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니스트 - 모험하는 식물학자들
마르 장송.샤를로트 포브 지음, 박태신 옮김, 정수영 감수 / 가지출판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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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에세이는 믿고 봅니다. 정말 넘 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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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네시
수잔나 클라크 지음, 김해온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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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이건 찐 취향❤ 번역 출간되는 SF 치고 재미없는 책을 찾기가 더 힘들다지만 <피라네시>는 취향의 정중앙을 완벽하게 관통했어요. 배경이 집이라는데서부터 집순이 독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긴 했었습니다.

아 물론 그 집은 천장으로 구름이 흘러 들어오고, 바닥은 조수 간만의 차로 밀려 들어오고 나가는 바닷물에 잠겨있으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홀마다 미노타우루스 같은 신화 속 조각상들이 우뚝 서있고, 알바트로스, 참새, 갈매기, 까마귀 등의 새들이 집안에 떼로 둥지를 틀고 있다는 특이점이 있긴 하지만요. 아참, 집안 곳곳 편안한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있는 열세 구의 시체도 빼먹으면 안되요. 어쨌든 집입니다, 그것도 고대의 건물들이 무한히 붙어 있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커다란 집이요!


주인공인 "나"는 매일 같이 집을 탐험하고 연구하는 모험가이자 과학자에요. "집 = 세상"인 세계를 탐구하는 그는 얼핏 보면 무인도에 표류하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집은 집이되 전기도 수도도 가스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홍합을 캐고 물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고 해초를 모아 겨울을 날 뗄감을 마련하고 말린 물고기 껍질로 안경테를 고치는 등 생존을 위해 힘쓰거든요. 무엇보다 그곳엔 "나"와 "나머지 사람"이라 불리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요.


나머지 사람도 "나"처럼 과학자인데 "나"와는 달리 떼깔이 고운 옷을 입고 항상 깔끔한 냄새를 풍겨요. 그는 세상이 잃어버린 고대의 힘을 되찾기 위해 연구 중인데요.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 집에 살게 되었는지 언제 만남을 시작했는지 어째서 단 둘 뿐인지 이 집은 도대체 어디인지가 궁금한데 초반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에 궁리조차 할 수 없어요. "나"는 집에 대해서는 궁금해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는 영 호기심이 없거든요. 아마도 "나"라는 인물이 가진 자기 확신이 엄청나게 커서인 것 같아요. "나"는 집의 자식이고 집이 주는 메세지가 있는 이상 모든 것이 괜찮고 행복하다는거요.


종종 어째서 집이 "나"에겐 제공하지 않는 것을 나머지 사람에게는 제공을 할까 의문을 느낄 때가 있기는 해요.

이를테면 운동화, 옷(막 세탁한 것처럼 깨끗한!), 새노트, 필기구, 분필, 침낭 같은 것들을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구하는 걸까요? "나"는 나머지 사람이 주는 것 외에는 모조리 자급자족 중이라 옷은 낡아빠지고 신발은 다 닳아 맨발로 살고 있는데 말예요. 그러나 이런 의문조차 집을 전능한 존재로 믿고 있는 "나"에겐 오래 머무르지 않아요.

집이 생존력이 없는 나머지 사람을 배려한 결과라고 믿어버린 채로 "나"는 나머지 사람과 든든한 우정을 교환한답니다. 존재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마법사를 만나 그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말에요.


집의 아주 먼곳에서 왔을리라 추측되는 마법사는 "나"를, 그리고 나머지 사람을 알고 있어요. "나"는 결코 무언가를 잊는 적이 없는데, 없다고 믿었는데, 마법사와의 만남을 통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요. 그 자신이 매일 같이 써왔던 일지가 증거인데 자신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 거의 열 권에 가까운 노트에 쓰여 있었거든요. 그러나 나머지 사람이 경고하기를 마법사 혹은 16번째 사람이라 불릴 인물에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해요. 그가 혹은 그녀가 "나"를 혼동하게 만들고 "나"의 정신을 파괴하고 있는 걸까요? "나"를 찾아 홀을 방황하는 16번째 사람, 16번째 사람을 죽이려는 나머지 사람,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는 "나".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마법 같은 "나"의 집은 도대체 어디인거죠? 누가 "나"의 편이고 누가 "나"의 적이며 "나"는 어떻게 집에 살며 집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집은 앞으로도 "나"에게 헤아릴 수 없이 아름답고 무한히 자애로운 공간으로 남았을까요? "나"가 공양하는 열세 구의 시체가 누구인지 어째서 집 구석구석에 몸을 누이고 있었는지도 알게 될까요?


