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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평점 :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
브릿마리 여기 있다, p186, 다산책방
밤 12시, 내일의 쾌적한 아침을 위해서라면 취침에 들어야 할 시간이지만 일요일 밤은 왜 이렇게 잠들기가 싫은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한 권 빼들었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 "오베라는 남자"를 쓴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다. HHhH를 읽고 있던 중이었지만 짜증나는 고집쟁이 아저씨의 호통 치는 이야기에 어쩐지 기분이 풀렸던 전전작 오베 때처럼 브릿마리가 울적한 내 기분을 풀어주길 바라며 페이지를 열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 (예순이면 절대 할머니가 아니다. 자녀들이 삼십대인데 그럼 나랑 똑같잖아. 우리 엄마도 아직 할머니는 아냐. 손주도 없는 걸)...... 근데 이 분 왜 이리 비호감이세요? 뭘 믿고 이렇게까지 비호감이신데요? 하는 질문이 저절로 나왔다. 시작부터 완전 뜨악, 아니 브릿마리 이 사람 대체 뭐지?!
브릿마리는 직장을 구하러 고용센터에 간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보고 뜨악했듯이 그녀도 이 고용센터에서 마구 뜨악하기 시작한다. 타인에 대한 편견도 없고 어떤 문제에 참견할 만큼 할 일이 없는 사람도 아닌 브릿이기에 (정말 그럴까?) 처음에는 뜨악함이 생각으로만 끝났지만 곧 고용센터 아가씨를 두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는 절제를 아는 교양인이기에 모든 생각을 다 입으로 풀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태도라는 것이 있잖은가. 플라스틱 컵과 플라스틱 티스푼으로 차를 대접하다니! 하물며 플라스틱 컵에 받침접시도 없어, 내놔요 받침접시! 근무환경이 너무 지저분해, 책상 꼬라지가 이게 뭐야! 세상에 날더러 연필도 아닌 볼펜으로 글을 쓰라고! 연필깎이 내놔 봐요 얼른! 아무리 신식이라지만 젊은 아가씨 머리 꼴이! 우리 남편 사업하는 사람이야! 아가씨한테는 이걸 판단하는 게 능력 밖의 상황일지 몰라도 내 남편은 이런데 아주 빠삭해! 회의 할 시간에 내 일자리나 찾아 내!
물론 브릿은 교양인이므로 이렇게 대놓고 싹퉁머리 없이 말하지는 않았다. 본론만 간단히 옮겨 쓴거다, 본론만. 그리고 오베와 같이 그녀가 막 호통을 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주 정반대로 조곤조곤 배려하는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지적과 잔소리와 요청을 하므로 저 느낌표는 생략되어야 맞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데 그렇다고 말의 내용이 어딜 가냔 말이지. 손님이 내 앞에서 저런 말을 쏟아 내며 로드킬 당한 짐승의 사체라도 보듯이 나나 내가 건낸 커피를 보고 야만인 취급을 해댄다면, 오 마이 갓, 쓰고 보니 더 싫다. 그 고용센터 아가씨(실제로는 이미 애엄마) 모르긴 해도 브릿이 가고 나서 장난 아니게 투덜거렸을 거다. 뭐 이런 진상이 다 있지 하고. 브릿이 우리 엄마였다면 난 정말 천리길보다 더 멀리 이사가서 그녀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설추석 때도 갖은 핑계를 다 대어가며 집에 가는 걸 피했을지 모른다. 우리 집엔 커트러리 서랍이라는 게 없지만 포크와 나이프와 스푼이 순서대로 들어가 있지 않은 것조차 견딜 수 없어 하는 엄마를 나 또한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고작 2장까지 밖에 가지 못한 상태였지만 캐릭터에 살짝 피곤함을 느낀다. 근데 또 욕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고, 오베 때도 못지 않았고, 오베든 브릿이든 내 주변엔 이런 사람이 없어 감사할 따름이고, 무엇보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이므로 나는 또 다음 편을 넘겨든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야 살짝 울컥하고 마는 것이다. (오베 때랑 패턴이 사~알~짝 비슷했다.)
