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버트런드 러셀 지음, 최혁순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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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수학과 철학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인물이 있다. 천재적인 철학자로 알려진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인 버트런드 러셀이 바로 그이다. ‘내일의 죠’라는 만화의 명대사 ‘하얗게 불태웠어’라는 말로 압축되는 삶을 살다간 버트런드 러셀은 90회의 생일 기념 기사처럼 한 중 재도 남기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다 갔다. 그런 그의 삶의 정수를 뽑은 에세이가 바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이다.

 

 단순하긴 하지만 압도적으로 강렬한 세 가지 열망이 내 생애를 지배해왔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지식의 탐구, 그리고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열정이 마치 거센 바람처럼 제멋대로 나를 몰고 다니면서 번민의 깊은 바다를 이리저리 헤매게 했고 절망의 극한에까지 이르게 했다. (p. 11)

 

 제1부 자전적 성찰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의 탐구,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까지 어쩌면 학자가 가져야 할 모든 마음가짐을 가지고 삶을 살았던 그는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지식을 발견하고 싶은 열망으로 수학을 종교적 충동을 만족시켜줄 어떤 것을 찾고 싶은 열망으로 철학을 연구한다.

 

 수학적 성과와 철학적 견해보다 그가 살던 시대에 가장 큰 용기를 가져야 했던 일은 아마도 종교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때문에 그의 종교관에 관한 에세이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子)였다. 때문에 종교적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는 문제들을 스스로 숙고하여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이 보기에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스스로 선택해서 타인들의 지혜로부터 유익함을 얻으려 노력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현명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조차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살아온 그였기에 그의 글 곳곳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한 강연에서 그는 ‘좋은 세상은 두려움 없는 세계관과 자유로운 지성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세상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필요로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과거를 향해 시간을 거슬러 돌아보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가 그런 과거를 저 멀리 뛰어넘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p. 102)’라며 전쟁으로 황폐해져진 현실에서도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수학자, 철학자, 불가지론자 등 버트런드 러셀이 살아오면서 맡은 역할은 다양했지만 어떤 일을 하던 한계를 모르게 행동하는 지성으로 기억되고 있다. 인류 역사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시절을 살다 간 그였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이런 삶을 다시 한 번 살 것이라는 그의 말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삶에 대해 언급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다.

 

 개별적인 인간 존재는 강물과 같아야 한다. 처음에는 미약하다가 좁은 강둑을 따라 흐르게 되고, 때가되면 열정적으로 바위들을 지나 폭포 위로 돌진한다. 강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제방이 멀어지면 강물은 더욱 빠르게 흐르며, 마침내 눈에 띄는 휴식도 없이 바다와 합쳐지고 나면 아무런 고통 없이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를 잃어 버린다. 나이가 들었을 때 자기 삶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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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Ganesa 2013-12-02 23:33   좋아요 0 | URL
^^ 그렇죠?? 책을 읽는 내내 만화의 그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쨌든 러셀은 대단한 사람인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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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노벨문학상이 발표되고 나서 국내엔 조금 생소한 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작품이 뒤늦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책을 선택하는 기준에 상이란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찬 작가의 『펀치』도 제37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작품으로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타이틀에 눈이 먼저 간 것도 사실이다.

 

 ‘가족·학교·종교의 변태적 시스템에 초특급 메가 펀치를 날려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소설을 대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의외로 주인공은 고등학교 3학년의 여학생, 방인영이다. 질풍노도의 10대들이 흔히 그렇듯 다소 냉소적이고 반항적인 캐릭터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런 아이가 아닌 가족과 학교, 종교가 그렇게 만든 아이였다. 자신을 외모도 성적도 5등급이라고 소개하는 인영은 “나는 방 변호사의 경제적 후원과 엄마의 정신적 억압, 학교와 종교의 변태적 시스템에 속박돼 있다. (p. 13)”고 말하면서 아버지를 ‘방 변호사’라고 칭한다.

 

 머리는 좋으나 외모는 별로인 아버지의 외모와 머리는 별로지만 외모는 예쁜 엄마의 지능을 물려받은 열성유전자의 집합체인 인영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아버지, 어머니 등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다가서지 못해 힘들어 하다 결국은 우연히 고양이에게 해코지를 하는 한 공무원을 만나고 그에게 살인을 부탁한다. 자신이 기획한 ‘살인의 조감도’에 따라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살인을 말이다.

 

 학벌 지상주의, 외모 지상주의 등 우리 사회의 병폐를 일컫는 말이 많다. 게다가 사회는 1등만을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혀지는 일이 부지기수라 모두 1등이 되려고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1등만 되고 보자는 결과주의적 사고가 편법과 불법을 자행하게 되고, 또한 그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게 되면서 인영과 같은 괴물 아닌 괴물을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니가 살인자라 부모를 죽인 걸까? 아니면, 부모가 널 살인자로 만들 걸까?”라는 공무원의 물음이 자꾸만 기억에 남았다.

