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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중인 나의 왕
아르노 가이거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1.
“처음 이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고통스럽고 기운 빠지는 일로만 여겨졌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님이 강인하고 삶이 무엇을 요구하든 의연하게 버틸 거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이 새로운 역할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치매 환자의 삶을 새로운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p.13)"
인생에서 되풀이되는 건 오로지
실수뿐이라는 100퍼센트 공감할 수 있는 러시아 속담으로 시작하는 『유배중인 나의 왕』은 조금은 생소할 수도 있는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노 가이거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에 대해서 쓴 자전적인 에세이이다. 발병초기에 증상에 대해 그냥 아버지의 괴팍한 성격 탓으로 돌린 것을 속상해 하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한 초반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간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긴 병에 효자없다는 말도 있듯이,
더군다나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읽어버리는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어린 시절, 삶의 첫 롤 모델인
부모님이 서서히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에 작가는 아버지가 내 세계로
건너올 수 없느니 내가 아버지에게로 건너가야 한다며 아버지만의 셰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아버지와의 갈등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방법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가이거의 아들
아르노는 말한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더 활짝 열게 만든 뭔가가. 그것은 말하자면
보통 알츠하이머병의 단점이라고들 하는 것. 즉 관계 단절의 반대다. 때로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무산되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되었다. (p.
204)"고…….
발병초기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분통도 터트리고, 병을 이겨보려고 저항도 해보면서 아버지를 구해보려 하지만 알츠하이머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시금 정립되며 비로소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2.
“인간이 불멸의 존재라면 반성도 덜 할 것이다. 반성을 덜 하면 삶도
덜 아름다울
것이다. … 인간은 이토록 삶에 집착하지만, 충분한 삶의 질을 더 이상 제공받지 못한다고 깨닫게 되면 어느 순간 죽음이 더디게 찾아오는 듯
여겨진다. (p. 208~209)"
진부한 명제이긴 하지만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이처럼 치열하고 열심히 살수 있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참인 것만 같다. 수명이 2배 늘어나면 삶도 2배 느슨해질 것 같고, 5배
늘어나면 5배만큼 허송세월을 보낼 것만 같은 것이 우리네 삶이니 말이다. (어차피 우리 시대에는 수명이 2배 늘어날 것 같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다^^)
반성과 삶의 질은 언뜻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하나 저자가 말했듯, 반성을 덜 하면 삶이 덜 아름다우니 삶의 질도 떨어질 것이다. 하물며 논어에도 증자는 하루에도 세 번씩 반성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반대로 인간은 반드시 사라질 수밖에 없으므로 반성을 통하여 하루하루를 더욱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형기 시인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했나 보다.
3.
저자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가이거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는 아직 근본적인 치료방법이 개발 되어 있지 않다. 치료법이 없는 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 과정을 그린 것 때문인지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와 한 화요일』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매우 서서히 발병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직까지는 지켜보는 것 밖에는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비슷하지만, 『유배중인 나의 왕』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가이거의
알츠하이머는 머리로, 『모리와 함께와 한 화요일』 미치 앨봄의 선생님 모리 슈워츠에게 찾아온 루게릭은 근육으로 찾아온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을 좀 더 이해하는 것으로, 은사에게 삶의 지혜를 배우는 것으로 그들을 기억하려고 하고 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삶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우구스트 가이거와 삶의 활동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루게릭 병에 걸린 모리 슈워츠 중 누가 더 불행했을까?
아니면 자신을 기억해 주는 아들과 제자가 있었기에 자신들의 병을 담담히 받아들여
편안했을까?
4.
“별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게 때로 홀가분한 느낌을 준다. 나는 상상해본다. 그건 아무리 가까운 마을도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시베리아 작은 역에서의 기다림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역에 앉아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다. 언젠가 틀림없이 기차는
온다. 언젠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틀림없이. (p.
215)"
알츠하이머는 되돌아오는 길이 없는
일방통행과 같은 병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서는 누구나 저자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틀림없이 기차가 오듯이 무슨
일이 일어 날 것이다.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저자는 아버지의 알츠하이머를
겪고 말했지만, 그의 말과 같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가족들 특히 부모님의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일찍,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