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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네시
수잔나 클라크 지음, 김해온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미친, 이건 찐 취향❤ 번역 출간되는 SF 치고 재미없는 책을 찾기가 더 힘들다지만 <피라네시>는 취향의 정중앙을 완벽하게 관통했어요. 배경이 집이라는데서부터 집순이 독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긴 했었습니다.
아 물론 그 집은 천장으로 구름이 흘러 들어오고, 바닥은 조수 간만의 차로 밀려 들어오고 나가는 바닷물에 잠겨있으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홀마다 미노타우루스 같은 신화 속 조각상들이 우뚝 서있고, 알바트로스, 참새, 갈매기, 까마귀 등의 새들이 집안에 떼로 둥지를 틀고 있다는 특이점이 있긴 하지만요. 아참, 집안 곳곳 편안한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있는 열세 구의 시체도 빼먹으면 안되요. 어쨌든 집입니다, 그것도 고대의 건물들이 무한히 붙어 있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커다란 집이요!
주인공인 "나"는 매일 같이 집을 탐험하고 연구하는 모험가이자 과학자에요. "집 = 세상"인 세계를 탐구하는 그는 얼핏 보면 무인도에 표류하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집은 집이되 전기도 수도도 가스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홍합을 캐고 물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고 해초를 모아 겨울을 날 뗄감을 마련하고 말린 물고기 껍질로 안경테를 고치는 등 생존을 위해 힘쓰거든요. 무엇보다 그곳엔 "나"와 "나머지 사람"이라 불리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요.
나머지 사람도 "나"처럼 과학자인데 "나"와는 달리 떼깔이 고운 옷을 입고 항상 깔끔한 냄새를 풍겨요. 그는 세상이 잃어버린 고대의 힘을 되찾기 위해 연구 중인데요.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 집에 살게 되었는지 언제 만남을 시작했는지 어째서 단 둘 뿐인지 이 집은 도대체 어디인지가 궁금한데 초반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에 궁리조차 할 수 없어요. "나"는 집에 대해서는 궁금해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는 영 호기심이 없거든요. 아마도 "나"라는 인물이 가진 자기 확신이 엄청나게 커서인 것 같아요. "나"는 집의 자식이고 집이 주는 메세지가 있는 이상 모든 것이 괜찮고 행복하다는거요.
종종 어째서 집이 "나"에겐 제공하지 않는 것을 나머지 사람에게는 제공을 할까 의문을 느낄 때가 있기는 해요.
이를테면 운동화, 옷(막 세탁한 것처럼 깨끗한!), 새노트, 필기구, 분필, 침낭 같은 것들을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구하는 걸까요? "나"는 나머지 사람이 주는 것 외에는 모조리 자급자족 중이라 옷은 낡아빠지고 신발은 다 닳아 맨발로 살고 있는데 말예요. 그러나 이런 의문조차 집을 전능한 존재로 믿고 있는 "나"에겐 오래 머무르지 않아요.
집이 생존력이 없는 나머지 사람을 배려한 결과라고 믿어버린 채로 "나"는 나머지 사람과 든든한 우정을 교환한답니다. 존재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마법사를 만나 그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말에요.
집의 아주 먼곳에서 왔을리라 추측되는 마법사는 "나"를, 그리고 나머지 사람을 알고 있어요. "나"는 결코 무언가를 잊는 적이 없는데, 없다고 믿었는데, 마법사와의 만남을 통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요. 그 자신이 매일 같이 써왔던 일지가 증거인데 자신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 거의 열 권에 가까운 노트에 쓰여 있었거든요. 그러나 나머지 사람이 경고하기를 마법사 혹은 16번째 사람이라 불릴 인물에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해요. 그가 혹은 그녀가 "나"를 혼동하게 만들고 "나"의 정신을 파괴하고 있는 걸까요? "나"를 찾아 홀을 방황하는 16번째 사람, 16번째 사람을 죽이려는 나머지 사람,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는 "나".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마법 같은 "나"의 집은 도대체 어디인거죠? 누가 "나"의 편이고 누가 "나"의 적이며 "나"는 어떻게 집에 살며 집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집은 앞으로도 "나"에게 헤아릴 수 없이 아름답고 무한히 자애로운 공간으로 남았을까요? "나"가 공양하는 열세 구의 시체가 누구인지 어째서 집 구석구석에 몸을 누이고 있었는지도 알게 될까요?
리뷰로는 이 재미를 도통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이 책은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려요. 독자인 제가 "집"이라는 수족관을 숨죽인 채로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 느낌이었는데 뭐라 설명할 수 없이 환상적이더라구요. "나"는 수족관 속을 둥둥 떠다니는 평화롭고 행복한 해파리? 해탈한 모습이 엄청 사랑스러운 주인공이에요. 세상 모든 음모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싶고 그가 영원히 집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영영 책을 덮고 싶지가 않았어요. "몇 달 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아직도 매일 이 책을 생각한다"는 어느 독자님의 말이 과장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말을 믿어요. 저 또한 거듭 이 책을 생각할 것 같구요. 또 아마 자주 이 책을 펼쳐볼 것 같습니다.
피라네시라는 이름은 18세기 이탈리아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그 화가를 몰라서 책을 읽는 내내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읽었어요. "각자의 관람루트는 다르지만 그 목적지는 자신을 향한다"는 주제마저 꼭 닮아서 여러분도 에셔의 작품과 함께 『피라네시』를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흐름출판 지원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