 

 『펀치』는 분명 가장 악질적이라는 존속살인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보기엔 불편한 점도 있지만, 작가의 직설적이고 경쾌한 문체는 그 불편함을 다소 덜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적으로 보이는 한 가정이 자녀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성공과 행복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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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말 - 사회를 깨우고 사람을 응원하는
루쉰 지음, 허유영 옮김 / 예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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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중국인 친구에게 물어본 결과 루쉰만큼 자국에서 후대의 평가가 갈리는 인물도 드물다고 한다. 그 친구는 루쉰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물론 한 친구의 의견이라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최근 몇 년 상이 중국 중학교 교과서에서 루쉰의 작품이 퇴출되고 베이징에 있는 루쉰의 고택에 대한 철거 계획이 발표되었다고 하니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하지만 싫고 좋고를 떠나 루쉰이 중국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의과대학을 중퇴하고 중국인의 정신을 고치기 위해 글을 선택했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에 글만큼 좋은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시간에 배운 ‘아Q정전’의 영향 때문인지 소설가로 알고 있었지만 소설은 많이 쓰지 않았고 잡문 등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이 『루쉰의 말』도 루쉰이 남긴 잡문, 서간 등에서 발췌한 글을 모은 것이다.

 

 의학도를 꿈꾸던 루쉰답게 그의 글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무덤>이라는 잡문집에서 발췌한 글에서는,

중국인들은 다양한 분야를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숨김과 기만으로

교모하게 도망칠 방도를 생각해 내면서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자부한다.

이 길 위에서

겁 많고 나약하며

나태하고 교활한 국민성이 증명된다.

날마다 만족하고

날마다 타락하면서

마다 영광스러움을 느낀다. (p. 145) 며 자국민에게도 서슴지 않고 독이 서린 말을 내 뱉는다.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나 삶을 보듬어주는 글보다도 이런 직설적이 글이 혼란스러운 당시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길지 않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여운은 길게 남는 글들이 많았다. 루쉰이 살던 당시나 지금의 현실이나 위기라는 점에서 비슷해서 그런 것 같았다. 특히 잡문집 <무덤>에 실린 글들이 특히 그러 했는데, 

자유는 물론 돈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돈에 팔릴 수는 있다. (p. 20) 는 단 두 줄에 불과하지만 한동안 멍하게 만들었었다.

 

 2009년 1월 US Airways 항공이 허드슨 강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기존 언론의 속도를 넘어서는 위력을 보임으로써 유명세를 탄 것이 있으니 바로 트위터이다. 실시간으로 멘션을 전송할 수 있지만 글자수가 제한되어 있기에 트위터는 글을 잘 압축(?)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처럼 짧은 글로써 이처럼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루쉰은 한 세기를 먼저 살다간 최고의 트위터리안같았다. 아니 중국인이니 웨이보리안이라고 해야 하나?^^

 

 단숨에 읽기보다 나태해지거나 따끔한 가르침이 필요할 때마다 가끔씩 꺼내 호되게 혼날 요량으로 보면 딱 좋은 『루쉰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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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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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자신의 삶을 만족하고 살지만, 가끔은 다른 이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충동도 느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배우들의 인터뷰는 공감이 간다. 하지만 연극이나 무대가 아니라 인생을 그것도 자신의 원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나 다른 외부적인 이유 때문에 다른 이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서글픈 일일 것이다.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여행사 ‘정글’의 수석 프로그래머 고요나는 10년이 넘게 재난을 찾아다니고 상품화한 베테랑이다. 하지만 상사의 옐로카드성 성추행으로 회사생활의 위기를 느끼고 던진 사직서 대신 한 달 짜리 휴가를 얻는다. 대신 휴가를 다녀와서 보고서를 쓰는 식으로 일종의 출장 겸 휴가를 말이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가장 비싼 요금의 무이의 ‘사막의 싱크홀’이라는 상품이었다. 그곳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생겨 3주간 무이의 재난상품을 짜는 일을 떠맡게 되면서 요나에게 찾아오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삶에 지칠 때 여행을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던지 아니면 여행을 통해 삶이 지혜나 견문을 넓힌다던지 여행에 대해서는 통상 이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밤의 여행자들』에서는 독특한 여행이 나온다. 바로 재난 여행인데,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자리, 쓰나미가 할퀸 자국, 대홍수 등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 여행의 주요 코스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내가며 그런 것을 볼까라고 생각했지만, 작가는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을,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는 이기적인 위안을 얻는 것으로 재난 여행을 설명하고 있다.

