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신 그리고 유신 - 야수의 연대기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12월
평점 :
절판
유신 그리고 유신
이 책은?
유신, 우리 역사상 경험해본 사건이다. 10월 유신, 박정희의 작품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의 10월 유신의 과정을 살피기 위해 그전 역사를 파헤친다.
그 시원을 살펴보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시작은 무려 고려 시대로 거슬러간다. 고려와 몽고가 합작으로 작전을 개시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 사건.
<유신의 사건들>이란 항목에 연대표를 적어 놓았는데, 그 시작은 <1274년 여몽연합군 1차 일본 침공>이다.
왜 저자는 그 사건을 유신의 시작으로 보았을까?
바로 이 말 한마디 때문이다.
일본측의 일이다.
여몽 연합군 1차 원정에서 원정군의 함대를 쓸어버린 태풍은 7년후 2차 원정에서도 기적처럼 나타나 연합군을 쓸어버렸다. ........
일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기적이요, 실로 기막힌 우연이었다.
...... 결과적으로 일본인에게 선사한 관념은 바로 안과 밖을 나누고 안과 우리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안을 공격하는 건 사악한 행위이며, 이는 결국 하늘의 응징을 받을 것이다. (18쪽)
일본의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신화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도출된 관념에 기반한 역사적 동인을 유신으로 정의하고, 유신을 추적한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한국도 일본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유신 그 자체다. 나는 유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다룰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신은 사건이 아니다. 1868년의 일본 메이지 유신도 아니고, 1972년 남한에서 일어난 10월 유신도 아니다. 이 둘은 사건으로서의 유신이며, 사건의 명칭일 뿐이다. 근본적인 유신은 현실의 사건들을 만들어낸 상상력이다. 상상의 구체적 내용은 관념과 정념이다. 관념은 믿음이다. 유신의 믿음은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 남을 파괴해도 된다는 신앙이다. 정념은 욕망이다. 유신의 욕망은 스스로 아름다워지기 위해 죽어도 되는 자기파괴의 충동이다. 유신은 관념과 정념이 결합해 낭만의 들숨과 비극의 날숨을 얻은 인격적 생물이다. 우리는 유신의 탄생과 성장, 죽음 그리고 부활의 대서사시를 살펴볼 것이다. 유신은 일본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후 한국에서 완성되었다가 소멸했다. 유신은 낭만과 비극의 150년이다.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살갗에 화상처럼 새겨진 강렬한 흔적이다. (28-29쪽)
그렇게 시작한 사건 기록은 일본의 역사를 훑어가면서 유신과 관련된, 유신의 조짐이 되는 사건들을 기록해 나간다.
일본의 유신은 우리나라로 옮겨붙게 되는데, 그 주도적 인물이 바로 박정희다.
유신의 인물 박정희
그래서 박정희 개인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이윽고 그가 10월 유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저자는 박정희를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나는 박정희를 가치판단으로 평가할 생각이 없다. ..... 어디까지나 박정희를 이해하고자 할 생각이다. (248쪽)
그런 전제하에 저자가 보여주는 박정희의 모습 중 몇 가지 옮겨본다.
박정희의 애국심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다르다.
첫째는 민생이요, 둘째는 결과주의다.
민생이라는 결과를 위해서는 결국 어떠한 방식도 정당화된다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박정희는 그래서 민족중흥, 즉 구체적으로는 한국인이 가난을 벗어던지고 잘 살게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다. (281쪽)
특히 동학혁명과 관련해서 박정희는 동학이 조선의 구체제를 부정하는 평등운동이었기에 경의를 바쳤다. (284쪽)
또 하나의 인물 김재규
박정희가 그런 나름의 사명감으로 유신 대열에 뛰어들었다면, 그 대척점에 또 하나의 인물 김재규가 있다.
저자는 김재규가 현장에서 박정희의 머리에 총알을 쏜 것을 이렇게 해석한다.
마침내 김재규는 박정희의 머리에 결정적인 총탄을 박아넣었다.
이 행위의 본질은 처형이 아니라, 가이샤쿠였다. (336쪽)
가이샤쿠란 일본에서 할복자살한 사람의 목을 잘라 죽음의 의식을 끝내는 사무라이의 관습을 말한다.
그래서 김재규는 충(忠)을 저버리기는커녕 완성했다고 저자는 평한다.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는?
김재규가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멀리 엇나간 발언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에서 국민이 전두환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 요인에 김재규의 총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고 한국인들이 과거를 침착하게 복기할 수 있게 된 현재 김재규가 재평가의 대상이 된 일은 당연하다. 이 책을 쓰는 지금, 김재규는 반역자로도 불리지만 동시에 의사(義士)로도 불린다. 그러나 나는 확언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지사이며, 최후의 유신 지사다. (341쪽)
이런 것 알게 된다.
우리 역사를 읽으면서, 그간 궁금한 게 많았었다. 그런 사항 누가 똑바로 말해주질 않아서 안타까웠는데, 뜻밖에 이 책에서 그중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전까지 미국은 일본의 기존 권력구조를 해체해 공백 상태로 만든 다음 미국의 사상과 취향에 맞게 일본 정치를 재창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기득권을 되살려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련과 벌이는 냉전의 북방한계선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기 때문이다, (280쪽)
박정희와 이승만의 관계는?
한국의 보수들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대한민국의 국부로 모시는데, 과연 그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 이승만이 살아 있을 때에 박정희가 권세를 잡았는데, 그 둘 사이는?
박정희가 같은 보수라며 어떤 호의를 베풀었을까?
보수들은 이승만은 한국을 세웠고 박정희는 발전시켰다는 창세신화 속에서 산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승만을 혐오했다. 그를 ‘이승만 노인’이라고 낮춰 부를 정도였다. 유배지인 하와이에서 쓸쓸한 망명 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박정희가 자신을 귀국시켜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번번이 귀국을 거절당한 이승만은 충격을 받아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306쪽)
박정희가 의회정치를 탄압한 이유?
박정희의 역사 인식 속에는 조선이 붕당정치의 폐해로 망했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는 의회정치를 그가 혐오한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의회를 탄압했으며 본인이 창당한 민주공화당마저 억눌렀다. (301쪽)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차지철)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주신 데 대해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339쪽)
- 박선호의 최후 진술 중.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290쪽)
- 일본의 오노 반보쿠 (大野伴睦, 1890-1964), 자민당 부총재
자존심이 상하려면 먼저 자존심이 강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건 훼손되지도 않는다. (285쪽)
다시, 이 책은?
일본에서의 유신과 우리나라의 유신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건 유신을 일으킨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고, 유신이 있기까지의 두 나라에서 역사가 다르게 흘러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유신은 다분히 박정희 개인에 의존한 측면이 있다. 해서 그가 죽음으로 유신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우리나라의 유신이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적인 당위 위에 서있었더라면, 김재규도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전두환도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이 드는 역사, 유신에 대해, 모처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시대를 살펴보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니, 이 책 가치가 있다. 귀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