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바이올린
진창현 지음, 이정환 옮김 / 에이지21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지금은 고인이 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유망한 감독이었던 콘도 요시후미의 애니메이션『귀를 기울이면』에서 나오는 소년소녀를 기억하는가? 독서광인 소녀 시즈쿠는 바이올린 메이커를 꿈꾸는 소년 세이지를 만나, 비로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된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가운데서도 가장 희망적이면서 건강한 청춘다움이 물씬 풍겼던 그 작품을 떠올린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처럼 명기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 크레모나로 유학을 떠났던 중학생 세이지는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한국어판 <천상의 바이올린>)』으로 유명한 진창현에 비하면 얼마나 빛나는 출발을 할 수 있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진창현은 일제 강점기에 경남 이천의 비교적 유복한 지주의 가문에서 태어나 중등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카와라는 일본인 선생님께 감화 받으며 막연하지만 잊혀 지지 않는 바이올린과의 만남도 이룰 수 있었다. 종전을 맞기 전 일본으로 건너와 여느 재일한국인과 다름없는 차별과 냉대 속에서 자신의 소명인 바이올린 제작의 의지를 불태우며 한 번도 수월한 적 없는 파란 많은 인생을 벼르기 시작한다. 조선인이라는 그의 신분은 일본의 어느 바이올린 제작자의 제자로도 들어갈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홀로 고독한 바이올린 제작에의 의지는 꺾인 적이 없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이 수세기에 이르도록 밝혀지지 않은 것은, 바이올린 제작과정을 제자나 아들에게도 물려주지 않는 장인들의 폐쇄적인 작업환경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지금도 지켜나가고 있는 불문율이다. 진창현이 부딪힌 것은 이방인에 대한 냉대 뿐 아니라, 이런 가혹한 작업과정을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뚫어나가야 하는 막막한 현실이었다.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봐도 그가 이룩한 거대한 위업 속에 누군가의 지도나 조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내와 서서히 그의 명성을 인정해주는 우호적인 몇몇의 지인들은 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명기를 만들 수 있는 온건한 힘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세계에서 5명밖에 없는 무감사 바이올린 메이커가 된 과정을 닮은 그의 자서전은,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확대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어떠한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로도 전할 수 없는 진정성이 생생히 담겨 있으니,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덧씌워진 전설이 되어버린 일화들은 그 치열한 삶 앞에서는 아주 작은 역할을 할 뿐이다. 바이올린의 현처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빼고, 총 4현, 네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각 장에 담긴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공에 이르기까지 그가 반복한 실패와 시행착오와 끈기의 소산이다. 화려한 명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있게 해준 과거의 피와 땀으로 이룬 지난 시간이 담담하지만 웅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일본에서 출간된 후, 드라마가 되고, 여러 다큐멘터리로 고국에서 소개되기도 하면서, 이제야 한국어 번역판으로 만나게 된 책은, 진창현의 인생역정을 담아내기에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분명 이 책은 진창현이 후기에 밝힌 바대로 일본인 대필 작가(오카야마 도오루)가 구술이나 인터뷰를 통해 정리했을 것이다. 유독 이천에 대한 회고와 어머니를 비롯한 한국에 남은 일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할 때마다 느껴지는, 껄끄러운 일본어투의 번역은 책을 일독하는데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이 낳아주고, 일본이 길러주고, 미국이 은혜를 베풀었다’라는 그의 콩쿠르 수상소감처럼, 그를 강하고 유연한 음색을 지닌 명기를 빚는 장인으로 만든 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서도,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일은 한 번도 게을리 하지 않은 소명의식의 구현일 것이다. 꿈꾸는 것을 게을리 하고, 내 소명을 미심쩍어하면서, 하루하루를 그저 그런 시간으로 퇴색시키고 있는, 너무 많이 가져서 오히려 정신이 궁핍한 시대를 사는 우리를 자성하게 만드는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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