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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괴담 - 오류와 왜곡에 맞서는 박종인 기자의 역사 전쟁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2년 10월
평점 :
광화문 괴담
이 책을 읽으니, 유하의 시 <오징어>가 떠오른다.
그 시 전문을 읽어보자.
오징어/유하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우리 주변에 돌아다니는 괴담들, 그런 괴담에 귀기울이고 설사 그런 괴담을 믿는다 할지라도 뭐 죽음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그런 괴담이 나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고, 또 그 귀를 통해 입으로 전파되고 한다면,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의심하라는 시구 새겨야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되어버린 괴담들이 많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이 책은 바로 그런 내용들을 담아놓았다.
(모두 16개 항목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베트남의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읽었다는 괴담(?)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읽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출처를 추적하고, 그 그 출처들이 밝히고 있는 근거가 과연 사실에 입각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9장. 베트남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읽었다고? - 정약용을 둘러싼 조작된 괴담 대통령의 『목민심서』 이야기|호찌민 애독설의 시작과 유포|박헌영이 『목민심서』를 줬다고?|정약용 사후 100년 만에 출판된 『목민심서』|베트남에 없는 『목민심서』|거짓말과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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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출저를 살펴보자. 저자가 파악한 호찌민 『목민심서』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황인경, 『소설 목민심서』 1992년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992년
고은, 경향신문 인터뷰 1994년
박석무, 다산연구소 2004년
그렇게 시작된 괴담은 널리 퍼지고 있는데,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데에서 시작한 괴담은 ‘애독설’에서 ‘필독서’로, 다시 ‘필독서’에서 ‘기일에 제사 지냄’으로 살이 붙고 뼈가 자라나는 전형적인 괴담 전승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이런 곁가지들도 풍성하게 자라난다.
안재성이 쓴 『박헌영 평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1929년에 박헌영이 입학한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그는 호찌민을 만난다.
그 둘은 각별하게 친하게 지냈는데, 그때 박헌영이 호찌민에세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안재성은 더 나간다.
그때 박헌영이 준 『목민심서』가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78쪽)‘
그럼 그런 사실(?)이 과연 사실일까?
박헌영이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는 1929년에 호찌민은 모스크바에 있지 않고 베트남의 정글에 있었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에 체류한 기간이 겹치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베트남에 주재하는 기자나 주재원들이 본사로부터 호찌만 박물관에 『목민심서』가 보관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지시가 빗발친다는 해프닝도 발생한다. 결과는? 호찌민 박물관에 『목민심서』는 없다!
참고로, 현재 판매중인 『소설 목민심서』의 머리말에는 예전에 실었던 호찌민 관련내용은 빠졌다고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 머릿속에 혹시라도 남아있는 그 괴담 역시 삭제하기로 하자.
정조가 조선 학문 부흥을 이끈 왕이었다고?
12장. 정조가 조선 학문 부흥을 이끈 왕이었다고? - 지식독재의 정점, 정조 국왕 정조가 배운 청나라 ‘질서’|변혁을 향한 마지막 비상구|불발된 박제가 보고서 - 교류와 개방|학문 탄압의 신호탄 병오소회|짜고 친 흔적 - 김이소와 심풍지|학문의 종언, 문체반정|백탑파의 우정 그리고 날벼락|가속화된 학문 탄압|백탑파의 몰락, 학문의 종언|학문의 몰락, 국가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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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행한 시대 역행의 정책들, 저자가 찾아 놓았다.
그런 것들 일일이 옮기지 못한다. 관심있는 독자들, 이 책 세세하게 읽어볼 일이다.
실학이 조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13장. 실학이 조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 책 한 권 출판 못한 실학자들: 정약용과 서유구의 경우 파괴돼야 할 신화, ‘실학’|관료에서 유배까지, 다산과 풍석|유배지에서 써내려간 두 변혁론|당쟁과 박해, 눈처럼 사라진 천연두 백신|다 죽고 사라진 뒤에야|식민시대에 부활한 ‘실학’|“우리들은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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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궁금했었다. 조선 말기 실학자들의 사상은 조선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대단한 변화는 없었을지라도 어떤 변화가 실학 덕분에 생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와 돌아보니, 당시 실학자들의 생각 ?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 그들의 저서도 많고 - 이 책으로 나오고 해서 마치 당시에도 실학사상이 주류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다 싶지만, 그건 지금 생각이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그 당시에 만든 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실학자라고 부르는 그 선비들 누구도 실학자라 자칭하고 자기네 학문을 실학이라고 선언한 적이 없다. (239쪽)
그래서 그들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당연히 제로다. 그들이 생각했던 개혁안은 그들의 책속에서만 존재했고, 그나마 그런 책들도 그들의 생전에 출판되거나 대중에게 판매되지 못했다. (240쪽)
안타까운 일이다.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정조가 신하들로부터 개혁안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진부한 의견이라고 하도 타박을 하자 부사직 윤승렬이 ‘진부한 말 중에 묘한 이치가 있는 법’이라며 잘 들어보라고 권했다. (221쪽)
박지원이 아들 종채에게 준 글이다.
因循姑息 苟且彌縫 (인순고식 구차미봉)
인습을 못 벗어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땜질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이렇게 말한다.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 못 된다,” (235쪽)
다시, 이 책은?
개개의 괴담에 대해 저자가 파고들어가 그 실체를 분명히 해 놓은 것, 경외의 마음으로 읽었다. 지금껏 그런 것에 대하여 의심은 했으나, 그냥 넘어간 것들이 태반이라서 그 경외의 마음은 더 크다.
한 수 배웠다. 내가 그릇 알고 있었던 것들, 많이 고쳤다.
더하여, 그런 괴담에 대처하는 저자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게 괴담이라고 알게 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어느 것 하나 들으면 그저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과연 그러한가 살펴보고, 점검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