리뷰로는 이 재미를 도통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이 책은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려요. 독자인 제가 "집"이라는 수족관을 숨죽인 채로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 느낌이었는데 뭐라 설명할 수 없이 환상적이더라구요. "나"는 수족관 속을 둥둥 떠다니는 평화롭고 행복한 해파리? 해탈한 모습이 엄청 사랑스러운 주인공이에요. 세상 모든 음모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싶고 그가 영원히 집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영영 책을 덮고 싶지가 않았어요. "몇 달 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아직도 매일 이 책을 생각한다"는 어느 독자님의 말이 과장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말을 믿어요. 저 또한 거듭 이 책을 생각할 것 같구요. 또 아마 자주 이 책을 펼쳐볼 것 같습니다.


피라네시라는 이름은 18세기 이탈리아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그 화가를 몰라서 책을 읽는 내내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읽었어요. "각자의 관람루트는 다르지만 그 목적지는 자신을 향한다"는 주제마저 꼭 닮아서 여러분도 에셔의 작품과 함께 『피라네시』를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흐름출판 지원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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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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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잼나는 소설! 영화까지 궁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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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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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연대기와 소송 기록 등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원본 자료들에 기반한 실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장소, 날짜 및 그 밖의 상세한 정보들은-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한 발언과 행동, 그들이 법정에서 한 종종 모순되는 주장들, 서로에게 지불하거나 수령한 금액, 심지어는 날씨까지도- 모두 실존하는 사료에서 인용했다. (p9. 저자의 말 중)

 

 

1386년 12월 29일에 벌어졌던 장 드 카루즈와 자크 르그리의 결투 재판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철저하게 사료를 바탕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말하고 있어요.

남편이 있는 귀족 여성이 다른 귀족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사건.

참담했던 그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사건의 정황을 살피고 600년에 걸쳐 왜곡되어온 피해여성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그리는 피에르 백작의 가신으로서 긴 시간 우정을 나눈 사이였습니다.

카루주가 첫부인에게서 아들을 보았을 때에는 르그리가 대부가 되어 유아세례에 함께 했을 정도니까요.

그 시절에 대부가 되는 것은 상대에게 엄청난 명예를 선사하는 일로써 실질적인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과 진배가 없었어요.

이런 그들이 반목하게 된 것은 카루주의 박탈감 그리고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카루주의 첫 부인과 장자가 사망하여 카루주의 멘탈이 온전치 못한 것도 한 이유였겠지만

자신보다 비천한 출신인 르그리가 주군의 비호를 등에 업고 잘나가기 시작하니 열등감이 폭발한 듯 합니다.

두 사람의 주군이었던 피에르 백작은 르그리에게 누구나 탐낼만한 땅을 주었고 카루주 아버지의 성주 자리까지 건내게 됩니다.

그 땅이 카루주의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가 받았어야 할 유산 중의 하나였다는 점 때문에

또 통상 아버지의 자리는 그 아들이 물려받는다는 관습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루주는 소송을 걸지만 졌습니다.

주군에게 두 번이나 소송을 거는 위험천만한 일을 벌였는데 두 번 다 패소했으니 카루주의 성격이 괴랄해진 것도 이해는 갑니다.

차마 주군에게 반역할 수 없었던 카루주는 화를 르그리에게 쏟아부었고 이 모든 일이 르그리의 음모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러요.

제3자의 도움으로 중간에 화해를 한 적도 있었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앙금이 생길만한 일이 또다시 발생한 것 같아요.

카루주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참전해있는 동안 르그리는 가신 루벨의 도움을 받아 작심하고 마르그리트를 강간합니다.

르그리는 참담한 폭력을 행사한 후 마르그리트를 협박했고 그녀가 입을 다물 것으로 예상했을 거에요.

귀족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일이 중세 유럽에서 어느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을지를 생각해 보면

마르그리트로서는 이 협박에 굴복하여 차라리 모든 일을 잊고 사는 편이 훨씬 손쉬웠을지 모릅니다.

마르그리트의 아버지 티부빌이 두 번이나 국왕을 배신하여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었다는 점,

그런데 그 딸 또한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상황이 가져오는 오명이 만만치 않았을테구요.

분노한 남편에게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며 강간 사실을 남편에게 먼저 고발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아내 살해의 정당성마저 획득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는 절대 과장일 수 없는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받은 모욕과 폭행, 이후 맞이하게 될, 거의 확신하고 있었을 더 큰 폭력들에 굴복하지 않아요.

글자를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이 여인은 당일의 일을 여러번의 재판에서 일관되게 진술할 수 있을만큼

거듭거듭 머리에 되새겼고 전쟁에 돌아온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시의 일을 고백합니다.

분노한 카루주가 아내를 탓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곧 피에르 백작에게 르그리를 고소합니다.

