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정글 1
캔디스 부쉬넬 지음, 서남희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뉴욕의 휘황한 마천루들은 명백히 남성성의 상징물이다. 거칠 것 없이 수직적이고, 때로는 살풍경할 정도로 건조하지만, 의심할 나위 없이 성공지향적인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보면서 여성성을 떠올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캔디스 부쉬넬의 <립스틱 정글>은 고정관념과 도전정신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들을 극대화하여 매너리즘 안에서 생기를 얻는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은 저자가 아닌 오히려 속편을 열렬히 기대하고 있는 독자들일 것이다. 캔디스 부쉬넬이 <립스틱 정글>의 저작권을 방송사에 넘기는 순간, 확정되지 않아 더 애가 타는 영화 소식에 지친 SATC 매니아들은 <립스틱 정글>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 오산이라는 것에 진심으로 기뻤다. 캔디스 부쉬넬은 세 명의 히로인 가운데 빅토리 포드를 가장 총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빅토리 포드는 아슬아슬하게 성공의 영역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재능을 인정받는 디자이너이다. 새로운 컬렉션에서 자기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평단과 비즈니스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패션을 여전히 예술의 일환으로 지키고 싶어 하는 단호함을 가졌다.


웬디 힐리는 뉴욕의 유일한 거대 영화사의 사장이지만, 지금 추진 중인 영화사 사상 최대의 투자액을 퍼부은 프로젝트의 위태위태한 결과에 따라 한 순간에 끌어내려질 수도 있는 모험 중이다. 성공한 캐리어와 화려한 연봉의 이면에는 전업 남편과 다루기 힘든 세 아이가 있다. 그리고 자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가족을 부양하면서, 가정의 위기에서 늘 도망치고 있다는 데 있다.


니코 오닐리는 잡지 <본파이어>의 편집장으로 전도유망한 듯 보이지만 주위에 있는 남성 중역들과의 경재에서 한 순간이라도 밀려나면 그대로 추락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다. 뉴욕의 마천루를 보며 ‘립스틱 정글’이라고 자조할 만큼 당당하지만, 젊은 속옷 모델과의 불륜에서 오는 삶의 활력으로 자신의 상황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40대의 성공적인 캐리어를 지닌 세 명의 여성들은 SATC에서보다 연륜으로는 진일보했으나, 애정문제와 직장 내의 호전적인 상황에서는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뉴욕의 립스틱 빌딩 사이에서 그들은 여전히 여성성을 시험받고, 적대적인 남성들과 서바이벌 게임을 해야 한다. 페미니스트가 되기에는 그것이 시류에 너무 뒤처지는 일이라 관심이 없고, 권력의 최상위층에 자리 잡은 굳건한 마초성과 사회적인 통념 앞에 굴복하기에는 자신들의 재능과 능력을 폄하할 수도 없는 일이다.


킬링타임용으로 읽으면 딱 일 칙릿인가 싶었으나, 캔디스 부쉬넬의 날카로운 필력은 자기복제 안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들의 무거운 중년의 고뇌만큼이나 절박한 면이 있다. 화려한 뉴욕의 패션과 영화와 거대 잡지사를 무대로 펼쳐지는 스캔들과 성적인 폭로전을 기대했다면 가독성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빅토리가 성공이 보장된 지난날의 컬렉션에 안주하지 않기를, 웬디가 일군 ‘오스카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될지 모를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가주기를, 니코가 과연 기만적인 가정생활을 불륜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개선할 것인지를... MTV적 속도감이 이미 한 시대의 유물로 굳어진 지금을 사는 나로서는 페이지를 넘기며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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