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아오사키 유고 외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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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라는 제목만으로도 쉽게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아오사키 유고, 이치조 미치, 시라이 도모유키 등 현재 일본 미스터리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헌정하는 단편집을 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감이 커졌다. 보통 이런 헌정 앤솔러지는 원작에 대한 애정 표현에 머무르거나 팬 서비스 성격이 강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책은 달랐다. 참여 작가들은 단순히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세계관이나 캐릭터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개성과 장기를 살려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 자체를 새롭게 변주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헌정집인 동시에 독립적인 본격 미스터리 단편집으로서도 충분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같은 거장을 향한 헌사임에도 각 작품이 전혀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어떤 작품은 정교한 논리와 트릭으로 승부하고, 어떤 작품은 인간관계의 미묘한 균열을 추리의 핵심으로 삼으며, 또 어떤 작품은 장르 자체를 비트는 메타적 시도를 보여준다. 일곱 편을 읽고 나면 마치 서로 다른 장인이 만든 퍼즐 상자 일곱 개를 차례로 열어본 듯한 만족감이 남는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아오사키 유고의 「끈, 밧줄, 로프」였다. 『체육관의 살인』에서 보여주었던 논리적 추론의 매력이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사건은 강도 살인과 시체 유기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작가는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을 치밀하게 연결하며 진실에 접근한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당황한 범인이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것 같습니다. 야스미 씨 후두부에 묻어있던 흙과 아파트 정원의 흙이 일치했습니다.” (17쪽)


흙 한 줌, 작은 흔적 하나까지 논리의 고리로 연결하는 과정은 본격 미스터리 특유의 쾌감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제목이 결말에 이르러 하나의 단어로 회수되는 순간은 감탄을 자아낸다.


“동아줄” (63쪽)


짧은 단어 하나에 트릭과 제목, 그리고 작품의 의미가 모두 응축되는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이치조 미치의 「클로즈드 클로즈」는 학원물을 무대로 한 정교한 알리바이 미스터리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사건 설명이 사실은 치밀하게 설계된 단서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만드는 구성이 돋보인다.


“사건 발생은 지지난주 금요일, 비 오는 날이었어. (…) 부원은 35명, 결석은 감기로 못 나온 2학년 한 명뿐.” (78쪽)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경험은 본격 미스터리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동시에 이 작품은 단순한 퍼즐 풀이에 머물지 않고 청소년기의 우정과 관계 변화라는 정서적 측면도 놓치지 않는다.


“인생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인간관계도 변화해요.” (156쪽)


논리적 추론의 차가움 속에서도 따뜻한 여운이 남는 이유다.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블랙 미러」를 꼽고 싶다. 이 작품은 알리바이라는 미스터리의 고전적 장치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에이지는 연기를 했다. 커피가 뜨거워서 그런 척하며 일부러 컵을 떨어뜨린 것이다.” (214쪽)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독자는 등장인물의 모든 행동을 다시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알리바이를 깨려면 먼저 알리바이가 있어야 한다.” (229쪽)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알리바이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발상이 무척 신선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반가웠던 것은 본격 미스터리가 여전히 건강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미스터리 장르가 스릴러나 심리극 중심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도 이 작품집은 오직 논리와 추리, 그리고 독자와의 정정당당한 두뇌 싸움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원작자를 향한 후배 작가들의 존경과 애정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어 장르 팬으로서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작품에 등장하는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모처럼 생각해 낸 설정이니 서둘러서 소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써 나가고 싶어.” (405쪽)


이 문장은 단순히 한 작가 지망생의 다짐이 아니라,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거장의 유산을 성급하게 소비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어가려는 후배 작가들의 태도처럼 느껴졌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는 거장을 향한 헌사이자 현재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수준을 보여주는 쇼케이스 같은 작품집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이라면 물론이고,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좋은 입문서가 되어줄 수 있다. 책장을 덮고 나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본격 미스터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에 의해 계속 진화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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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6 ㅣ 소설 보다
김채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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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의 『소설보다』 시리즈는 계절마다 동시대 작가들의 단편을 소개하며 지금 한국문학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기획이다. 『소설보다: 봄 2026』에는 김채원의 「별 세 개가 떨어지다」, 위수정의 「귀신이 없는 집」, 최예솔의 「서해에서」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 담긴 '봄'이라는 계절은 흔히 시작과 희망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책 속의 봄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겨울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자리,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관계 사이에서 인물들은 조심스럽게 다음 계절을 향해 걸어간다.