르그리를 시종 편애했던 백작은 르그리의 무죄에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무마시키지만

카루주는 파리로 가 아예 국왕 앞에서 상고하며 결투재판으로써 르그리의 죄를 입증하겠다고 선서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계획에서는 거칠게나마 정의가 존재한다. (p283)

하나님은 공명정대하시므로 진실이 패배할 리 없다는 것이 그 시절 결투재판의 취지입니다.

기소인과 피곤인이 결투를 벌여 이긴 자가 진실을 말한 것으로 인정을 받았구요.

패배한 자는 거짓 증언을 한 것이 되어 결투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즉결처형이었습니다.

강간과 같은 사건에 있어서는 여성의 무고죄가 성립되어 그 처벌이 훨씬 강력했는데

만약 카루주가 결투에서 지게 된다면 마르그리트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결투의 결과를 알려드리면 영화든 책이든 재미가 없을 것이므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꾹 참습니다.

다만 화가 나는 건 이 결투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많은 역사가와 소설가, 이야기꾼들이 마르그리트의 일관된 증언을 무시하며 르그리의 결백에 손을 들어줘요.

과학적 증거의 취합이 어려웠던 시대, 목격자마저 없는 사건.

피해자의 증언 외에는 당시로서는 아무 증거도 제시할 수 없는 사건에서

젊은 귀족 여성이 사건 발생 전에는 단 한번 밖에 본 적이 없었던 남자와 그의 가신을 정확히 지목하여

상대 변호인마저 감탄할 수 밖에 없는 (변호인의 기록 노트가 남아있는 상황) 일관된 진술을 귀족 남성들 앞에서 거듭 증언하며

목숨을 걸었던 일을 그토록 가볍게 취급하며 없는 일로 만들고 범인을 착각한 것으로 오욕한 일은 참 많이 속상합니다.

작가 에릭 제거는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그리의 다툼을 기록한 중세의 문서를 읽다가 이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노르망디와 파리 등지의 필사본 보관소에서 이 사건의 기록물을 샅샅이 뒤져가며 이 책을 썼습니다.

600년 전의 사건,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가 떳떳하게 진실은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마르그리트의 증언이 진실이 아니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의 앞뒤로 벌어진 일들이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워 이후로도 이 역사는 내내 가공되겠지만

마르그리트의 증언이 무시되는 일만큼은 앞으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건의 심각성에 집중하는 것과 별개로 샤를 6세 때의 유럽 정세, 건물의 양식, 거리의 풍경, 귀족 생황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로마시대의 경기장이 남아 여전히 결투장으로 쓰였다거나 살해 당한 주인을 대신해 투견이 결투에 임했다거나 하는 일 같은거요.

강간으로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식의 비과학적인 그 시절의 인식들에는 솔직히 좀 놀랐는데 우리나라도 이랬던가요?

생각지도 못한 삽화들이 있어 독서의 흥미진진함은 배가 되고 결투 장면의 긴박감에는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일반 소설과 다른 점은 이 책이 사료의 정직한 제시에 가장 큰 중점을 두어 대화 같은 것들이 완전히 배제됐다는건데

설명어투의 문체로 시작부터 끝까지 전개되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게 이 책의 묘미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 오렌지디 지원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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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강아지
케르스틴 에크만 지음, 함연진 옮김 / 열아홉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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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언제 시작하는 것일까? 그 앞에는 항상 다른 시작이 있기 마련이다. 똑똑 떨어진 물방울이 작은 개울이 되고, 작은 개울이 시냇물을 이루고, 빗물이 습지의 수위를 상승시키던 어느 날처럼 말이다. _p4

아직 젖 냄새도 가시지 않았을 조막만한 강아지가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낚시하러 가는 주인의 뒤를 쫓아 달리는 어미 개의 뒤를 녀석은 허락도 받지 않고 뒤따릅니다.

어미 개는 작게 종종걸음치며 달려오는 녀석의 냄새를 눈치 챘지만 주인은 이를 알지 못했고

결국 눈보라가 소용돌이 치는 호숫가에 강아지만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가버립니다.

주인과 함께 웬종일 강아지를 찾던 아내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며 얘기합니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영영 찾을 수 없을 거야.

지금쯤이면 이미 얼어 죽었을테니까.

 

어미 개의 냄새를 찾던 녀석은 지친 몸을 이끌고

가문비나무 뿌리 아래 움푹 패인 굴 속에 들어가 배를 몸을 숨깁니다.

어미의 달콤한 젖으로 배를 채울 수도 없는 밤은 허기지고 외로웠어요.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추위였을텐데 강아지는

저 자신의 온기에 기대어 꼬리에 주둥이를 틀어박고 버텨봅니다.

새하얀 폭설에 묻혀 낑낑대는 녀석의 울음소리가 애처로워요.

