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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비행
헬렌 맥도널드 지음, 주민아 옮김 / 판미동 / 2021년 11월
평점 :

헬렌 맥도널드는 어린 시절 꽤나 외진 시골에서 자랐다.
그녀 표현을 빌자면 "다 허물어져 가는 어느 국가 지정 공식 대정원(p61)" 같은 곳이었는데
2차 대전 피난민들과 다수의 히피, 페미니스트로 구성된 마을엔 언젠가 아서 코난 도일이 찾아와 오수를 즐기기도 했단다.
코난 도일로 하여금 <요정의 출현>이라는 책을 쓰게 만든 코팅리 요정들의 사진도 고향의 포플러 나무에서 찍혔다.
집 안 가득 넘쳐나는 자연 도감과 집 밖의 풍요로운 숲과 목초지를 보며 헬렌은 자연주의자로 성장한다.

점 하나 크기의 벌레를 보려고 잔디 속에 얼굴을 파묻곤 했던 헬렌에게 자연은 경이로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헬렌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찾는 환상성과 우정, 친밀감이 상당히 왜곡된 관찰임을 곧 깨닫게 된다.
자연을 인간의 거울로 보며 자신의 세계관, 욕구, 생각, 희망 등을 투사하는 태도와 가설에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헬렌이 자연을 보는 관점이 낯설지는 않을지언정 이런 관점을 내재화 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나에게 곰(푸)는 친근하고 돼지(피그렛)은 겁이 많거나 피그렛이 아닌 돼지는 게으른 존재이다.
까마귀는 영리하고 까치는 행운을 주는 등 자연이나 동물의 물성은 도통 자연 그 자체로 다가오지 않으니까.
어쨌든 시작부터 이런 태도를 지적받았기에 책을 읽는 내내 자연에 가지는 기존의 감상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철새(해오라기)들의 계절성 밤비행을 관찰하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간 헬렌은 이야기한다.
"창공이 텅빈 공간처럼 보일지라도 그곳은 박쥐와 새, 날아다니는 곤충, 거미, 바람에 날려 온 씨앗,
미생물, 포자 등 여러 생명체로 꽉 착 서식지(p71)이며, 다양성으로 꽉 찬 떠들썩한 세상(p72)"이라고.
철새들의 이동에 대한 기념이 없던 시기에는 레이더에 잡힌 이런 탐지들에 "천사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단다.
와우, 낭만적! 이라고 생각했다가 아차하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니까 이런 관념으로 자연을 보아서는 안된다 이 말인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그게 어렵다.
어쨌든 근래의 천사들은 고층 건물이 쏘아대는 레이저와 조명 불빛에 매려되어 길을 잃거나 목숨을 잃는다.
어떤 사람들은 레이저에 휘말려 뱅글뱅글 건물 주위를 도는 새들이 신기하고 감탄스러워 이를 관찰하기 위해 옥상에 간다.
고동털개미의 비상은 놀라운데 그것이 일생에 단 한번뿐인 혼인비행이기 때문이다.
여왕벌이 페로몬을 뿌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지상으로 모여든 수개미, 날개가 돋은 개체들이 페로몬을 따라 솟구친다.
더 강한 개체를 선별하기 위해 여왕은 더 높이 날아오르고 수개미가 그런 여왕을 뒤쫓는다.
혼인을 완료한 후 여왕은 새로운 왕국을 만들기 위해 떠나고 수개미는 지상으로 추락, 사망한다.
여왕 개미는 이후 30년을 더 살지만 다른 수개미와의 새로운 짝짓기는 없다.
한번의 혼인비행으로 몸속에 충분할만큼 정자를 저장한 여왕벌은 수컷 없이도 알을 낳는다.
여왕 개미의 이런 출산이 상당히 편리해 보인다는 것 또한 인간의 관점이겠지?

제목인 "저녁의 비행"은 칼새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두고 만들어진 단어이다.
베스퍼스 플라이츠, 라틴어로 땅거미가 지는 저녁, 하루를 마감하는 장엄한 기도이다.
헬렌은 저녁 비행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생각했고
칼새가 램 수면에 빠진 마법 같은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 내게도 이 단어는 무척이나 특별하다.
뭉게구름이 떠 있는 맑은 날씨 구역까지 올라가 공기에 실려 하늘을 날면서 잠든 칼새의 무리라니
어느 비행사의 목격담처럼 보름달과 별들의 파편 아래 비행기만큼 높이 떠서 숙면하는 새를 싱상하는 건
그러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한 편의 아름다운 판타지다.
난민, 망명 신청자, 장애인 등 헬렌은 자연을 관찰하듯 보호받지 못하거나 차별받는 개체들도 관찰한다.
기후위기 등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양상의 파괴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자연에 해로운 인간, 인간에게 해로운 인간, 내가 그런 인간들 중 한 명이 안되기는 불가능일 것 같다.
덜 해로운 인간이 되어야지 결심할 뿐,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이롭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감수성 예민한 자연주의자의 에세이는 섬세하고 흥미롭고 아름답다.
저자의 잦은 눈물이 한번씩 마음의 짐처럼 다가온다는 점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가 없는 책이다.
+ 피트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높이 관련 얘기가 나올 땐 흐린 눈으로 읽은 거 안비밀 ㅎㅎ
리뷰에 못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넘 많은데 인스타그램에 올리려면 글자수를 줄여야 한다 ̄へ ̄
<판미동 지원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