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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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노 쇼고를 떠올리면 역시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와 [밀실살인게임] 시리즈가 유명한데 난 [벚꽃~]을 읽고 조금 내 취향이 아니라고 느껴서 아직까지도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를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생각해보면 [밀실~]을 제외한 책들은 제법 여러 권 읽었는데 내가 읽은 책은 -이번 [D의 살인사건~]을 포함해서- 단편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아무래도 한 권의 책에서 여러 번의 반전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은 우타노 쇼고가 존경하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오마쥬해서, 현대에 란포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의 책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으로 책을 쓴 것 같다. 스마트폰과 SNS는 물론 증강현실까지 알차게 녹여내고 있는데 사실 스마트폰은 은근히 추리소설에서 -특히 범인의 입장에서- 여러 모로 까다로운 존재인데 우타노 쇼고는 실로 영리하게 에도가와 란포의 고전작품 속에 스마트폰과 같은 현실의 문물(?)들을 멋들어지게 접목시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나는 란포의 작품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어서,,ㅠ_ㅠ

 

그렇다고는 해도 책 소개나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란포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도 전혀 지장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단편의 앞부분에 짧게 오마쥬한 작품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인상 깊었던 몇 편만 간단히 감상을 적어보자면, 란포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는 나도 대략의 내용을 알 정도로 유명한 "인간 의자"를 모티브로 한 "의자? 인간!"은 결말이 너무 예상이 가능해서 조금 아쉬웠다. 연극 무대로 배경을 옮긴 "붉은 방은 얼마나 바뀌었는가?"는 내가 워낙 연극을 좋아하고 -결말은 다르지만- 실제로 이런 스타일의 연극을 본 적이 있어서 굉장히 몰입하며 즐겁게 읽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오세이 등장」을 읽은 남자"인데. 내용은 뻔한데 분위기 조성을 잘 하고 있고 심각한 상황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웃음을 유발하는 이야기라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스마트폰의 역할이 가장 도드라진 단편이기도 해서 인상 깊었다.

 

400페이지 정도의 볼륨에 일곱 편의 단편을 담고 있어 한 편의 분량이 많이 할애되지 않아 인물들의 개성이 조금 덜 발휘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기본적인 인물의 설정을 기존 작품에서 따왔기 때문에 -혹은 내가 모티브가 된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읽어서 더욱 그렇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캐릭터의 형성보다는 기존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캐릭터를 좀 더 멋지게 현대에 정착시킬 수 있는 배경[무대]에 더 집중하지 않았나 싶다. 언급된 란포의 작품들을 일정 수준 이상 읽었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캐릭터라는 플러스 알파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은 조금 남지만, 란포의 책을 전혀 읽지 않은 나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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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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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엠브리오 기담] 이후 무려 5년만에 야마시로 아사코의 책이 -우여곡절 끝에(?)- 출간되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야마시로 아사코는 '오쓰이치'의 다른 필명으로 호러, 기담 등의 이야기를 쓴다. 그렇지만 -우연히 앞선 리뷰에서도 언급했듯이- 호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에 [엠브리오 기담]은 다소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호러적인 느낌을 가진 미스터리의 색채도 있고 무엇보다 제목이 묘하게 매력적이라서 꽤 빠르게 읽게 되었다.

 

단편집인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은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볼륨에도 무려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출판사의 책소개를 빌리자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인 공포와 슬픔을 '상실'과 '재생'이라는 주제에서 바라본 소설"이라고 한다. 실제로 여덟 편의 이야기는 그 분위기에는 차이가 있을 지라도 결을 같이 한다고 해야할까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있다. 상당히 잔혹한 이야기들이 있음 불구하고 결국은 한 줄기 희망이라도 비추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소설들이다. 흔히 오쓰이치가 아주 '다크'한 소설과 이와 상반된 '퓨어'한 작품들을 썼는데 이 책은 다크에 물을 조금 타고, 퓨어에 물을 조금 타서 섞었는데 완전히 섞이지는 않은 채 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매우 다크하지도 퓨어하지도 않지만, 때로는 잔혹하고 섬뜩하지만 그래도 묘하게 잔잔하고 따뜻하다.

