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가면의 룰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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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나는 밝고 경쾌한 내용보다 어둡고 무거운 내용의 책을 더 자주 읽는 듯 하다. 묘하게도 밝고 경쾌한 내용의 책을 읽으면 책의 내용과 내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어두움이 대비가 되면서 주인공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자신을 혐오하게 되지만, 어둡고 무거운 내용의 책을 읽으면 이 지독한 상황들이 실제가 아니라 다행이다, 그래도 내 삶이 이보다는 낫지 않은가 정도의 생각을 하며, 일종의 안도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에 읽은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악과 가면의 룰(원제 悪と仮面のルール)> 역시, 표지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느낌부터가 어둡고 깊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일종의 심연(Abyss)을 생각하게 한다.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노마문예상, 아쿠타가와상, 오에 겐자부로상 등 일본 문단에서 멋지게 활약하고 있는 젊은 작가로, <흙 속의 아이>,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쓰리> 등의 작품을 썼다. 

한국 문단도 슬슬 그런 경향이 보이고 있지만, 일본 문단은 이미 한참 전부터 순문학과 대중문학(혹은 장르문학)의 경계가 사라져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 작가가 순문학적인 소설과 장르문학적인 소설을 모두 쓰기도 하고, 한 작품 안에 순문학적 특성과 장르문학적 특성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종종 보기도 한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얼마 전 출간된 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원제 月と蟹)가 후자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악과 가면의 룰>역시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요소들이 얽혀 있고, 이 책에서 꽤 큰 전환점이 되었던 주인공의 친부 살해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혹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에서 비롯된 모티브로 볼 수 있지만, 군수산업이나 컬트 교단 등의 등장과 정체불명의 테러 집단, 주인공이 어떤 사건의 범인이라 의심하며 집요하게 쫓는 형사 등 서스펜스적인 요소가 꽤 많이 도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이것은 순문학이다, 이것은 장르문학이다 하고 칼로 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두 세계를 모아 작품 안에 녹여낸 작가의 역량이 훌륭하게 생각된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군수산업으로 재벌이 된 가문에서 태어난 주인공 '구키 후미히로'는 여러 가지로 일반 가정과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그가 11살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이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인 '사(邪)'의 계보를 잇기 위해 계획적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서, 그에게 14살이 되면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도구로 아동보호시설의 여자아이 한 명을 선택해 양녀로 들이고 '구키 가오리'라는 이름을 준다. 아마 그것은 '사(邪)'가 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13살이 된 후미히로는 점점 가오리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생각하게 되고, 14살이 되기 몇 달 전, 아버지가 가오리를 겁탈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자신이 아버지가 미리 예비해 둔 지옥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절망한다. 이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이 사랑하는 가오리를 지키기 위해 그 지독한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 아버지를 죽인다.  

그렇게 아버지를 죽인 후, 스스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후미히로는 몇 년 후, 자신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기 위해 타인의 얼굴로 성형하고 그의 신분을 얻어 인생의 방관자처럼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낸다. 그러면서 사설탐정을 고용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가오리의 조사를 의뢰한다. 한편 그가 얼굴과 신분을 얻어 변신한 '신타니 고이치'라는 사람이 어떤 교통사고 사망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형사가 있고, 설상가상으로 구키 가의 방계 자손 중 역시 '사(邪)'의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일종의 테러집단을 만들면서 후미히로에게도 합류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더 이상 그런 음습하고 어두운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얼굴과 신분까지 바꿨는데, 삶은 전혀 평온해지지 못하고, 오히려 앞으로는 더욱 가혹해져 갈 뿐이다. 한편 탐정의 조사 결과 가오리에게 마치 과거의 반복인 듯 거대한 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미히로는 그녀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 가오리는 후미히코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는 가오리의 주변에는, 사기꾼 같은 남자들만 득실거리고 있다. 구키 가의 양녀였기 때문에 상당한 금액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어디서 새어 나왔는지도 모르는 소문 때문이다. 이런 사기꾼 같은 자들은 마약 같은 것을 사용해서 중독자가 되게 하고 그 뒤로 계속해서 돈을 뜯어낸다는 것을 알고, 후미히코는 가오리에게 자꾸 접근하려고 하는 사기꾼 야지마를, 각성제에 청산가리를 섞어서 살해한다. 게다가,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각종 사건의 배후에 있는, 구키 가의 방계 자손들의 테러조직 JL에서는 활동자금을 변통하기 위해 계속 그의 돈을 요구한다. 당신들 대체 뭐냐는 후미히로의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다양한 가치를 뒤흔드는 거야. 권위나 상하 관계, 공통 인식 따위를. 사회구조 같은 건 우리하고는 상관없어. 혁명이니 뭐니, 촌스럽지. 우리의 목표는 인간의 집단의식이야. 그 속에 차례차례 경박한 농담을 던져줄 거야."(p.210 중 발췌)  