 

세 작품은 소재와 분위기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로 묶인다. 이들의 삶에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관계 속의 미묘한 거리감, 자신조차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서서히 스며든다. 그래서 이 작품들을 읽는 경험은 사건을 따라가는 독서라기보다 인물의 마음속에 머무는 독서에 가깝다.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지금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바라보게 만든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에서 김채원은 상실과 삶의 지속성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별이 떨어진다는 이미지는 어떤 끝이나 단절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그 별들이 지나간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설은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삶을 낙관적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실 이후에도 사람은 살아가고, 웃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 절제된 시선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반면 「귀신이 없는 집」은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미묘한 긴장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귀신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의식하게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면서도 완전히 가까워지지 못하고, 편안함을 말하면서도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위수정은 말과 감정 사이의 틈, 관계의 표면 아래 숨겨진 흔들림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현대인의 불안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최예솔의 「서해에서」는 세 작품 가운데 가장 밝은 온도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밝음은 가벼운 낙관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족함까지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나온다. "망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135쪽) 는 작품 속 문장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는 어딘가 어설퍼도 괜찮다는 긍정이 작품 전체를 감싼다. 흐릿하고 경계가 모호한 서해의 풍경 역시 그런 정서와 잘 어울린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다정한 쉼표를 건넨다.

 

『소설보다』 시리즈의 또 다른 매력은 작품 뒤에 실린 작가 인터뷰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의문들이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기도 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넓어지기도 한다. 창작 과정에서의 고민과 작가의 생각을 함께 읽다 보면 단편 한 편이 주는 밀도가 더욱 깊어진다.

 

세 편의 소설을 모두 읽고 나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고, 누구도 모든 답을 알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관계를 이어가고, 마음 둘 곳을 찾고,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소설보다: 봄 2026』은 그런 과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독자에게 조용한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화려한 사건보다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지나가는 봄의 풍경과 감정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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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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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는 것을 넘어, 작가가 전하고자 한 문제의식과 감정이 심사위원들에게 닿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매년 한국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집이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간다. 최근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는 만큼 신선한 시선과 실험적인 서사를 만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의 취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기대와 낯섦이 공존하는 독서 경험이었다.

이번 작품집에는 김채원의 「별 세 개가 떨어지다」, 길란의 「추도」, 남의현의 「나는 야구를 사랑해」, 서장원의 「히데오」, 위수정의 「귀신이 없는 집」, 이미상의 「일일야성」, 함윤이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등 일곱 편의 작품이 실려 있으며, 그중 김채원의 「별 세 개가 떨어지다」가 대상을 수상했다.


가장 먼저 읽은 대상작 「별 세 개가 떨어지다」는 연락이 끊긴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 사촌 자매의 여정을 따라가며 가족 안에 쌓여 있던 상처와 애도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애도를 다루는 소설이라고 하면 강렬한 슬픔이나 감정의 폭발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절제된 문장과 침묵 속에서 감정을 전달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식물과 흙의 이미지는 상실을 위로하는 상징처럼 작용하며,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가족 간의 신뢰와 애정은 행간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진다. 사건보다 정서에 집중하는 서사 방식은 인상적이었지만, 동시에 내게는 가장 어렵게 다가온 작품이기도 했다.


서장원의 「히데오」 역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 히데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반복되는지를 탐색한다. 히데오는 자신의 과거를 인터뷰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그 과정은 마치 하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작품을 읽으며 이름과 기억, 정체성과 상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길란의 「추도」는 개인적 애도와 시대적 상실감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한때 다큐멘터리 감독이었지만 지금은 백모의 유튜브 채널을 촬영하고 편집하며 살아가는 해주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의 시간을 보여준다. 제목 그대로 죽음을 기리는 행위를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건드리는 영역은 단순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선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사라져가는 가치와 신념,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함께 담아내고 있다. 신예 작가다운 대담함과 분명한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세 작품을 함께 놓고 바라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보인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애도를 이야기한다면, 「추도」는 애도가 일상과 노동 속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보여주고, 「히데오」는 정체성의 형성과 상실이라는 문제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결핍과 재구성을 그려낸다. 작품의 소재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거창한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과 정서를 섬세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같은 결을 공유한다.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단순히 유망한 신인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한국 문학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의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지도에 가깝다. 읽는 내내 쉽지만은 않았고 때로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바로 그런 낯섦이 현재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매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찾게 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익숙한 이야기 너머에서 오늘의 문학이 향하는 방향을 가장 생생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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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한국사 - 일생에 한번은 만나야 할 역사 인물 30
신동욱 지음 / 포르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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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서적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인 이상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른이 되고 40대가 된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다." (213쪽)