"내가 일을 하려는 이유는 악취로 이웃 주민들을 괴롭히는 건 본받을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무라도 알아주었으면 하거든요."
브릿마리 여기 있다, p 39, 다산책방
가족이 없는 한 여성이 자신의 식사거리를 앞에 두고 독거사 한 것을 이웃들의 악취 신고로 발견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부터 생성된 듯한 그녀의 이 두려움을 앞에 두고서는 갑자기 그녀를 욕하기가 좀 어색해진 것이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사연들. 연년생의 언니, 부모님, 자동차 사고, 배신으로 끝난 첫 번째 연애와 지금의 남편, 의붓자녀들. 그리고 언제나 홀로 방치돼 남겨진 그녀의 집과 부엌, 팩신, 과탄산소다, 청소, 창과 발코니. 주인이 버리고 간 화분들. 그녀를 필요로 하지도 그녀의 존재를 감사해 하지도 않았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성장하고 나이 먹고 늙어야 했던 브릿. 그런 일상조차 사랑하고 감사하며 안정감을 느꼈던 브릿. 남편이 바람만 피우지 않았어도 아니 내연녀가 자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려오지만 않았어도 끝끝내 그 외도를 외면하며 40년 가까이 거주한 자신의 집이라는 안전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사람. 그리고 그 공간을 벗어난 지금은 홀로 썩는 시체로 남아 타인의 민폐가 될 것을 결벽적으로 두려워하는 동시에 살아 있는 현재에도 타인의 시선 앞에 전전긍긍하며 어두운 밤 사무실 불을 밝히지도 못하는 여자. 진상 오브 진상이었던 사람이 내 이해의 범주 안으로 스윽 들어올 때면 느끼는 어떤 류의 친밀감이 생성됐다. 그리고 소설 속 브릿 또한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류의 사람들 사이로 풍덩 빠지게 된다. 바로 보르그, 스웨덴 슬럼가의 사람들이다. 그녀처럼 커트러리 서랍을 포크와 나이프와 스푼 순으로 정리하며 결코 자신의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는 새미와 날아오는 축구공 앞에 기꺼이 얼굴을 가져다 댈 수 있는 열정 가득한 소녀 베가, 이미 생산 중단된 브릿의 애정하는 세제 팩신을 박스채로 구해줄 수 있는 꼬마 사업가 오마르, 쓰레기 속에서도 꽃을 찾아내는 고용센터 아가씨, 전 국가대표축구선수 뱅크, 타인의 눈높이 보다 1미터나 낮은 자리에 보르그의 지도를 걸어주는 브릿의 생애 첫 친구 미지의 인물(이 인물의 이름이 무엇일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 보기 바란다), 맨유를 응원하는 남편 켄트, 응원하는 팀은 없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스벤, 보르그의 희망 어린이 축구단, 그리고 리버풀.
보르그에 들어 서며 평생 선택권이란 없을 것 같던 그녀의 앞으로 이제 세 갈래 길이 놓여졌다. 언니와 함께 가고 싶었던 프랑스,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 켄트, 그리고 새로운 두근거림 스벤. 파란문이 달린 자동차, 안정된 일상, 자주색 튤립을 꽂을 수 있는 꽃병이라는 그녀 손에 들린 키 세 가지. 따뜻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일상들 속 브릿의 성장이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브릿이 노크한 그 문을 흐뭇하게 떠올리며 응원해 본다. 그녀의 말처럼, 어디에 있든, 그녀 자신이 선 그 자리를 잊지 말기를, 그래서 그녀의 남은 인생이 조금은 수월하기를.
"화분에는 흙만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밑에서 꽃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것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물을 주어야 한다. "
브릿마리 여기 있다, p69, 다산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