 

 

각각의 이야기는 호러 소설답게 기묘한 설정이 있다. 예를 들면 평온해야 할 나의 집에 낯선 유령(?)이 계속 나타난다든지, 내가 열 달을 품고 낳은 소중한 내 딸이 내가 과거에 따돌렸던 소녀와 그 모습과 행동이 너무 똑같다든지, 죽은 내 아들의 목소리가 건전지도 들어있지 않은 무전기에서 나온다든지,, 등장인물들은 '내가 어딘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머리가 정상이었다면 이러한 일들이 내게 오지 않았겠지'라는 식으로 기묘한 현상을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기묘한 현상은 무언가를 '상실'한 이들에게 하나의 위로가 된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기에 만날 수 있었던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호러라고는 하지만 그 기묘한 현상이 결국 치유가 되는 이야기. 내가 생각한 '야마시로 아사코' 작품의 느낌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오쓰이치'의 작품과 비슷한 이야기. 짧은 분량이 아쉽긴 하지만 오랜만에 오쓰이치의 매력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작품이었다.

 

 

덧붙임. 이 책에 실린 단편 '무전기'는 작년에 출간된 앤솔로지 -라고는 해도 결국은 한 작가의 작품인- [메리 수를 죽이고]에 실린 단편 '트랜시버'와 같은 작품이다.

덧붙임2.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보면 내용과 참 잘 어우러지는 느낌있는 표지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일본의 표지는 어땠을까,,하고 검색해봤는데 '읭? 이게 진짜 리얼 동일한 책의 표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국내 책이 표지를 예쁘게 잘 만든다고 다시 한 번 감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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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웃는 순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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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말이 필요없는 믿고 읽는 작가 찬호께이! 좀 다작을 하고, 우리 나라에도 팍팍 출간되고 그러면 참 좋으련만 너무 드문드문 나오는 것만이 유일한 불만인 이 작가의 책은 여태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호러라니,, 호러라니,,,,,,(개인적인 취향으로 호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일부 호러 소설이 판은 크게 조성해놓고호러니까 괴이한 현상으로 다 설명됨!! 하고 맥락없이 마무리 되는 것에 실망해서이다,,) 그,, 그래도 찬호께이니까 읽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곧 밤 10시에 이 책을 손에 잡은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만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만 읽고 자야지!'를 한 다섯 번쯤 반복한 끝에 1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 책장까지 넘기고 나서,,

 

이야기는 홍콩 문화대학에 갓 입학한 평범한 대학생인 주인공 '아화'의 발이 여러 수난을 겪는 일로 시작한다. 시트콤에서나 볼 법한 황당+유쾌+불유쾌가 뒤범벅된 상황들을 거쳐 여러 개성 강한 신입생들과 친해진 아화. 그리고 그런 아화와 친구들이 배정받은 기숙사는 '7대 불가사의' 괴담이 있는 '노퍽관'이다. 기숙사에서 보내는 첫 날 흥미로운 괴담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실제 사건이 있었다는 지하실에서 '초혼 의식'을 벌이게 되고 점차 그들에게는 이상한 일이 생긴다. 공포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한 명씩 사라지게 되고 아화는 자신과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는데...

 