공자는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중심을 잡는 나이. 하지만 현실의 마흔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직장에서의 위기, 가족과의 관계, 노후에 대한 불안, 그리고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까지. 오히려 가장 많이 흔들리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신동욱의 『마흔에 읽은 한국사』는 바로 그 흔들리는 시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역사 교양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읽다 보면 ‘공부한다’는 느낌보다 인생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 역사 속 인물들의 선택과 실수를 통해 결국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연표나 사건 중심의 역사서가 아니다. 조선 시대의 왕과 신하, 선비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태도와 선택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인지의 이야기였다.


"신숙주는 잘 마시면서도 마시지 않는데, 나는 그러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70쪽)


자신의 절제하지 못한 행동으로 신뢰를 잃어가는 모습은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자기 인식’과 ‘자제력’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마흔이 넘어서도 실수는 계속된다. 다만 그 무게와 파장이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다.


"실수를 인정한다는 건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 같다." (213쪽)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처럼 오래 남는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둘러싼 무오사화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글 한 편이 원래 의도를 넘어 큰 파장을 낳았던 사례는, SNS는커녕 통신망도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83쪽)


수백 년 전의 사건이지만, 오늘날 SNS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무심코 쓴 글 하나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시대는 달라도 인간의 소통 방식과 그 위험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책은 ‘신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선택을 믿는 것과 같다." (179쪽)


공민왕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준다. 우리는 흔히 상대를 기준으로 신뢰를 판단하지만, 이 책은 그 기준을 ‘나의 선택’으로 옮긴다.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조차, 그 선택을 한 주체로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가장 짧지만 강하게 남은 문장도 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 자신을 높이는 것이고, 자존감은 그런 비교 없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87쪽)


서얼출신으로 판서의 자리에 오르는 반석평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이 차이는 단순하지만 깊다. 비교 속에서 유지되는 자존심과, 비교 없이도 유지되는 자존감.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역사를 왜 읽는가.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의 고민은 지금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 앞에서의 선택, 관계 속에서의 신뢰, 실수 이후의 태도 등 시대는 변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역사를 읽는 일’은 결국 나를 읽는 일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흔들리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누구에게나 의미 있게 다가올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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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장례식
조현선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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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으로는 대부분의 책을 서점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먼저 만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읽고도 계속 마음에 남는 책만 따로 구매한다. 무턱대고 책을 들이다 보면, 어느 순간 방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책이 되어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나름의 규칙이다. 하지만 이 규칙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소멸 예정 적립금’ 알림을 보는 날이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구매하게 된 책이 바로 조현선 작가의 『나의 완벽한 장례식』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장례식’이라는 제목에서 다소 감상적인 이야기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종합병원이다.

삶과 죽음이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장소. 우리는 일상에서 이 공간을 애써 외면하지만, 그 안에서는 매일 누군가의 끝과 누군가의 시작이 교차한다.

주인공 정나희는 병원 1층 매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스무 살 청춘이다. 타인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녀는 점점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사연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 작품의 핵심 설정은 ‘완벽한 장례식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이 설정이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제대로 된 작별’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히 ‘삶’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죽는 순간 마음을 꽉 잡고 있던 한 가지만 기억해. 죽음의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진짜 원하는 바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54쪽)


이 문장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을 압축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완벽한 장례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되짚는 일이며,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순히 눈물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되묻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지는 해야. 내게 남은 이 세상은 저 끄트머리만한 크기만 남았어. 하지만 해가 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냐. 다음 세상으로 넘어갈 차례지.” (97쪽)


이 문장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이동’으로 바라본다.


지는 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픔만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읽고 난 뒤에는 잔잔한 온기가 오래 남는다. 떠난 사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의 완벽한 장례식』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을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통해 나의 지금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로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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