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베로니크 오발데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3월
평점 :
평소에는 주로 일본, 한국문학을 즐겨 읽었지만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프랑스의 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기고 있다. 읽으면서 이 문장은 프랑스어 원문이 대략 이럴 것이고, 이 표현은 원문에서 이런 표현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것이 꽤 재미있다. 그러던 중 읽게 된 베로니크 오발데의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원제 Et mon coeur transparent)>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꽤 기묘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베로니크 오발데는 프랑스의 작가로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으로 퀼튀르-텔레라마 상을 받았고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뮤진트리에서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요즘에 하나씩 번역 출간하고 있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은 '오늘 밤 랜슬롯의 아내가 죽었다.(La femme de Lancelot est morte cette nuit.)'라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랜슬롯이 경찰로부터 아내의 죽음을 전해듣는 장면이 이 책의 첫번째 장이다. 랜슬롯은 누구이며, 그의 아내는 왜 죽었는가? 이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미스테리가 된다. 주인공 랜슬롯 루빈슈타인은 길을 걷다 우연한 계기로 이리나를 만난 후 19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오던 아내와 그야말로 '단번에' 이혼하고 그와 결혼한다. 그리고 나서 3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는 이리나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이리나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새로운 사실들에 부딪치게 된다.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는 꽤 동화적이고 마술적이다. 배경이 되는 추운 카타노와 따뜻한 카메론은 둘 다 가상의 공간이다(지명들이 낯설어서 찾아봤으나 그러한 나라 혹은 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의 눈 언덕과 녹나무, 플라타너스들은 실재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 아우라를 내뿜고, 주인공이 들르는 초록빛 어항의 카페 역시 그러한 초현실적 분위기를 갖고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르는 계단은 환상의 세계와 연결된다. 또한 주인공의 집에 있던 노구치 테이블과 페리앙 책꽂이는 실재하는 물건이면서도 주인공과 함께 은밀한 차원으로 곤두박질친다. 집에 있던 서랍장이 갑자기 사라지고 우산대가 종적을 감추는 지극히 마술적인 일들이 이 작품 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이는 일종의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 랜슬롯 역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랜슬롯 루빈슈타인이 신비하고도 매혹적인 이리나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켈트의 아서왕 전설에 등장하는 충직한 기사 랜슬롯이 왕비 기네비어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 역시 마리 마리, 파코 피카소, 트랄랄라, 미니막스 등 참으로 기묘한 이름들을 갖고 있다. 이리나는 랜슬롯과의 첫 만남 때 그의 이름을 듣고 웃으며 "이제부터 나는 당신을 폴이라고 부르겠어요(Je t'appellerai Paul)."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랜슬롯은 "이제부터 내 이름은 폴이야."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주인공이 아내의 죽음을 통해 랜슬롯에서 폴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폴이라는 이름은, 이 작품에 영감을 제공한 시를 쓴 폴 베를렌(Paul Verlain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며, 최근의 프랑스 작가들의 경향이 이런 것인지, 혹은 베로니크 오발데만의 특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문체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또한 괄호 안의 부연설명이 너무 자주 등장하다 보니 산만한 느낌이 들고 서술과 대화, 주인공의 생각이 아무런 구분 없이 뒤엉켜 있는 느낌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다. 결코 어려운 글은 아니지만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빠르게 읽어서는 이해하기 힘들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장을 현재시제로 쓴 것과 이 작품 전체에 감돌고 있는 몽환적이고 마술적인 분위기는 꽤 마음에 든다. 이래저래 호불호가 꽤 갈릴 듯한 작품이다.
Je fais souvent ce reve etrange et penetrant
나는 종종 이런 기묘하고 강렬한 꿈을 꾼다
D'une femme inconnue, et que j'aime, et qui m'aime,
미지의 한 여인에 대한 꿈을.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Et qui n'est, chaque fois, ni tout a fait la meme
그녀는 매번 똑같은 사람도 아니고,
Ni tout a fait une autre, et m'aime et me comprend.
전혀 다른 인물도 아니다, 다만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이해해줄 뿐.
Car elle me comprend, et mon coeur, transparent
그녀가 나를 이해해주므로, 내 투명한 마음은
Pour elle seule, helas ! cesse d'etre un probleme
오직 그녀만을 위하여, 고민을 벗어던진다
Pour elle seule, et les moiteurs de mon front bleme,
오직 그녀만을 위하여, 내 축축한 이마는 창백해진다,
Elle seule les sait rafraichir, en pleurant.
오직 그녀만이 눈물로써 내 마음과 이마를 식혀줄 수 있으리라.
- 폴 베를렌, <내 익숙한 꿈 Mon reve familier> 중에서(프랑스어 알파벳의 accent aigu, accent grave 등의 표기가 깨져 나와서 부득이하게 일반 알파벳으로 대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