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심연 속으로
1.
<데미안>을 속속들이
파헤치다
<데미안은
분명 우리를 곤란에 빠트리기도 하면서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영혼과 접속하면 신기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익숙한
것들이 달리 보이고,
내면의
깊숙한 샘물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7쪽)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을 그렇게
밝히며,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면서 자기의 길을 찾아 나서기를’(7-8쪽)
권하고
있다.
그런
방법으로 저자는 익숙한 <데미안>을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살펴본다.
실상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떠오르던 것들,
이것이던가
저것이던가 궁리는 하면서도 정확하게 짚어보지 못한 것들이 있어 아쉬웠던 기억들을 가지고 고전을 대하고 있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입장이 아니기에 그랬다.
헤세의
<데미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다.
<데미안>을
읽었으니 다 이해되고,
그
속에 있는 생각들조차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정도는 있는데,
막상
이 책을 열어 읽어보니,
그것
조차도 오해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자가 드러내 보여주는 것들에 비하여 나의 인식은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도 어찌보면 책읽어 누릴 수 있는 소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데미안>
속으로
한걸음 더 딛게 만들어준다.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이해,
그게
평소에 <데미안>을
읽었던 모습이라면 이 책은 그러한 경지에서 이끌어내 저 심연,
<데미안>의
깊숙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는 책이다.
저자는 분야별로
<데미안>을
속속들이 파헤치는데,
그
잣대가 다음과 같은 8가지이다.
1.
두
세계,
가족에
벗어나다/돌아가다
2.
카인,
앎의
강자가 되다
3.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종교의
이유를 묻다
4.
베아트리체,
사랑을
주다
5.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자기가
되기 위해서
6.
야곱의
싸움,
행복을
성취하다
7.
에바
부인,
관계의
의미를 알려주다
8.
종말의
시작,
죽음으로
다시 살다
2.
그래서 더 깊은 곳으로
그런데 저자는 비단
<데미안>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데미안>을
분석하기 위해 동원한 다른 자료들은 또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 자료들을 통해서,
일단은
<데미안>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인생 자체를 이해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이 책이 제목에서 밝힌 바와
같이 책의 주 대상이 청소년인만큼,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으나,
그런
것이 반드시 청소년에게만 한정시킬 이유는 없다.
성인들도
얼마든지 이 책을 통하여 그런 인생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일례로,
소크라테스가
말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한번 들어보자.
풀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사랑론을 들은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들은 사랑의 얘기를 펼쳐놓습니다.
그에게
사랑이란 무엇을 향한 사랑이고,
결핍된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한 사람입니다.
완전히
갖춘 자는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체와 영혼은 항상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사랑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147쪽)
또한 청소년들을 위한 도구로는 각
장마다 <생각하고
같이 이야기해 봅시다>와
<더
알아봅시다>라는
항목을 마련하여,
혼자서만
읽는데 그치지 않고,
그룹
토론등을 통하여 더 깊은 생각,
그리고
더 넓은 생각으로 유도할 수 있게끔 하고 있으니,
그
활용의 폭이 다른 책보다 더 넓다 할 것이다.
3.
사족
-
아쉬운
점
-
책의
판형이 청소년용으로는 너무 작다
요즈음
책의 추세,
그리고
청소년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판형을 조금 더 키웠으면 좋았을 것이다.
-
인용된
자료들에 대한 불친절한 안내
인용된
자료들이 <데미안>을
비롯하여 많이 있는데,
대부분
책 제목만 밝혔을 뿐이다.
출판사
이름과 쪽 수 정도는 밝혀 더 많은 부분을 참고하도록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
한자
오기도 보인다.
예컨대,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절대적인 선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성을
존재의 일무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양가(量價)적
세계관 (선과
악의 양쪽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다.>
(273쪽)에서
‘양가(量價)적
세계관’은
‘양가(兩價)적
세계관’의
오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