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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레르를 위한 세상 - 이탈리아문학 ㅣ 다림세계문학 3
로베르토 피우미니 지음, 체코 마리니엘로 그림, 이현경 옮김 / 다림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생소한 이탈리아 아동문학(쿠오레...말고는 생각안남)과 발음하기 힘들었던 삽화가의 이름, 책을 읽고 기본적인 정보는 쉽게 외우는 내게 익수치 않은 벽이였지만, 지금은 자신있게 말한다. 로베르토 피우미니, 체고 마리니엘로, 그리고 표지를 그린 크빈트 부흐홀츠(책 그림책...으로 유명한 부흐홀츠, 점묘로 묘사하는 삽화의 세계에서 따를 자가 있을까?), 내 기억의 창고에 고이 모셔둘 것이다. 마두레르을 위한 세상, 읽고나서 내게 '혜안'을 안겨준 몇 안되는 좋은 여운의 책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림에 담을 줄 아는 당대 최고의 화가 사쿠마트. 그 사쿠마트를 부유한 지방의 고귀한 성주가 초빙하길 바라는 자리에서 아들을 위한 일생일대의 청을 한다. 희귀병, 빛을 그대로 받는 것도 안되고, 맑은 공기는 독이 되며, 겹겹의 비단 천으로 휩싸인 자신의 방 이외에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아이, 마두레르를 위해 아버지는 세상을 품은 화가를 부른다. 아이의 방에 세상을 그려달라고. 마두레르, 곧 이 세상을 떠날, 딱 살아온 그 방만한 세상말고는 더 보아온 것도 없는 이 아이를 위해 아버지와 스승은 세상을 준비한다. 그렇지만 화가가 계획한 세상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내세운 욕심을 무색하게 할 만큼, 마두레르는 자기 세상을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두레르가 쉼없이 쏟아내는 이야기 안에, 이야기 책 안에, 마두레르의 천성 안에 누구도 접근한 적 없는 순수한 세계가 펼쳐진다. 사쿠마트는 스승이 되어, 또 다른 아비가 되어, 친구가 되어 함께 세상을 그려나간다.
병을 앓고 있는 병약한 존재로서의 마두레르는 없다. 동정을 바라지도, 추종을 바라지도 않는다. 세계를 똑바로 바라보며 건강한 동경을 간진한 아이, 남겨질 아비와 스승에게 절망과 슬픔 대신 찬란한 추억과 안정을 준비해 둘 줄 아는 아이, 더 없이 귀하디 귀한 그 아이. 온 세상을 붓끝으로 창조해내는 사쿠마트지만 오히려 마두레르가 이야기로 창조해내는 세상 속에서 본연의 자연을 배워나가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변해가는 곁을 허락하는 이들만이 누리는 조화의 결과물이다. 마두레르의 방을 채워나가던 산이며, 바다며, 초원의 이미지들이 더는 확장하지 않은 채, 자연의 변화를 담아내는 그 과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는 인간의 담담한 인식이다. 초원의 푸른 빛은 점차 스산한 색채로 바래고, 겨울의 들판은 삭막하다. 그렇지만 정체되어 있지 않은 그 변화무쌍함이 건강한 죽음을 맞이하는 마두레르를 위한 최고의 배웅이다. 남은 자는 눈물을 흘리겠지만, 그토록 치열한 세상을 살다간 작디작은 아이를, 올바르게 기억해갈 것이다.
스트랄리스코, 들판에 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이삭으로, 한밤중의 들판에서 별처럼 빛나는 식물이라고 마두레르가 이야기한다. 이 책의 원제가 바로 '스트랄리스코'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곁에 없다고 해서, 세상에 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잔잔한 웅변인 듯 하다. "아버지, 같아요. 스트랄리스코가 없으면 별이 빛나요. 그 둘은 같은 것이에요." 더 이상 붓을 들지 않는, 세상을 그려내지 않는 사쿠마트의 지금, 이제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끝냈으니,지켜봐주는 소임이 남았다. 아름답게 떠나버린, 아비와 화가의 스승이었던 아이의 대신.
복잡하고 온갖 상징으로 가득찬 낯선 이탈리아 문학이었지만, 되새겨볼만한 생각거리를 잔뜩 안겨주었기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