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6년 12월 29일에 벌어졌던 장 드 카루즈와 자크 르그리의 결투 재판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철저하게 사료를 바탕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말하고 있어요.
남편이 있는 귀족 여성이 다른 귀족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사건.
참담했던 그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사건의 정황을 살피고 600년에 걸쳐 왜곡되어온 피해여성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그리는 피에르 백작의 가신으로서 긴 시간 우정을 나눈 사이였습니다.
카루주가 첫부인에게서 아들을 보았을 때에는 르그리가 대부가 되어 유아세례에 함께 했을 정도니까요.
그 시절에 대부가 되는 것은 상대에게 엄청난 명예를 선사하는 일로써 실질적인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과 진배가 없었어요.
이런 그들이 반목하게 된 것은 카루주의 박탈감 그리고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카루주의 첫 부인과 장자가 사망하여 카루주의 멘탈이 온전치 못한 것도 한 이유였겠지만
자신보다 비천한 출신인 르그리가 주군의 비호를 등에 업고 잘나가기 시작하니 열등감이 폭발한 듯 합니다.
두 사람의 주군이었던 피에르 백작은 르그리에게 누구나 탐낼만한 땅을 주었고 카루주 아버지의 성주 자리까지 건내게 됩니다.
그 땅이 카루주의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가 받았어야 할 유산 중의 하나였다는 점 때문에
또 통상 아버지의 자리는 그 아들이 물려받는다는 관습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루주는 소송을 걸지만 졌습니다.
주군에게 두 번이나 소송을 거는 위험천만한 일을 벌였는데 두 번 다 패소했으니 카루주의 성격이 괴랄해진 것도 이해는 갑니다.
차마 주군에게 반역할 수 없었던 카루주는 화를 르그리에게 쏟아부었고 이 모든 일이 르그리의 음모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러요.
제3자의 도움으로 중간에 화해를 한 적도 있었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앙금이 생길만한 일이 또다시 발생한 것 같아요.
카루주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참전해있는 동안 르그리는 가신 루벨의 도움을 받아 작심하고 마르그리트를 강간합니다.
르그리는 참담한 폭력을 행사한 후 마르그리트를 협박했고 그녀가 입을 다물 것으로 예상했을 거에요.
귀족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일이 중세 유럽에서 어느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을지를 생각해 보면
마르그리트로서는 이 협박에 굴복하여 차라리 모든 일을 잊고 사는 편이 훨씬 손쉬웠을지 모릅니다.
마르그리트의 아버지 티부빌이 두 번이나 국왕을 배신하여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었다는 점,
그런데 그 딸 또한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상황이 가져오는 오명이 만만치 않았을테구요.
분노한 남편에게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며 강간 사실을 남편에게 먼저 고발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아내 살해의 정당성마저 획득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는 절대 과장일 수 없는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받은 모욕과 폭행, 이후 맞이하게 될, 거의 확신하고 있었을 더 큰 폭력들에 굴복하지 않아요.
글자를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이 여인은 당일의 일을 여러번의 재판에서 일관되게 진술할 수 있을만큼
거듭거듭 머리에 되새겼고 전쟁에 돌아온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시의 일을 고백합니다.
분노한 카루주가 아내를 탓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곧 피에르 백작에게 르그리를 고소합니다.
르그리를 시종 편애했던 백작은 르그리의 무죄에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무마시키지만
카루주는 파리로 가 아예 국왕 앞에서 상고하며 결투재판으로써 르그리의 죄를 입증하겠다고 선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