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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노나미 아사 지음, 이춘신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경찰서의 취조실, 어두컴컴한 방에 스탠드가 켜져 있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 형사와 피의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예전과 달리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가혹행위 같은 것은 거의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취조를 당하는 피의자는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느낄 것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며 순순히 자백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으려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형사들 역시 항상 흉악범들과 대면해야 하니 대부분 냉혹하고 무서운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나미 아사의 소설 <자백>은, 의외로 굉장히 인간적이고 정이 넘치는 형사 도몬 고타로를 등장시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이 책에 등장하는 4개의 단편들은 의외로 평범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추리소설들에 수반되는 클라이막스의 긴장감이나 기발한 트릭 역시 찾아볼 수 없다. 범인 역시 금방 잡혀 버린다. 하지만 쇼와 40년(1965년)부터 60년(1985년)까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아날로그적 감성과 형사 도몬의 인간적인 모습은 우리를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세상으로 안내해 준다. 돈을 차지하기 위해서 젊은 남자에게 남편의 살해를 의뢰하는 중년 부인의 이야기인 <낡은 부채>는 훌리오가 도쿄에 올라왔을 때 느꼈던 외로움과 좌절감, 그리고 그가 하치오지에서 따뜻한 분위기와 마음의 여유를 느끼고 다른 삶을 생각하는 모습이항상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왔던 내게 상당히 와닿았다. 지금도 하치오지는 그러한 따뜻한 분위기를 갖고 있을까. 또한 남편을 죽인 도쿠코의 첫인상에서 뭔가에 찌들고 낡은 시부우치와(渋団扇 : 주로 부엌 등에서 쓰는, 막 쓰는 부채)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도몬의 사람 보는 눈이 꽤 정확하다.
이주 노동자의 슬픔이 묻어나는 <돈부리 수사>에서는, 도몬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형사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장면으로, 일본이 아직 가난해서 먹을 것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많았던 시절에 형사들이 취조하면서 돈부리를 시켜 주면 완고했던 피의자들의 마음이 풀어져서 자백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낯선 파키스탄 출신의 피의자를 배려해 매일 다섯번 메카를 향해 예배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카레를 만들어 주는 모습은, 상당히 감동적이다. 내가 피의자였더라도, 자백하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따뜻함이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에서는 형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신참 도몬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상습절도범 부부를 추적하면서 잠복하고 있다가 배가 고파서 남의 집 배를 몰래 따먹고, 세제로 이를 닦고 머리를 감는 모습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아메리카 연못>에서는 피의자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그의 가족들까지 배려해주며 세상을 떠난 피해자의 마음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도몬의 배려가 참 든든하다. 결국 구치소에 있는 피의자에게 감사 편지를 받을 정도니 정말이지 대인배다. 이런 형사들만 있다면 범죄자들도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다시 안좋은 길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사건들의 배경이 7~80년대다 보니 아날로그적인 배경에서 따뜻함과 일종의 향수를 느낄 수 있고 도쿄 디즈니랜드 개장, 호텔 뉴재팬의 대형 화재, 적군파에 의한 JAL 항공기 납치 사건 등 그 당시의 일들이 잠깐씩 언급되는 부분 역시 흥미롭다. 그러한 부분들을 보면 이 사건의 배경이 현재가 아니라 한참 전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또한 피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하지 않고, 그에게 묻고 들어주는 과정에서 신뢰를 쌓아 그가 스스로 자백하도록 하는 도몬 형사의 취조 방식은 정말 인간적이다. 그는 동료 형사들에 대한 정 역시 깊으며, 가정에서도 딸들과 아내에게 더없이 따뜻한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다. 추리소설을 기대했다면 좀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어떤 평범한 형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로는 꽤 훌륭하다. 읽으면서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