햇빛이 눈 위를 환하게 비춘 다음 날 기적처럼 강아지가 눈을 뜹니다.

약간의 얼음을 핥아먹고 그 얼음물에 다시 꽁꽁 어는 몸을 느끼면서도

강아지는 집을 찾기 위해 굴을 떠나 눈밭에 폭폭 발을 담굽니다.

털도 나지 않은 뱃가죽을 뚫고 추위가 가시처럼 강아지를 찌릅니다.

어제 어미를 쫓아 한참을 헤맨 네 다리도 너무 아파요.

강아지는 채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한 채 간신히 가문비나무 아래로 되돌아옵니다.

추위도 배고픔도 어린 것이 버텨내기엔 너무 힘겨운 것이라

이 녀석이 도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한 문장 한 문단 한 페이지가 조마조마했어요.

신기한 건 아무도 보살펴주는 이 없는 숲에서, 누구의 의도도 없이

강아지가 숲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연명하는데 있지 않나 싶어요.

강아지는 무기력한 추위에 꽁꽁 잠기며 영영 눈을 못뜰 뻔 했었지만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까치의 울음소리에 죽음 같은 잠을 이겨냅니다.

제대로 된 먹을거리는 없었지만 땅을 파헤쳐 찾아낸

두 덩이의 여우 똥과 링고베리 열매, 토기 똥 같은 것으로 배를 채울 수도 있었어요.

그 작은 에너지로 며칠 밤을 버틴 강아지는 바람이 잠잠해진 어느 아침부터는

먹이를 찾아 드디어 가문비나무 굴도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후로는 끈기있게 먹을거리를 찾아 움직이는 매일매일의 여정이 펼쳐져요.

햇빛을 핥고 빨면서 겨울을 지나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로 달려나가다

숲으로 사냥을 나오는 인간들의 무리를 마주치게 되는 그날까지,

계속 가렴, 쉬지 말고 계속 가. (p44)

 

강아지가 살기 위해 겨울의 하루하루를 버티고 이기다

봄이 되어 들쥐로 풍족하게 배를 채우고 바람을 쫓아 신나게 달음박질치고

햇볕에 취해 노곤히 잠드노라면 제가 다 행복한 마음이 들었어요.

올빼미에게 쫓기고 여우에게 먹이를 뺏길 땐 조마조마 속상했구요.

소란스런 숲의 소음에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밤엔 짠한 마음이었습니다.

사람 소리가 들릴 땐 너무나 반가웠는데

강아지가 두려움에 피해버리니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바보야 도망가지마, 주인일지도 모르는데 얼른 나가봐.'

길 잃은 강아지의 시선으로 보는 험난한 세상살이,

생각했던 그림책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감동이었어요.

혹시 길을 잃어버리셨나요?

주둥이를 몸안으로 밀어 똘똘 말면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을 간직할 수 있대요.

온통 망가지고 누덕누덕해진 잠도 걱정 마세요.

털을 뽀송뽀송 말리고 포만감을 채울 수 있는 봄이 오면 깊은 잠도 되살아날테니까요.

달이 떠올라 얼음 조각이 환히 빛나는 밤엔 누군가가 그리워질 수도 있고

그러다 엉터리 같은 무언가를 내가 그리워하는 이로 착각하는 실수를 할지도 몰라요.

강아지도 은여우를 엄마로 착각해 쫓아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 녀석 어쨌는지 아세요?

엉덩이를 대고 풀썩 주저앉아 뒷다리로 사정없이 귀를 긁었대요.

귀를 긁는 일 외에는 세상에 신경 쓸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요.

그리움도 외로움도 어쩌면 두려움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일처럼 쉬이 지나가게 둬 보아요.

태양 하나를 내 품에 담아 두면 어두운 밤에도 서리 내리는 아침에도

강아지처럼 습지로 나가거나 필요한 것을 찾으러 움직일 수 있을텐데 이것만큼은 어렵네요.

제 태양이 뭔지 아직도 도통 모르겠지만 결국은 찾아내게 될 거에요.

끝내 제 집을 찾아낸 길 잃은 강아지처럼요.

잃어버린 강아지를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을 때

강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이야기는 언제 끝이 나는 것일까?

끝날 리는 없다. 그 뒤엔 항상 다른 게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태양과 강한 바람, 그리고 나른한 휴식의 나날이 저물면, 곧 사냥하는 날들이 시작된다. 물푸레나무의 가지를 타고 양철 지붕 위를 두드리는 폭우가 한바탕 지나고 나면 길고도 졸린 나날들이 이어지고, 곧이어 따스한 봄이 찾아와 코와 귀를 간지럽힌다.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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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선정위원 #스웨덴소설 #어른들을위한동화 #오늘하루길을잃어버린당신에게

 

+ 열아홉 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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