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안티 투오마이넨 지음, 전행선 옮김 / 리프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1.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남자
“죄송합니다만, 환자분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겁니다.”
_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p15
헐.. 이렇게 잔인할 수가. 의사
선생님, 몽테뉴 환생한 줄 알았잖아요. 독감인 줄 알고 내방한
환자 앞에 두고 너무 거침없는 거 아닙니까?😭 몽테뉴가 그랬다죠. 죽음은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는 언제든 장화를 신고
인생 뜰 준비를 해야한다구요. 야코 사장님도 몽테뉴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상황입니다. 사장님 안에 도사리고 있던 죽음이 실체를 드러내며 몇 주, 어쩌면
며칠 밖에 남지 않은 생의 시간을 알려왔습니다. 췌장암도 아니고 간경변증은 더더욱 아닌데 증상은 비슷한
음독이랍니다. 평소 아내가 챙겨주는 삼시세끼 말고는 먹는 게 없는데 음독이라니요? 장기복용을 한 것 같다니요? 뭐에 중독됐는지 의사도 모른다니요?! 사장님 잘 생각해 봐요. 일본에 송이버섯 수출하면서 독버섯 아무렇게나
씹어먹은 거 아니에요? 사장님, 아무거나 먹으면 어떡해요!!
2. 아무도 믿지 마세요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죽게 되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그건 마치 이 여름이 끝나더라도 다음번 여름은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며,
어떤 이유에선지 그 여름은 지나간 여름보다 훨씬 더 근사하리라 믿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시시각각 짧아지는 지금 이 시간뿐이다.”
_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p96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젊은 주부인 주인공은 자신은 따뜻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는 동안 스포츠카를 타고 파리를 운전해 다닐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을 깨닫는 내용이다. 노래의 주인공도 유럽, 빠른
차, 아름다운 머리 같은 모든 것을 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깨달은 것은 본질적으로 이런 사실이다. 삶은 사라졌고, 꿈은
꿈일 뿐 절대로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자신에게는 지금 그리고 이곳뿐이며, 그조차도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
_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p243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쁘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과 본질적인 면에서 연결된 게 틀림없다.”
_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p307
병원에서 돌아온 야코 사장님, 수사 일지를 작성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는데 죽게 생긴 사람은 할 말도 할 일도 너무너무 많아서요. 노트가 빼곡하게 채워져요. 죽을 날 받아놨어도 나 죽이려는 놈이
누군지 꼬옥 잡아 복수하겠다 이겁니다. 평범하다 못해 약간은 소심하고 솔직히는 많이 주눅든 채로 살아왔던
인생, 이렇게나 적(?)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크림, 소금, 버터, 치즈, 다량의 돼지고기를 기본으로 매끼 칼로리 폭탄의 식단을 대령했던
아내가 1차 용의자입니다. 보디빌더처럼 빼어난 육체의 아내가
알고 보니 열살은 더 어린 납품 담당 직원과 바람을 피우고 있더라구요. 야코 사장님만 죽으면 알량한
재산도 차지하고 어린 애인과 자유 연애도 하고 좋겠지 좋겠어. 이를 아득바득 갈며 야코 사장님이 아내
타이나를 용의주시합니다. 두번째 용의자는 말할 것도 없이 내연남 페트리죠. 누군가를 음독할 깜냥은 없어보이지만 전처에게 재산 다 뺏기고 어머니한테 얹혀사는 처지에 독하게 마음 먹었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세번째 용의자는 하미나 머시룸 컴퍼니 3인방입니다. 야코 사장님의 노르딕 포레스트 델리커데스 주식회사(회사 이름 누가
지은 거에요?😣)의
경쟁사인데 존속살해범에, 전직 양손잡이 타자에, 여자친구
뺏아간 친구 물에 빠트려 죽였을지도 모르는 사이코패스까지. 한 명 한 명이 어디를 어떻게 봐도 정상은
아니니까 의심하겠습니다.
3. 잘 가요, 독한
사람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죽기 전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범인을 밝히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 없다!”
_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
죽을 날 받아놨는데 무서운 게 있을리가요. 전에 없이 아내에게 반항하며
아내의 음식을 거부하구요. 잘생긴 페트리를 뒤쫓아 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합니다. 경쟁사의 공장에 무단침입까지 하는데요. 그곳에 걸린 일본도를 만졌다는
이유로 다툼이 벌어져... 이런.... 살인 사건이 일어나
버리네요? 아니 참, 이건 살인도 아닌 것이 자살사건이라고
해야 할까요? 토미라는 남자가 야코 사장님을 죽이려고 일본도를 들고 뛰다가 본인 머리를 꿰어버려요. 공격을 감행하려던 건 맞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내 범인 찾기도
바쁜 와중에 실종된 토미를 찾겠다며 수사에 돌입한 티카넨 형사를 상대하구요. 야코 사장님을 의심해 쫓아다니는
머시룸 2인방과 번아웃을 주장하며 공장에서 내보내려는 아내까지 피해야 합니다. 오늘내일 하는 중에 직원 산니의 엉덩이는 왜 또 그리 예쁘냐구요. 뜻밖의
경로에 돌입한 야코 사장님의 범인찾기 대장정! 결말을 알려드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출판사에서 쫓아올지
모르니 줄거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하신 독자님은 얼른 서점으로 달려가세요. 고고!!
4. 이런 북유럽 소설 처음 봤어요 ⭐⭐⭐⭐⭐
안티 투오마이넨, 유럽에서 가장 재미있는 작가로 불리우는
이유를 알겠어요. 북유럽 특유의 안개 낀 듯이 꿉꿉하고 텁텁한 우울감 없이 아주 화창하게 재미있는 추리
소설이더라구요. 덤덤하고 담백한 성격으로 국자를 휘두르는 야코 사장님도 취향이구요. 죽음에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다이어트 효과는 그럴 듯 하다와 같이 갖가지 우스개 소리와 철학자의
메모 같은 내용이 어우러져서요. 마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추리 버전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조용하고 점잖게 회사가 하라는대로 아내가 하라는대로 사장이 된 후에는 사업에 크게 욕심내는 법 없이 인생 조용조용하게 살아왔던 남자가요. 죽음을 앞두고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 24시간을 48시간을 72시간을 꽉찬 행동력으로 독파하는 이야기에요. 사장님, 아무거나 먹지 마세요에서 아무거나는 "아무 시간"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닐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해야겠어요. 국내 첫 출간작이었던 이번 작품
뒤로 안티 투오마이넨의 다양한 책들이 소개되기를 바래봅니다.
+ 포레스트북스 지원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