 

 요나가 간 무이도 재난여행으로 싱크홀과 더불어 부족들이 서로 죽고죽임을 당한 과거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서 불의의 사고로 제대로 여행을 마치지 못한 요나는 정글의 직원인 것이 알려져 무이에 관한 새로운 상품개발을 부탁받고 무이에 일상적인 삶을 목격하게 된다. 거대회사 폴이 점령하고 있는 화려하지만 서글픈 무이의 진짜 모습을...

 

 그들의 음모가 위기에 처하는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과거형이 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반듯해지고 용감해진다. 그러나 현재형 재난 앞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것이 재난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색해도 방관하거나, 인식하면서도 조장한다. (p. 175)”

어쩌면 나도 현재형 재난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건 아닌지 참으로 섬뜩해지는 문장이었다.

 

 언젠가 아프리카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전통을 고수하는 어느 부족의 가장 큰 수입은 사냥도 채집도 아닌 관광객들에게 그들의 삶을 재연해 보여주는 관광 수입이라는 대목을 본 적이 있다. 족장을 비롯해 많은 부족인 들이 움집을 무대로 사냥을 재연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는 관광객과 더불어 보여주는 그들의 현실을 나타낸 다큐멘터리였는데, 그 모습이 무이의 운다족, 카누족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고 나서는 김조광과 같은 상사에 대한 분노, 요나와 럭의 애틋함, 무이의 관광 상품을 제조하려는 그들의 음모에 대한 섬뜩함, 그 음모 속에서 살아남은 ‘악어’들 안도보다도 무이의 전통 부족의 연기를 했고, 관광지 조성을 위해 죽음을 담보로 한 연기를 하기로 한 그들의 삶에 대한 서글픔이 먼저 드는 이유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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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 - 禪詩, 깨달음을 노래한 명상의 시, 개정신판
석지현 엮음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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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어릴 적부터 시는 너무 어려운 문학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인이란 작가들은 내가 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계에서 온 사람들로 보였고, 그러한 악순환으로 시는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고 주로 소설을 보면서 가끔씩 철학서도 들춰보지만, 시집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만큼 시는 나에게는 넘사벽(?)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시(詩)도 시지만, 여기에 선(禪)이 덧붙었다. 선시(禪詩), 제목만 보아도 막연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깨달음을 노래한 명상의 시편들’이란 부제에는 흥미가 인다. 깨달음, 아직까지 미련한 중생에 불과하지만 깨달음을 얻기만 한다면 온갖 번뇌를 떨쳐버리고 자유롭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

 

 사실 선시란 말은 예부터 전해져오는 장르는 아니라고 한다. 1975년 『선시(禪詩)』가 출간된 38년 전부터 쓰였다고 하니, 오래전부터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시들을 모아 선시라는 장르가 탄생한 것은 반세기도 안 되는 셈이다. 하지만 선시로 분류된 시들은 중국 당나라시대의 시를 비롯해서 신라, 중세 일본의 시까지 그 역사가 역사시대와 그 괘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구하였다.

 

 선시를 엮고 옮긴 석지현 선생은 친철하게도 먼저 조금은 생소한 선시의 설명부터 시작하고 있다.

 

 선은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언어에 뒤따르는 사고작용마저 선은 용납하지 않는다. 대신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의 직관적인 깨달음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 선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선을, 그 깨달음을 제삼자에게 알리자면 여하튼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야 한다. … 그들은 자칫하면 저 관념의 바다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그 깨달음의 섬세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시를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첫 번째 선시의 출현이다. (p. 23)

 

 이어서 중국, 한국, 일본의 선시의 역사 및 시풍에 대해 간략하게에 설명을 하고는 본격적으로 선시로 이어진다. 부끄럽게도 시를 이해할 만큼의 소양도 선을 논할 만큼의 수행도 쌓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중생이라서 선시 원문에서는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적었다. 하지만 한글세대를 위한 독음과 해설은 선시를 조금이나마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한가지 눈에 띄는 부분은 석지현 선생의 날카로운 해설이다. 촌철살인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예를 들면 3구와 4구의 절묘한 대칭, 마지막 한자가 그저 그런 시를 명시로 만들고 있다, 많은 선시를 남겼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없다는 등의 직설적인 해설이 한 수 한 수마다 실려 있어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거듭 말하고 있지만 아직 선시를 이해할 만한 소양이 없기 때문에 시에 대해서는 뭐라고 쓰기가 어렵다. 하지만 사찰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떠 올리는 구절이 있는 선시도 있는가 하면, 달과 구름이 어우러진 산사의 밤을 느낄 수 있는 선시도 있었다. 그중에서 선승의 방을 찾아가 읊었다는 당나라의 시인 왕창령의 시가 가장 인상 깊었다.

 

승방 - 왕창령

종려나무 꽃 뜰에 가득하고

이끼는 한가로운 방으로 드네

피차가 서로 말이 없나니

공중에는 천상의 향이 흐르네. (p.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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