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책 선택 좀 최고인 것 같아요. 먼바다의 라라니도 별 다섯 개가 반짝반짝 빛나는 책이었어요. 두 번이나 뉴베리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흥미진진했는데 배경부터가 아주 신선합니다. 새들이 노래하지 않는 열대의 섬이라니 상상이 가세요? 라라니가 살고 있는 섬 산라기타가 그런 곳이에요. 잿빛 깃털의 새들이 조금도 지저귀는 법 없이 조용하고 우울하고 음침한 곳이요. 라라니의 집은 그 중에서도 어둠이 제일 짙게 드리운 장소일 거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내가 필요하다며 집으로 밀고 들어온 큰아버지와 그와 똑닮은 아들이 폭력적이고 거칠게 라라니의 집을 점령했거든요.
라라니의 아버지뿐 아니라 섬의 많은 남자들이 죽었어요. 산라기타 섬의 훌륭한 남자들은 북쪽 바다에 있는 전설의 섬, 만복이 깃들어있다는 아이사산을 찾아 매년 모험을 떠나거든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 보물 같은 땅을 발견해 정착한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진실이 아니에요. 산산이 부서진 배의 파편 혹은 시체의 일부가 섬의 바닷가에서 발견되곤 하니까요. 실패가 계속되어도 전통이 계속되는 건 섬의 독재자 멘요로 때문이에요. 치료사라지만 평생 단 한번도 누구를 치료한 적이 없고 주술사라지만 섬에 뿌려진 저주를 푼 적도 없는 이 남자가 하는 일은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 때 작황이 나쁘거나 병이 퍼질 때마다 저주를 받았다며 큰소리 치고 원인이 되는 사람(아무나)를 지목해 벌 주는 것 뿐이에요. 멘요로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주민들은 멘요로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 하구요. 하지 말라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 의심없는 복종이 섬을 더 큰 침묵 속에 빠트립니다.
그랬던 섬이 돌연 소란스러워져요. 건기로 고통 받던 마을에 비가 와르르르 쏟아지구요. 홍수를 일으킬만큼 끝도 없이 내리던 비가 그친 후엔 우르르 쾅쾅 카나산이 무너져 마을을 덮쳤어요. 사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머리에 뿔이 달린 장님 엘세스에요. 고향 아이사산에서 도둑질을 하다 쫓겨난 엘세스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우연히 만난 라라니를 돕겠다고 했지만 그건 순 거짓말이에요. 비를 바라는 라라니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라라니의 눈을 뺏으려는 계획이었죠. 겁많고 소심하고 못생기고 동정심 많은 라라니. 라라니는 그저 비가 내리기를, 아픈 아기에게 약을 만들어 줄 수 있을만큼 풀이 자라기를, 엄마가 죽지 않기를 바랬을 뿐인데 상황은 절망을 마구마구 불려 마을에 날벼락을 떨어뜨린 거에요. 운명, 너무 고약한 거 아니냐구요.
그래서 어떡하느냐구요? 라라니는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 지바처럼 행동하기로 했어요. 지바는 얼굴에 붉은 반점을 갖고 태어난 여자아이인데요. 저주를 받았다는 멘요로의 말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조차 받을 수 없었어요. 지바는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아이사산으로 가기 위해 몰래 배를 타지만 화가 난 남자들이 지바를 바다에 빠트렸어요. 라라니는 저지르지 않은 죄로 벌을 받고 더 나은 삶을 향해 탈출을 꿈꾸었던 누구보다 용감한 소녀를 가여워하고 또 존경해요. 자신이 지바의 곁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친구가 되어줬을거라고 생각하는 라라니. 힘든 순간에도 지바처럼 행동하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였어요. 세상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아이사산의 꽃과 카나산에 없는 만복을 찾아 한없이 연약한 조각배를 타고 산라기타를 떠난 라라니는 도대체 어떤 모험을 하게 될까요?
열대섬의 신화가 먼바다 가득히 손짓합니다. 필리핀의 수많은 섬에서 기원한 이야기들이 라라니를 통해 깨어나거든요. 장어의 몸을 한 여인, 안개유령, 정령과 마법사,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새를 만난 라라니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요. 라라니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었다면 라라니는 아이사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 밑에 가라앉았을지도 몰라요. 라라니에게는 특출난 용기나 지혜는 없지만요. 꺼지지 않는 연민과 이타심이라는 불꽃으로 길을 밝히고 온기를 불어넣어요. 라라니를 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동정심이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니까요.
라라니가 모험을 끝낸 오늘 아침엔 괜스레 창문을 열고 새 우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한참을 귀기울였어요. 아이사산에 숨겨진 만복이 깨어날 때 가장 먼저 들려온 소리가 새들의 울음소리였거든요. 복이 종알종알 짹짹 여러분 곁에서도 지저귀고 있나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먼바다의 라라니를 펼쳐보세요. 짜릿한 모험의 즐거움과 감동 뒤로 라라니가 불러들인 새들의 소리를 듣게 되실 거에요.
🎉 매력포인트 : 철저한 권선징악 + 낯설고 신비로운 필리핀 신화 속 운명적 모험(신밧드 + 모아나)
<밝은미래 지원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