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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표백 세대'의 등장.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라고 여긴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며 이렇게 표백된 세대를 가리켜 '표백 세대'라고 일컫는다.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표백>이 말하는 '표백 세대'에 대한 정의다. 태어난 연도로 말하자면 입시난, 취업난 모두 겪은 저주 받은 80년대생, 학번으로 말하자면 수능 난이도의 롤러코스터를 한번씩은 타봤다는 땡으로 시작하는 0x학번, 나이로 말하면 30대 언저리가 되겠다. 사실 이 책이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했을 땐 또 뻔한 세대론에, 위로와 공감을 얻고자 하는 찌질한 인생이 등장하는 소설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었다. 이젠 더이상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진부한 위로나 진정성 없는 공감이 아닌 용기와 자신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은 전자가 아닌 후자를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소설의 엔딩에 도달해서야 말이다.
자살 선언은 사회 변혁 운동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 더 이상 변혁이 없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자살 선언은 이를테면 햅번 스타일이라든가, 로큰롤과 같은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지 주장을 펼치는 표현 방법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기를 의도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목표나 책임감은 없습니다. _ 268쪽
이 소설은 주인공 나와 대학 동기인 휘영, 후배 병권, 그리고 동기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이들 셋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세연의 이야기이다. 공무원 7급 시험에 붙는 것이 목표인 나와, 기자 지망생 휘영,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병권은 이렇다할 꿈 없이, 그저 무사히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세연이라는 여학생을 만나게 되고, 세연과 어울리며 그녀의 독특한 세계관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실족사로 학교 연못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이튿날 이들에게는 세연이 보낸 메일이 도착한다. 암호가 걸려 있는 파일들과 함께.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는 7급 공무원에, 휘영은 주간지 기자가 된다. 꽉 막힌 관료주의와 아이디어를 증오하는 조직 문화에 질려 있던 차에 휘영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이들은 몇 년만에 한 호프집에서 만난다. 이런저련 근황을 주고 받다 휘영은 주인공에게 한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 묻는다. "와이두유리브닷컴 whydoyoulive.com 한번 쳐봐. 세연이가 쓰던 메일 계정으로 이 주소가 왔어" 바로 여기서 이 책의 화두인 표백 세대와 이들의 저항법인 '자살 선언'이 등장한다.
새로운 담론조차 제시 할 수 없는 표백 세대. 산업화와 민주화의 영광을 후광으로 표백 세대를 열심히 노력할줄 모른다고, 너희들은 패배자라고 억압하는 기성세대들에게 이들은 자살 선언으로 대항한다. 혹자는 죽을 용기가 있으며 그 용기로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기성 세대들에 의해 저항 자체가 금지된 이 사회에서 표백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은 자살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무능력함으로 되돌리는 이 사회에서 그저 '살아가는 것'자체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세연의 주도하에 몇 년간 치밀하게 만들어져 온 '와이두유리브닷컴'. 이 사이트는 병권의 자살 선언과 실제 자살 성공으로 수십 만명이 회원으로 가입하며 신흥 종교와 같이 엄청난 규모의 지지자들을 모으게 된다.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_332쪽
만약 이 책이 표백 세대의 자살 선언과 사회적 신드롬으로까지 번질정도로 수많은 청년들의 자살 사건으로 끝이 났다면 난 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직전에 주인공의 제시한 '디스이즈더리즌닷컴 thisisthereason.com 덕분에 난 이 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세연의 자살 선언에 대항해 주인공이 내세우는 논리들. 꼭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에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지금 우리가 별볼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런 것이고, 그 모순을 깨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판단하는 잣대를 바꾸면 된다는 것. 이것이 주인공이 말하는 핵심이었고, 아마도 작가가 소설을 통해 지금의 표백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세연의 자살 선언 논리는 언뜻보면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해주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세연과 주인공이 벌이는 설전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주인공의 편에 서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건 아마도 작가가 일부러 만든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너희들이 가진 패배의식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소소한 것인지를 보라고,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말이다.
이 책은 읽기 시작했으면 꼭 끝까지 읽어야한다. 반만 읽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소설이다. 자살 선언의 끝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다면 아애 시작도 말기를 바란다. 역시 한겨레문학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