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진지함을
발견하다
이
책,
조금은
그 가닥을 잡기 어렵다.
진지함,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지한 태도,
그것이
진지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에서는 그 ‘진지함’을
진지하게 설명하느라,
그
가닥을 얼른 잡아채기 어렵다.
진지함은 왜
필요한가?
그래도 그
‘진지함’을
알기 위하여 책을 계속해서 읽은 결과,
소득은
있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기에
그렇다.
<우리는
인생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신앙을 통해,
어떤
사람은 세속적 일을 통해 그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종교든 세속적 추구든 공통점은 진지함에 대한 추구이다.
그리고
그 추구의 세 가지 본질은 관심,
목적,
지속성이다.
관련
상황이나 주변여건이 어떻든 말이다.>
(81쪽)
그러니 진지함은 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진지함을 왜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단서가 잡히자,
비로소
책이 읽히기 시작하였다.
소명과 진지함
이 책에서 저자는 진지함이 발휘되는
원천을 뜻밖의 곳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 원천은 바로
‘소명’이다.
소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굳이
정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소명을 이렇게
규정한다.
“소명은
보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소명 덕분에 사람은 자신의 일에서
자신의 운명을 완수한다.
사람의
운명은 진지하게 사는 것이다.“
(289쪽)
그래서 소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함에 있어 진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이 어느 정도 소명의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진지함의 정도를 판단한다.”
(292쪽)
“관심,
목적,
지속성은
먼저 부름을 받을 필요가 있다.”
(292쪽)
이 말에서 비록 역자가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겠지만,
'부름'(calling)이란
말이 바로 소명을 말한다.
진지함은 이렇게 나타나야
저자는 진지함을 말할 때의 태도로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진지함을 일하는 자세와 결부시킨다.
그가
예를 든 사람은 체슬리 셀렌버거이다.
셀렌버거는
2009년
뉴욕시의 허드슨 강 위에 불시착한 비행기의 기장이다.
새 떼와 비행기가 부딪혀 엔진
하나를 못 쓰게 되어 부득이 불시착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진지하게’
자기의
책임을 다하여 모든 승객을 안전하게 조종했다.
저자는 그런 그의 행위를
‘영웅적’이라
부르지 않는다.
다만
진지하게 행동했다고 평가한다.(295쪽)
“그는
주의력을 집중했고,
목적을
고수했으며,
최후까지
잘 처신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영웅적이지 않았다.
그는
진지했을 뿐이다.”
(296쪽)
체슬리 셀렌버거처럼 진지하게 일해야
한다.
그렇게
진지함을 하는 일에 나타내야 한다.
‘진지함’에 대하여 생각할 좋은
말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진지한 것에 대하여는 진지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진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진지해질 필요가 없다.>
(84쪽)
에라스무스는
<우신
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교회로 가서 설교를 듣지만,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면 졸거나 하품하거나 싫증을 낸다.
그러나
사제가 (실례!
거의
연설자라고 말할 뻔 했다)
실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면(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내 깨어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입을 벌린 채 그 이야기에 집중한다.
" (98쪽)
소명을
발견하고,
일에 진지함을
부여한다.
이
책,
서두에
말한 것처럼,
가닥을
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진지함의 의미와 그 것이 왜 필요한가를 알게 된 다음부터는 이 책이 주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태도가 말 그대로 진지해진 것이다.
해서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소명인지 그냥 경력쌓기용(289쪽)
인지
성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과 하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책,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