한편 탐정은 가오리를 조사하던 사람의 정체를 밝혀낸다. 군수 산업의 거물이며 구키 쇼조의 둘째 아들인 구키 미키히코, 즉 후미히로의 둘째 형이었다. 구키 가 주변에 맴도는 이 어두운 분위기...직계, 방계, 심지어는 혈연이 섞여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가계에 내려져오는 '사(邪)', 곧 세계에 어둠과 혼란, 파괴를 몰고 올 운명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구키 미키히코가 보낸 차를 타고 간 빌딩에서, 그는 둘째 형을 만나고 구키 가의 배경, 사(邪)의 유래, 왜 그가 가오리의 뒷조사를 하는지 등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은 구키 가오리를 마약중독자가 되게 하여 망가뜨리고 소유하고 싶다고, 그렇지 않으려면 네 자신이 가오리를 마약중독자로 만들어서 데려오라고 미키히코는 말한다. 가오리에게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그 여자를 손상시키고 싶지? 그 여자를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리고 싶지? 너는 구키 가 사람이야. 나는 알아. (중략) 너의 무의식은 최대의 악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어. 그건 네가 이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야. 바로 가오리지. (중략) 모든 건 그 한 순간을 위한 것이지. 욕망과 비통과 절망이 한꺼번에 겹쳐진, 평범한 인생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그 섬광 같은 암흑의 폭발을, 너는 온몸을 던져 애타게 기다리는 거야. 그때 너는 압도적인 쾌락으로 부르르 떨겠지. 이 세계와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모멸한 환희와 함께."(p.247~8 중 발췌) 이 책에서 가장 압도적인 악과 어둠이 응축(凝縮)되어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후미히로는 가오리가 일하는 클럽에 손님으로 가장하고 가서, 가오리를 만나지만 그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가오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테러집단 JL에서 며칠간 맡아달라고 한 시한폭탄장치를 들고, 후미히로는 다시 미키히로를 만나러 가고, 어서 그 여자를 손상시키고 이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서, 내 영역으로 건너오라고 미키히로는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 영역'이라는 것은, 완전히 사(邪)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서, 나 같은 거대한 악을 소멸시킨 것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흥분에 휩싸인 미키히로는 그에게 나이프를 쥐어 준다. 후미히로는 거절하고, 지금까지의 대화를 모두 녹음한 것과 미키히로가 지금까지 저지른 살인, 부정한 거래, 밀담 등에 대한 증거들을 꺼낸다. 그리고 나서 JL에서 맡아달라고 했던 폭탄의 스위치를 켜고, 당신이 살고 싶다면 이 스위치의 버튼을 삼십 분 안에 꺼버리면 된다고 말한다. 목숨을 아까워하는 감각을 느끼라고,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리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난다. 

구키 미키히로가 죽음 쪽을 선택했고, JL의 도주 중인 멤버도 사체로 발견되었고, 이제 더 이상 가오리에게 위험할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인 가오리를 그의 가혹한 운명 안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기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만, 슬프고 괴롭지만 아주 먼 데서 그녀의 행복만을 바라고 살기로 한 것이다. 어딘가로 멀리 떠날 것을 계획한 후미히로는 예전에 종종 만나서 친밀해진 여자친구 교코와 함께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는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은 처음이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좋을까...하며 그의 지극히 어둡고 또 가혹했던 지난 날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비행기가 상승하며 보이는 창 밑의 도시들을 바라보며, 저곳에도 무수한 인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간 후 강렬한 햇빛과 마주치게 된 것은 작중 화자 후미히로의 '재생'을 암시하는 부분이 아닐까. 그가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간극에 무한히 매달려 있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내려진 벌이라고 한다면 이는 충분히 무서운 책이라는, 아사히(朝日) 신문의 서평이 굉장히 와닿는다.  

결국 후미히로 그는, 머나먼 곳에서 그가 바라던 행복과 평온함을 찾을 수 있을까. 구키 가, '사(邪)' 등과 완전하게 모든 인연을 끊고 관련된 사실을 모두 잊어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평생을 그러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을 끌어안은 채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지는 암시적 표현처럼, 나는 그가 그렇게도 원했을 행복과 사랑, 평온함을 얻게 되기를, 시간이 그를 치유해 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또는 얼마 전에 읽었던 마리오 사비누의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와도 어쩌면 능히 비견할만한 압도적인 서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등장 인물들의 대화 부분에서 그런 것들이 많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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