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반 고흐의 그림을 최고 성능의 컬러복사기를 이용해 복제한다면, 그 그림은 고흐의 원작과 다를까? 수준 높은 미술평론가들조차 원작과 모작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면, 양자의 ‘산물로서의 가치’는 동등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원작이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 왜 그런가?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performance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솔직히 말해 나는 정신적 장애(정신장애와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자립생활운동을 출현시킨 그 ‘자율적인 정신’을 희망하며 나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해온 ‘남성 신체장애인’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자료, 강의를 하며 만난 장애인 가족, 관련 직종 사람들의 이야기, 재활학교에서 만난 발달장애를 가진 친구들과의 경험은 정신적 장애인들의 언어와 생각에 대한 비정신적 장애인들의 ‘독해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알게 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우선 장애아를 기르는 일이 때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초월할 만큼 힘겨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겨내리라는 생각은 어쩌면 환상이며, 이런 환상은 스스로가 아픈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부모들에게 부당한 죄책감만 유발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출산을 망설였을지도 모른다고 답한 부모들조차 여전히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답했다고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나를 잘못된 삶이라고, 실격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했던 인간들에게 무사태평한 도덕감 따위 무시하고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어야만, 우리 스스로 자기실현을 위한 인정투쟁의 ‘윤리’에 도달하는 것 아닌가?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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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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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복지시설에서 목욕을 도와주는 정치인의 얼굴은 드러나지만, 장애인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이 없다면 반응할 수 없다. 얼굴이 없는 존재, 익명화된 존재, 기호화된 존재는 오믈렛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상대방의 반응에 반응하지 못하며, 반응하더라도 상대는 그 반응을 무시하기 일쑤다. 품격에만 초점을 두는 퍼포먼스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1인만을 위한 무대가 되기 쉽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로지 그에게 맞춰 움직일 뿐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15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그 반대쪽에 있는 나를 비롯하여 장애, 질병, 빈곤 등을 이유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의 공연에 동원되는 순수한 피해자인가? 노련한 삶을 살기 위해 애썼던 나는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을 끔찍이도 경계했다. 그 노련함의 핵심은 나의 자존감을 지키고, 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을 빛내는 자들로부터 나의 ‘결핍’을 착취당하지 않는 전략이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장애를 고의적으로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그 커플은 청각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반문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우리 대부분은 사춘기 무렵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자기 몸의 특수성과 한계, 가능성을 확인하고, 또래들을 모방하면서 사회의 신체 운영 규범(‘품격’도 포함될 것이다)에 맞게 이를 조율한다. 자신만의 ‘몸 운용’ 스타일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나는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발전시킨 방법에 도움을 받았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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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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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아이가 다가와 "아저씨 다리 어디 갔어요?"라고 물을 때 "네가 찾으면 5000원 줄게. 망할 다리가 어디 갔는지 일주일 내내 찾아도 없거든!"3이라고 말하는 냉소적 유머 감각도 여기 해당한다. 장애나 만성질환을 오랜 기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상호작용 기술의 전문가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신체 기능이 쇠퇴하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장애인들에게 이런 기술을 전수받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저 두 종류의 노련함으로 깔끔하게 돌파 가능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두 사건은 이처럼?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의 범인과 달리 우에마쓰 사토시는 단지 장애인을 혐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애인을 죽이면서 자신이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형사처벌과 도덕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구원했다는?그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하기를 원했다. 그는 단지 장애인이 혐오스러워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구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연(퍼포먼스)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타인을 돕는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까지 모두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군의 사회학자들은 우리가 타인과 만나 상호작용하는 일상 그 자체가 사실상 ‘공연’의 성격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Goffman은 공연을 "개인이 특정 관찰자 집단 앞에서 계속하는 모든 활동, 그리고 관찰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공연에 장애인이 참여하는 경우를 모두 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행위자인 장애인도 당연히 공연에 참여해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나는 내 퍼포먼스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 내 퍼포먼스를 위해 누군가를 모욕한 일도 없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우아함’을 위해 그 순간 나와 함께했던 많은 이들과 나 자신을 게임의 일부로 만든 것은 아닌가. 이들을 현실에서 배제하여 내 삶을 가상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삶이 일종의 연극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큰 진실을 위해 거짓을 연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빛내는 데만 몰입하는 사람들은 작은 진실을 위해 큰 거짓을 연기한다. 나는 이를 ‘품격주의적 태도’라고 부르고자 한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모든 인간이 왜 존엄한 존재인지는 국제 인권 규범이나 헌법, 법률에 근거할 수 있지만, 그 규범과 법률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는 늘 논쟁적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는 종교인들에게는 유효하겠지만, 세속적인 현대인들에게는 타당한 근거가 아니다. 나는 추상적인 인권 규범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우리는 각자가 왜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엄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이처럼 서로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반응은 더더욱 크게 확장되고, 각자의 반응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하나로 수렴된다. 이러한 인간적 상호작용의 특징을 성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타인을 존중할 때에도 동일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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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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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도 한때는 나의 출생을 ‘손해’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내가 태어난 1980년대 초에 장애아를 기르는 일은 실로 막대한 ‘손해’였고, 이는 지금도 그렇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출산과 동시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한 사람의 개인으로 성장하고, 확장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축적하고 체화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부모 또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성숙일 수도 퇴보일 수도 있지만, 부모 역시 서서히 자녀와 ‘만나가는’ 것임은 틀림없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나의 어머니에게 1980년대 초반 나의 출생은 분명 ‘손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2016년 내 어머니와 나의 만남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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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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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삶wrongfullife’ 소송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으로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의 한 유형이다. 대개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이 소송의 원고가 된다. 물론 어린아이가 직접 소송을 하는 것은 아니고, 부모가 아이를 대리하여 소訴를 제기한다. 즉 산부인과 의사의 실수로 장애아가 태어나 아이 자신에게(부모에게) 손해가 발생했으니 그것을 배상하라고 청구하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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