줄거리만 읽으면 정말 흔한 호러 소설 혹은 호러 영화의 줄거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다. 또 어떤 독특한 초혼 의식일까 궁금했는데 이 역시 소설이나 만화에서 많이 봤던, 네 귀퉁이에 사람들이 각각 서서 앞으로 한 칸씩 가며 앞 사람을 두드리고 두드려진 사람은 또 앞으로 가서 앞 사람을 두드리다보면 빈 공간이 생기는데 그 자리는 귀신이 대신하게 된다!는 익숙한 의식을 약간 변형한 형태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의 매력을 중심으로 한 호러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저마다 개성이 강하고 서로 소위 케미가 잘 맞아 조합에 따라 색다른 재미가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호러 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이기도 하다. 각각의 장이 시작할 때마다 7대 불가사의 괴담을 들려주고 그 장에서 해당 불가사의와 관련 있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호러소설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여러 가지 복선을 마지막에 하나도 남김 없이 회수하는 것이나 아무리 호러적인 요소라고 해도 단순히 '호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설명이 되는 것이 추리소설로서의 매력까지 확실히 더해주고 있다. 여기에 더불어 호러 전문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분위기 조성을 잘 하고 있어서 1/3 조금 못 미친 부분 -이 부분은 상당히 긴장하며 읽는 부분이다- 을 읽고 있다 '드드드드드득' 하고 울린 스마트폰에 놀라 한동안 누워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다시 읽었을 정도이다.

 

아무리 아껴 읽고 싶어서 그럴 수 없이 책이 눈 앞에 있으면 읽을 수밖에 없고 일단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에는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찬호께이의 책 [염소가 웃는 순간]. 이 책 역시 내 기억 속에 '역시 찬호께이!'라는 감상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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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우는 섬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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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우 작가님이 본격 미스터리라니! 약간 의외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민담으로부터 시작하는 설정 자체도 흥미롭고, 그 민담도 처음 들어보지만 잔인한 면과 더불어 궁금증까지 유발하고 있는 데다가 폐쇄적인 섬에서만 민담이 다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가지는 의미까지 상당히 여러 가지로 읽기 전부터 관심이 가던 책이었다.

배도 간신히 뜰 정도로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좋은 대나무가 자라는 섬 - 호죽도'의 연수원에 여덟 명의 사람들이 초대받아서 오게 된다. 첫 날은 맛있는 음식과 술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다음 날, 불가능한 형태의 한 구의 시체와 함께 폐쇄된 섬은 공포의 무대로 바뀌게 된다. '누가, 왜, 어떻게'를 모두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의 이면에는 40년 전 이 섬에서 발생했던 살인사건이 있고, 그 사건과 이번 살인사건을 연결하는 불길한 민담이 있다. 과연 누가, 어떻게, 왜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일까?

소설은 처음 어느 블로그의 글로 시작하고 있는데, '바늘 상자 속에 넣어둔 눈알'이라는 괴이한 민담에 대한 글이다. 그 글이 호죽도라는 섬에서만 조금 다르게 전승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 섬에서는 눈알 대신 '혀'가 등장한다고 한다. 실제로 섬에서 40년 전에 발생했던 사건에는 왜 이 섬에서만 눈알이 혀로 바뀌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담겨 있고, 그 사건이 현재 호죽도의 연수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대나무가 우는 섬]은 분량이 많지 않은데 아무래도 클로즈드서클이기도 하고 군더더기 없는 본격미스터리의 특성상 불필요한 인물의 성격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나 감정의 변화 등을 최대한 간략화하고, 중심이 되는 사건과 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밀폐된 섬이라는 공간과 모든 것이 어긋난 듯 삐그덕대는 호죽도 및 연수원의 정경 및 분위기를 사건과 어우러지게 설명하고 있어 마치 사건 현장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사건의 볼륨은 크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점에서 볼륨이 그렇게 작게만 느껴지지도 않는다.

다만 트릭 부분에서는 좀 아쉬운 점이 있는데, -과거든 현재든- 살인사건의 모습을 떠올려 상상해봐도 그렇게 기괴하거나 어떻게 저렇게 되었지!? 할 만큼 궁금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트릭을 해결했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또 복선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작가님이 구상하신만큼 치밀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는 부분도 조금은 아쉬웠다. 본격 미스터리임에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및 그 결과보다는 나이도 직업도 서로 다른 인물들을 불러모은 이유와 그들에 얽힌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고, 메인 트릭보다는 피리소리에 얽힌 비밀이 더 놀라웠다.

