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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 ㅣ 네버랜드 클래식 17
오스카 와일드 지음, 마이클 헤이그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스카 와일드, 동화와 도저히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약력의 소유자. 그렇지만 그도 두 아이(시릴과 비비안) 아버지였고, 진정성이 담긴 동화집을 남길 수 있었다. "누구나 자기 아이를 위한 이야기를 지어야한다" 맞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쓴 케네스 그레이엄도, <위니 더 푸우>의 알렉산더 밀른도, <돌리틀 선생 항해기>를 쓴 휴 로프팅...도 자기 아이들을 위한 책을 쓰지 않았던가. 자신의 재능의 극히 일부분만을 작품을 위해 쓰고, 대부분은 자기 인생에 쏟아부었다고 당당히 말하는 오스카 와일드는, 정말 딱 자기 세계의 틀 안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조롱과 가혹한 진실이 담겨진 잔혹동화를,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는 게 분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창조했다.
<<행복한 왕자>>는 오스카 와일드의 기존의 성향을 뒤집어 놓은 듯한 종교적인 색채와, 눈에 띄게 들어나 있는 교조적이기까지한 메시지로 무장하고 있는 동화들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정수는 정말 아이들에게 주어도 좋을까... 하는 의문이 새록새록 들만큼 충격적이다. 물론 나도 어릴 때 읽었으니, 한참 앞뒤에 맞지 않는 말이 되고 말았지만.
종교적이고 자못 도덕적인 교훈들로 가득한 동화는, 아이들에게는 한 없이 가슴 저릿해지는 슬픔과 아련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내게는 사악한 인간성 속에 숨겨진 휴머니즘의 불씨를 발견해낼 수 있게 한다. 정말? 와일드의 의도는 분명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도 세상의 온갖 추한 욕망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에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사해적인 무엇인가를 발견해나갈지, 선택은 이제 아이들의 몫으로 남는다.
<<행복한 왕자>>는 왜 이토록 하나같이 고통스러운가? 왜 이렇게 아픈 이야기였다는 것을 십 수년이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는가? 맞다, 성장통을 유예해보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정관념의 평온함에 기대어서.
<행복한 왕자>에서는 고철덩어리 깨진 납덩이 심장과 싸늘한 제비의 시신으로 남아, 세상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추앙받지만, 되돌려받을 길 없는 이생을 던져버려야 했고,
<욕심쟁이 거인>은 늘 겨울인 자기 정원 안에 봄을 맞이하기 위해 메시아를 영접하고 나서, 더 찬란한 은총의 증거로 주님의 정원으로 불려간다.
<진정한 친구>의 한스는 우정을 귀히 여기는 증거로 이기적인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 허울 좋은 친구에게 충성한 댓가로.
<저밖에 모르는 로켓 폭죽>은 끝도 없는 자만에 빠져 진흙탕에서 쳐박혀야만 한다.
<나이팅게일과 장미>는 읽다가 내 심장에서도 한방울, 선혈이 흘러나왔다. 나이팅게일이 가난한 청년의 순결한 사랑을 위해 심장을 백장미의 가시에 단단히 밝고 '스완송'을 부르다고결한 생을 마감한 채 피워낸 붉은 장미는, 보석보다 못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불평 앞에 쓰레기로 변해야한다.
<어린 임금님>의 금욕주의자로 거듭나는 성 프란치스코 식의 수행이나,
<스페인 공주>나 <별 아기>같은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타락한 혼들의 씁쓸함,
<어부의 그의 영혼>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어부의 심장에는 영혼이 들어갈 자리가 없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죽고 어부의 심장이 고통으로 쪼개지자 그제서야 영혼이 흘러든다.
오스카 와일드는 현실의 잔혹한 일면을 극대화하고 종교적인 안식을 구원처럼 등장시키지만, 여전히 이교도적이며 사악하리만치 탐미적인 자기욕망의 분출을 곳곳에 드러낸다. "예술은 윤리적일 필요가 없다"고 부르짓던 그가, 아이들에게만은 윤리적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확언할 수가 없다. 처절하다. 죽음으로 완성을 이룬다. 보답받지 않는다. 희생은 오히려 영광의 이름이다. 영혼을 잃지 않으면, 절대적인 자신을 잃지 않으면 다른 가치를 이룰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실이지 않은가. 인간의 본성이란 어둡고 사악한 일면이 있어, 행복에 이르기까지 치뤄내야할 댓가를 간과하기 쉽상인 것을.
일단 시공네버랜드클래식판의 <<행복한 왕자>>의 안팎은 와일드의 벨벳망토 마냥 빛이 난다. 아름다운 색채와 몽환적인 삽화 또한 말끔하다. 마이크 헤이그는 오스카 와일드의 내면의 일부를 삽화로 옮겨놓은 듯, 지나치게 맞아떨어지는 삽화를 구현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겉치레에 정신을 빼앗길 지경이다. 오히려 어린이작가정신에서 나온 <행복한 왕자>(단편선이 아닌 단편)의 삽화에 끌린다. 조르쥬 르므완느의 보다 은은하고 한 발 물러서 있는 삽화가 와일드 월드에는 어울린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가 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공네버랜드클래식의 <<행복한 왕자>>에 더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어린이작가정신은 불어판을 중역하고 있다는 데 있다.
동화를 그저 단번에 읽어내지 못하고, 가슴에 멍울이 맺혀 삭히고, 삭히며 읽게 된 터닝포인트가 되어 준 <<행복한 왕자>>, 아름다움이란 참으로 덧 없다. 행복이란 참으로 많은 것을 요구한다. 무조건적인 희생 앞에 깊이 고개를 숙여야한다고 지금껏 믿어왔을지 모르나, 아직도 그래야하나?
부럽다. 동화에 메스를 들이대지 않아도 되는 영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