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사람은 덕질의 차원도 남다릅니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 설혜심 작가님은 코로나로 재회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로 아예 책 한 권을 출간했어요.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라니 작가의 팬이라면 그냥은 못지나칠 제목이잖아요. 소싯적 해문 빨강책 좀 읽은 독자님들 다들 두근두근 하시죠? 저도 그랬습니다??
1. 난 셜록 홈즈가 아니라굿!
자네는 내가 셜록 홈즈처럼 이번 사건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군!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범인의 인상이나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물론, 도대체 어떻게 수사를 시작해야 할지조차도 모르고 있다네.
_ABC 살인사건, p75, 황금가지
빈민가의 상점 주인이 푸아로에게 도착한 ABC의 편지대로 살해당합니다. 헤이스팅스는 범죄 현장을 막 확인하고 온 푸아로에게 질문해요. "어떻게 생각해요?" 푸아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 범죄를 저지른 자는 중키에 빨강 머리, 왼쪽 눈이 사시인 사내일세. 그는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고 어깨뼈 바로 아래에 사마귀가 있다네."(ABC 살인사건, p74, 황금가지) 헤이스팅스 대위와 마찬가지로 저도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거든요. 장난기 다분한 눈동자를 보고서야, 저는 읽고서야, 푸아로가 뻥을 쳤다는 걸 알았죠. 그리고 내심으로는 생각했답니다. 푸아로가 셜록 홈즈를 꽤 의식하는 것 같잖아?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작가로는 아서 코난 도일의 후발 주자였으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 셜록 홈즈를 다분히 신경썼던 모양입니다. <ABC 살인 사건>에서뿐만 아니라 <침니스의 비밀>, <메소포타미아의 죽음> 등의 작품에서도 꽤 비번히 홈즈가 소환되는데요. 푸아로의 탐정 같지 않은 외모와 성격, 추리 방법이 주요 비교 대상입니다. 푸아로는 작고 통통하고 머리는 벗겨지고 엄청 큰 수염에 과도한 꾸밈새로 좀 우스꽝스럽거든요. 예민까탈지존에 약물중독, 호더인 홈즈와는 많이 다르죠? 셜록 홈즈식 추리법을 대놓고 비웃기도 하는데요. 코난 도일이 이를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했어요.
아참, 코난 도일이 애거서 크리스티를 현실에서 추적한 적이 있다는 거 아세요? 그 유명한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사건 때 심령술에 빠져있던 코난 도일이 애거서의 장갑을 영매에게 주어 애거서와 대화를 하려고 했대요. 애거서가 죽은 줄 안 거지요. 다행히(?) 그는 아무 답변도 들을 수 없었고 며칠후 애거서 크리스티가 발견되며 사건은 일단락이 났다고 합니다. 이런 소소한 곁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어 더 좋은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였어요.
2. 애거서 크리스티는 성공한 부동산 투자가였다!
집 보러 다니는 일은 언제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다.
신이시여, 집을 축복하소서!
_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좀 읽어본 독자는 모두 공감하실 거에요. 그의 작품명에는 유난히 많은 집이 등장한다는걸요. 스타일즈, 리스터데일, 할로, 침니스, 엔드하우스, 그 밖에도 애거서 크리스티가 뽑은 자신의 베스트 작품 중 하나인 <비뚤어진 집>도 빼놓으면 안되겠구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경우 제목에 집이 들어가진 않아도 배경이 되는 곳이 외딴 섬의 호화롭고 폐쇄된 저택이었어요. 등장인물 열 명 중 여덟 명이 저택 안과 마당에서 사망합니다. 한 명만 유일하게 해변에서 사망??
작품 속에서 작가는 사건과 함께 저택의 외관, 내관, 인테리어, 소품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를 읽기 전까지는 솔직히 이런 부분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 책을 읽었어요. 배경은 배경으로 그냥 흘러가게 뒀지 그걸 꼼꼼히 상상하거나 들여다보진 않아서 소품의 다수가 식민지에서 가져온 물품이란 것도 몰랐지 뭔가요.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전 좀 심하게 무심했구나 싶었습니다. 작가가 이렇듯 집에 대해 상세히 묘사할 수 있었던 건 애거서의 가장 큰 취미 중에 하나가 부동산 탐방이었기 때문이래요.
