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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
J. 라이언 스트라돌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케잌이었다면 한 조각씩 예쁘게 잘라 한 입씩 아껴먹지 않았을 거에요. 아구아구 야성적으로 입 안에 쓸어담아 케잌판은 초토화 되고 케잌은 약간의 크림과 빵 부스러기만 남긴 채 사라졌을 겁니다. 너무 빨리 너무 순식간에 헤치운 탓에 맛을 다 설명은 못하겠고 정말 맛있었는데! 또 먹고 싶다!! 징징 또는 감탄을 디저트처럼 음미하면서요. 그런 느낌으로 읽은 책입니다. 표지부터가 맛깔나게 예뻐서 식욕을 돋우더니 활자로 된 음식들의 종이향까지 우걱우걱 제 침맛으로 씹어삼킬 수 있을 정도의 재미였어요. 갓난아기 에바가 천재 요리사가 되어가는 여정이 아주 작정하고 맛으로 시작해 맛으로 끝나는 꿀잼이었거든요.
"호박을 수확할 무렵에 이가 나다니 운도 좋지."(p23)
제 자식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아버지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에바의 아버지 라르스는 셰프입니다. 세상의 중심엔 딸 에바가 있고 에바를 향해 눈과 귀와 입과 손짓과 발걸음과 관심과 사랑을 두고 사는 딸바보입니다. 세상에 나온지 갓 삼개월이 되었을 뿐인 에바에게 각종 맛있는 음식들을 해먹이고 싶어 병이 날 정도이고 실제로 병원에 상담까지 가요. 아기에게 항정살이 들어간 퓨레를 먹이고 싶다는 라르스의 말에 의사가 했을 말이 상상이 가시죠? 제발 참으세요 에바 아부지~~ 의사의 말을 어길 생각은 없지만 족히 2년은 기다려야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에바를 상상하자니 라르스는 심장이 찢어질 것 같고 저는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보다 먼저 라르스가 죽어버렸을 땐 너무 상심해 잠깐 책을 놓기도 했을 정도로 정이 가는 사내였지요. 에바의 엄마가 주부로써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에바는 삼촌 부부네서 성장합니다. 해리포터처럼 벽장에서 페투니아의 귀 따가운 잔소리를 들으며 크진 않았으니 걱정 마시구요. 대신에 그녀는 그 벽장에서 고추를 키웁니다. 이름도 귀여운 초콜릿 아바네로!! 이름은 이렇게 귀여운데 사악하기 그지 없는 세상 매운 고추종자 중의 하나라네요. 이 초콜릿 아바네로 이야기가 그녀가 중심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의 시작이자 실은 마지막 주인공으로서의 등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식당에 고추를 조달하는 어린 에바에서 식당에서 농어를 맛보던 청소년 에바로 자라나 식당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요리하고 인정받는 천재 요리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주변부, 위대한 중서부의 또다른 부엌들에서 펼쳐집니다.
"그걸 아직도 드실 수 있어요?"
"내가 뭘 할 수 없다는 말은 마" (p306)
국가대표로의 꿈 앞에 다가간 순간 잠깐의 방심으로 임신해버린 브라크, 에바에게 한눈에 반한 밴드소년 윌, 에바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부유한 여성 옥타비아, 어머니를 잃고 점점 더 불우해질 운명에 처한 듯한 조디, 의붓자녀들의 무시와 친자식의 방탕을 자신이 만든 곡물바의 자부심으로 이겨내는 중인 팻, 버린 자식 에바와의 만남을 필사적으로 원하고 있는 친모의 부엌에서 또는 맛있는 음식들 앞에서 에바는 잠깐씩 등장할 뿐이지만 그런 에바와의 인연으로 누군가는 운명의 승기를 잡아 승승장구 하고 누군가는 불륜 중인 남자친구의 집 앞에서 드러눕는 만행을 펼칩니다. "에바는 그녀의 일부였지만, 에바가 이토록 찬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신디가 에바의 일부는 아니기 때문이었다"라는 깨달음으로 조용히 제 부엌의 내실을 다지는 이도 있었지요. 책은 언젠가를 희망하는 에바 지인들의 열린 결말을 얘기하는 단편 연작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전혀 부족하지도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에바와 함께하는 이 모든 인간적인 맛들의 이야기에 공감한 탓이겠지요. "궁극의 맛은 사람 사이에 있다"는 댜큐 피디 천샤오칭의 말에 꼭 맞는 책입니다. 눈으로 만나는 사람 사이의 맛, 표지와는 달리 아기자기하거나 곱고 여성스러운 느낌으로만 펼쳐지지 않아 더욱 좋았던 환상적인 맛의 이야기를 만나보시길. 오늘을 더욱 맛있게 채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