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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로 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언어는 세탁비누처럼 정화력을 지녀야 한다.
창조의 언어보다는 이 정화의 언어가 더욱 시급해진다.
생활한다는 것은 때를 묻힌다는 이야기이다.
때는 처음 묻을 때만이 눈에 띈다.
오염의 두려움은 내가 오염되어 있다는 이식까지도 오염시키고 만다.
비누는 본연의 빛을 캐내는 연장이다.
비누 거품은 허망하게 꺼지지만, 그 소멸 뒤에는 순백의 빛깔을 다시 찾는 그리움의 발언이 있다.
생각해 보면, 이어령 교수의 글의 백미를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를 설명하는 시대의 지성이라는 말에 대해 실제로 마주한 것도 그리 오래지 않았다. 교수님이 별세하시기 몇 년 전부터 우연히 읽게 된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덕분에 이어령 교수의 책을 맛보게 되었고, 읽는 내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거푸 시리즈로 엮인 책을 읽다 보니 이제는 서재 한 칸에 이어령 교수의 책이 꼽혀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학창 시절 처음 읽었던 국어 교과서의 디지로그 역시 성인이 되어 읽었을 때 그 참맛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저 교과서 속 문제로만 읽었던 글을 아무런 억압(?)과 부담 없이 읽었을 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이어령 교수의 책과 글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글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위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지루하지 않다. 여기서 저기로 엮어가는 것이 퍽 자연스럽기도 하다. 마치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이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연결이 된다. 물론 그런 글을 쓰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싶지만, 덕분에 너무 흥미롭게(마치 소설책처럼) 읽을 수 있었다. 1933년생이셨으니, 80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의 글은 소위 꼰대스럽지 않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오히려 젊은 감성이나 요즘 시대를 아우르는 글도 참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에는 확실히 생각해 볼, 기억해야 할, 정확한 이성적 판단이 담겨있다.
이 책은 이어령 교수의 부인되시는 강인숙 교수와 여러 편집위원들이 지난 3년간 이어령 교수의 글 중 주옥같은 내용들만 추려서 만든 어록집. 즉, 이어령 사전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주제를 이야기해도 다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저작과 강의를 남긴 이어령 교수의 글을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사실 그가 남긴 글을 전부 읽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각 주제에 맞는 글을 모은 어록집 안에서 다시금 마주하는 이어령 교수의 글은 참 다양한 깊이가 있었다. 하나하나 글을 읽을 때마다 그가 왜 시대의 지성이라는 닉네임을 가졌는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모든 창조는 던지는 거야. '돈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하는 건 의미가 없어.
'천금을 줘도 할 수 없습니다'하는 걸 시도해야지.
밑줄을 치고 접어야 할 어록이 참 많다. 책의 반 이상을 옮길 것 같아서 깊이 와닿는 문구만 추려보았는데,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이젠 더 이상 창조적이고 새롭게 생산된 저자의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안이 되는 건 어록집이 또 나올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판형이나 표지 디자인 자체도 글의 깊이만큼 멋지게 나와서 선물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첫 장부터 깊은 지성의 길로 인도한 글 하나를 더 적으며 고마운 마음을 마무리해본다.
실망과 희망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실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었기에 실망이 있는 것.
어린아이들처럼 모래성을 쌓고 허물고, 허물고 쌓는 것이 인간의 생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의 길엔 진행형만이 있을 뿐이지 결론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