애거서 크리스티는 작가로서는 드물게 부유했는데 이는 인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부동산 사랑이 남달라서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부동산 투기꾼으로 봐도 손색이 없었을 정도라고 표현할까요. 될 성 부른 떡잎이었던 그는 소녀 시절부터 엄마의 식기장을 6층짜리 집으로 개조하는 등의 열의를 보이는데요. 애거서는 성인이 됐을 때 그 시절을 돌이키며 취향이란 건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요. 저도 돈이 되는 이런 취미를 가졌으면 좋았을 뻔 했죠??? 그밖에도 호텔, 기차, 여행, 서핑, 고고학, 자동차까지 좋아하는 게 무궁무진했던 사람으로 모험심이 남다르고 진취적인 성격이었던 듯 해요.
3. 간호사 애거서 ! 약제사 애거서!
난 내 여자가 군복을 입고 해외로 떠나는 걸 본 사람이야. 알겠어?
_<파도를 타고> 중에서
애거서가 1, 2차 세계대전 때 적십자구급간호봉사대에 들어가 간호사 일을 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전 몰랐습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았다면 간호사를 평생 직업으로 삼아야지 생각했을만큼 그 일을 좋아했대요. 과로를 하고 폐병을 앓고 주변의 권유로 조제실로 직무를 옮기게 되었을 때에는 화학, 약물학, 조제학을 공부해 공인약제사시험을 통과하기도 했대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도 두 명의 인물이 약물로 사망하지만 독살로 제일 핫한 작품은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이래요. 전문가가 보기에도 흠잡을데 없었던 소설 속 독극물 사용은 작가가 진짜 전문가이기에 가능했던 거였어요.
애거서의 작품 속에는 전쟁에 참여했던 당시 여성들의 삶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많이 등장해요. 윈스턴 처칠이 여성징집법을 개정하면서 보호 직업군에 속해 있던 남성들_ 성직자, 의사, 교사, 열차기관사, 농부, 채탄 및 조선업 종사자_는 본토에 남구요. 여성들은 병역의 의무를 지러 군대로 떠나게 되요. 병역을 면제 당한 채로 약혼녀를 기다리는 남성의 울분, 열등감, 고통 등을 엿볼 수 있는 대화들과 그 고통을 이후에 어떤 식으로 분풀이 하는지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전쟁으로 바깥 세상을 경험하고 자유를 느꼈던 여성들은 또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복귀한 현실에서의 갑갑증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여성 참정권으로까지 흘러가는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무척 흥미롭지요?
전쟁은 물론 비극이 맞지만요. 어떤 여성들에게 있어 (또 일부 남성들에게도) 전쟁이 자유이자 해방이며 뜻밖의 모험일 수 있다는 관점. 추리소설을 읽으며 역사학자는 이런 부분까지 세세하게 관찰하고 파헤치는구나 엄청 감탄하며 읽은 챕터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를 읽으면서 애거서가 그의 작품만큼이나 미스테리한 인물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남편의 불륜, 이후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 기억상실증, 자서전에서조차 그에 대해 단 한 줄 언급하지 않았던 태도 등도 그렇구요.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반드시 실제하는 대상"(p11)으로 글을 썼음에도 주벼 작가들에게 현실성이 없다고 비난 받은 점도 기이해요. 매번 빈대에 물리며 고생고생 하면서도 열심히 기차여행을 한 점이나 여성해방주의자 같으면서도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한 사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부동산 투자에는 맹목적이었고, 영국을 까면서도 영국우월주의적인 각종의 견지들이 모두 다요. 황금가지 애거스 크리스티 초이스로 그의 작품들을 재독 중인데 이후 읽는 책들이 더 재미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황금가지는 총 79권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완간했구요. 해문출판사도 대략 80여권, 비슷비슷하게 책이 나와있는 것 같아요. 현대의 지나치게 잔혹하고, 특히나 여성에게 가학적인 스릴러에 지친 독자에겐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이 휴식처럼 느껴집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를 읽고 범죄의 여왕과 머리를 맞대보세요!
애거서 크리스티 베스트 10
1.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2. 화요일 클럽의 살인
3. 오리엔트 특급 살인
4.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5. 움직이는 손가락
6. 0시를 향하여
7. 비뚤어진 집
8. 예고 살인
9. 누명
10. 끝없는 밤
휴머니스트 지원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