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숨결로 이 땅 공기가 정화되리라는 거룩한 착각을
이 책은 초반부터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예수회
사제이다.
신부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신부의
글은 몇 읽지 않은 것 같다.
읽었어도
기억에 없는 것 보니,
나에게
충격(?)은
없었던 듯싶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충격을 준
첫 번째 신부의 글로 기록될 것이다.
어떤
충격인가?
이 책은 잔잔한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잔잔한 충격을 준 것은 저자가
머리말에 인용한 하이데거의 말이다.
“인간은
거주함(dwelling)으로
존재하며,
이
거주함은 바로 집을 짓는 행위(building)로
인해 공간이라는 장소에 새겨진다.
아울러
인간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자신 밖의 세계에 조응하며 관계하다가 마침내 사유(thinking)한다.”
그렇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자신 밖의 세계에 조응하며 관계하다가 마침내 사유(thinking)한”
기록이다.
잘
먹어라,
그래서
힘내라.
세상은
전쟁이다.
저자가 조응하며 관계한
‘자신
밖의 세계’는
어떠한 모습일까?
저자는
38쪽에서
어느 부녀의 대화를 소개하고 싶다.
푸드 트럭을 운영하는 어느 아빠와
그의 딸이 나누는 대화가 등장한다.
저자가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들른 다음,
귀가하는
길에 만난 푸드 트럭이다.
거기에서
저자는 만두를 시켜먹고 있다가 그 대화를 듣게 된다.
교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단발머리의 딸아이가 아빠에게 말을 건넨다.
“아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이 나라는,
왜
이리 힘들어?”
그런 질문에 아빠는 그저 입가에
미소만 띨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딸아이가
말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전쟁처럼 살아내야지만 얻을 수 있는 나라야!
이
나라는......”
아빠는 딸아이의 푸념치고는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이 10대
소녀의 통찰에는 아랑곳 않는 듯이 갓 쪄낸 물기가 자르르 흐르는 만두 한 접시를 아이 앞에 내 놓았다.
“먹어야
전쟁한다.”
(37-38쪽)
그런 대화는 저자로 하여금 잔인한
세태를 실감케 하며,
그
잔인함은 그로 하여금 수도자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우리 사회가 10대들에게
평범하게 사는 일상의 삶이 곧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내야 하는 현실로 비추어지는 시류의 지표를 그야말로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이
잔인한 시류의 징표 앞에서 수도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38쪽)
그가 꿈꾸었던 수도자의 모습
그런 세상에서 그가 꿈꾸었던
수도자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저자가 이 책에서 몇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공기가 너로 인해서,
그리고
네가 앞으로 수도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삶을 통해서,
조금만
더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로 변해가도록 노력해다오.
친구야.”
(39쪽)
저자가 입회
직전,
수련원으로
향하고 있던 차 안에서 받은 죽마고우의 전화 한통.
그 전화에서 친구가 한
말이다.
이
삶의 공기가 조금만 더 숨을 쉴 수 있는 공기가 되도록 해달라는 부탁,
그
말은 두고두고 그의 가슴에 살아 움직인다.
그 말은 저자가 그의 은사에게
헌정한 첫 번 째 시집에 썼던 말 속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세상의 언어는 시인으로부터 아룸다워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의 공기는 구도자의 숨결로 정화된다는 선생님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8월
21일.’(93쪽)
<나는
아마도 오늘 이렇게 스승의 서재에서 나가는 즉시 나의 숨결로 이 세상의 공기를 정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룩한 착각에
휩싸여,
이
미소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
(95쪽)
나는 이 글에서
‘거룩한
착각’에
밑줄을 그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착각을
그렇다.
설령
그것이 착각이라 할지라도,
착각에
그치고 말지라도,
나의
숨결이 이세상의 공기를 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런
생각하면서 살면 아무리 이 땅이 전쟁터 같을지라도 조금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여기서 니체를 만날
줄이야!
1889년
1월
3일,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한 마부가 말을 때리고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것을
본 니체는 맨 발로 뛰어나가 말을 껴안는다.
난,
그
때 니체의 생각이 무척 궁금했었다.
과연
니체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말을 껴안았을까?
그 때 니체의 온몸을 휘감았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안타깝게도 니체는 그 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생각을 기록해 놓지 못했다,
그는 말을 안고난 다음에 바로
졸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때 니체를 사로잡았던
그 생각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던 그 생각, 편린이나마 이 책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순간 말을 안아보고 싶어졌다.
얼굴을
맞대고 내 얼굴의 세 배는 족히 될 것 같은 그 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간을 도우러 오신 그 분의 노고가 감히 기억되어서
일까.
나는
두려움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로사리아 아가씨가 탄 준마를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러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친
말은 그냥 내 품에 안겨 가만히 숨만 쉬고 있을뿐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143-144쪽)
이 책의 저자는 말을
안으면서,
인간을
도우러 오신 예수를 떠올렸다는데,
니체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저자의 생각과 똑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그 무엇?
그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