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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 귄터 그라스, 파트릭 모디아노, 임레 케르테스… 인생에 대한 거장들의 대답
이리스 라디쉬 지음, 염정용 옮김 / 에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이자 살 만하요?"
"살 만하기는, 그만 갔이믄 좋을 긴데."
"그러기요. 오래 사는 것도 죄라니께." (p162)
얼마전 읽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남편을 앞서 보낸 간난할멈이 충격으로 앓아 누웠다 일어나 마실을 나왔을 적에 소를 치며 가던 동네 청년 칠성이가 그러는 것이다. 오래 사는 것도 죄요, 속으로는 ' 저 꼴 되믄 고레장을 시켜버리는 거라' 짤짤 혀를 차면서. 저는 결코 늙지 않을 듯이, 결코 아프지도 않고 서럽지도 않은 언제나 젊은 아비일 줄로만 알고서. 새끼 참 싹퉁머리 하고는, 칠성이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면서 한편으로는 덜컥 겁이 났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가 나라는 존재를 두고 죄라 이르는 것에 대하여.
막연하여 더욱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운 죽음. 그 죽음이 다해가는 나이가 되서 돌이켜보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젊은 시절로 돌아 가고 싶어질까? 지금의 나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천천히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까? 너무 빨리 먹어버린 나이가 지긋지긋할까? 현재가 너무 행복해 인생이 재연장전에라도 돌입했으면 싶을까? 그도 아니면 늙어버린 육체와 생이 지긋지긋해 얼른 삶을 마감하고 싶어질까? 간난할매는 젊은 시절 싱싱한 육체로 노동하던 삶을 그리워하며 남편과 자신의 제사 지내 줄 양자를 들이기 위해 두만네 집으로 향한다. 저승 가서는 배 곪고 싶지 않은 마음, 누가 무덤에 풀이라도 뽑아줬으면 하는 마음, 죽음을 앞두고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평범한 모습이 짠하고 안타까웠다. 그렇다면 평생 남의 집 살림을 산 노비가 아니라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수상 후보자였거나 또는 그에 준할만큼 유럽 문학사에서 커다란 위치에 올랐던 고령의 작가들이라면 죽음 가까이에 이르러 삶을 어떻게 회고할까?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더욱 깊고 널따란 삶에 대한 성찰을 이룩하고 있진 않을까? 그런 의문으로 문예편집자 이리스 라디쉬는 쥘리앵 그린, 일제 아이힝어, 클로드 시몽, 페터 륌코프르, 나더쉬 피테르, 안드레이 비토프, 조지 타보리, 프리데리케 마이뢰커, 자라 키르쉬, 권터 그라스, 마르틴 발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안토니오 타부키, 미셸 뷔토르, 임레 케르테스, 조지 스타이너, 파트릭 모디아노, 아모스 오즈, 루트 클뤼거를 방문하여 인터뷰를 한다. (누구 아는 사람 있으신지?ㅠㅠ 나는 없다ㅠㅠㅠㅠㅠ)
"당신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요?"
"당신은 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나요?"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앞날에 대해 바라는 게 있나요?"
"죽음이 두렵진 않나요?"
무엇보다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요?"
프랑스, 폴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 헝가리, 독일. 작가들의 다양한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답변이 쏟아진다. 늙는 것은 죄악이지만 가능한 한 더 오래 살고 싶다라고 대답한 작가도 있었고, 남은 날이 머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죽는 것은 두렵다는 작가도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누군가가 우리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작가가 있는 반면 태어나는 것이 축복이며 생이 그 자체로 기적이라는 작가도 있었다. 누군가가 태어나고 싶냐고 물었다면 분명히 싫다고 대답했을 이와 늙어서도 경탄할 것이 많은 행복한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삶에 대한 반추의 적나라한 대비란. 국적과 성별과 이룬 성과를 초월하여 한결같이 그리워 언제고 돌아가고픈 그곳이 다름 아닌 젊음이라는 것도 어쩐지 서글프기만 하여. 나는 작가들이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에서 남은 삶에 용맹해지기 보단 어쩐지 더욱 슬프고 쓸쓸해졌던 것이다. 설령 그곳이 전쟁터였을지라도 내가 젊었기 때문에 그 시절이 그립다는 것이 아직은 상상이 가지 않는 새벽, 젊은 오늘이 젊은 하루가 부디 더욱 길기만 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