책을 다 읽고난 후 분명 책은 본격 미스터리이지만, 본격 미스터리 외적인 부분에서 더 많은 매력을 가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가 우는 섬]은 여태의 작가님의 책과는 조금 다르면서도 그 결을 함께 한다. 가독성 있고, 책을 읽고난 후 천천히 곱씹어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님의 필력 역시 그대로이다. 거기에 기괴한 민담이 더해져 색다른 매력까지 안겨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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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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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은 사실 높은 곳이 무서워서 나는 게 아니야.

끝에 서 있을 때, 발을 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나는 거야."

 

 

단 '29초'로 모든 것이 바뀐다는 소설 [29초]. 채 1분의 절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바뀌는 것도 흥미진진하지만 무엇보다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 통쾌한 리벤지 스릴러'라는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아서 (+ 역시 믿고 읽는 아르테의 책이라서)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짧게 선 감상을 말하자면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굉장히 속도감이 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금세 다 읽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세라'는 전임강사로의 전환을 꿈꾸고 있지만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대학 내 절대권력자인 '앨런 러브록'이다. 러브록은 인기 교수이자, TV에도 출연하는 스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학부 내 최고 권력자이다. 그리고 그런 그는 보통 사람들은 절대 모르지만,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여성과 단 둘이 있을 때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 '짐승'이기도 하다. 러브록은 세라에게 전임강사의 전환을 미끼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그녀를 음슴하게 괴롭히고 그녀의 현재 자리마저 위태롭게 만든다.

 

"내게 이름 하나를 주십시오. 한 사람의 이름을. 내가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해주지.

당신을 위해서."

 

 

그런 그녀에게 세라와 아무런 연관성도 남기지 않은 채 그를 사라지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독같은 제안이 다가오고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점차 심해지는 러브록의 행태에 그녀는 결국 전화기를 손에 든다. 단 29초의 시간으로 그녀의 인생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

 

정말 소설을 읽는 내내 분통이 터질 정도로 러브록은 끔찍할 만큼 치밀하게 지저분한 남자였다. 그를 단죄하려는 미약한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그러한 시도는 가속도가 추가된 부메랑이 되어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가진 사욕 -혹은 성욕- 에 정상적,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만큼 세라는 당하고 당하고 또 당했다. '통쾌한 리벤지'라는 문구는 더 이상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시선을 조금만 달리 하면 러브록의 성공담을 써내려간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나한테 이만큼 버티고 버텨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당하게 난 안 하겠....ㅠ)

 

29초의 시간으로 그녀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에는 의문이 생긴다. 실제로 조건은 95% 정도는 갖춰져 있었고, 마침 29초가 5% 정도의 힘을 더해서 100%에 도달해 극단적으로 변화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 95%의 조건은 러브록이 만든 것이겠지. 그렇지만 리벤지까지 가는 과정이 너무도 험난해서 읽는 내내 정말 힘겨웠다. 최근은 수면 위로 많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은 -국가를 막론하고- 너무 만연한 문제이지만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도 결국 조용히 덮거나 피해자의 상황만 악화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권력자의 불합리함에 포기하지 않고 맞서는 세라의 모습을 응원하면서도 '29초'라는 선택을 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면 그러한 상황은 이겨낼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씁쓸함도 함께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내용에 약간의 비현실을 가미해서 현실적인 면을 더욱 부각시킨 작가의 스킬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특히 여러 모로 생생한 묘사는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남성 작가가 그려내는 세밀하고 생생한 여성 주인공의 행동 역시 이 책에 매력 한 스푼을 추가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기 전에는 표지의 '29'에 눈이 먼저 가는데,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 표지 속 인물에 눈이 먼저 가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책의 내용이 -모순적이지만 비현실적인 부분까지 포함해서- 너무 현실적이라 그야말로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던 소설 [29초].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답답하고, 과연 이렇게 해서 복수를 할 수는 있는 걸까 걱정도 되지만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속도감 있는 책이었다. 요즘은 그런 책이 많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 앞으로 더 많은 책들이 국내에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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