분개해버릴 수도 없다. 덜 도덕적이고, 더 지체하지 않고, 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자가 높은 층의 전망 좋은 사무실을 가질 수 있으며, 쇼핑중독 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 훔친 사탕과 슬쩍 들고 가버린 스테이플러에서 시작된 투덜거림은 치졸하면서도 귀여운 듯싶었으나, 성공지향의 변호사무리들이 우글거리는 로펌이라 불리는 리얼리티 쇼의 세트는 태생적으로 배배 꼬여있는 탓에 끝 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가볍게 읽고, 유쾌한 여운을 얻고 싶었다면, 워낙 비틀린 곳에 발을 디딘 방문자의 즐겨찾기야 말로 문제가 있다. 냉소와 음모의 끝에 인간성의 회복이 잠자고 있다고 믿었다면, 다른 블로그를 탐색해야 맞을 것이다. 익명이란 쿨해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 독이 되어 나를 옭아맬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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