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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경제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금의 자유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확실하게 느끼고 있다. 몇십년 전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며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지구상에는 극심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고, 노동시간은 길어졌으며 고용 안정성은 떨어졌다. 또한 선진국들은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제3세계 국가들의 성장을 결과적으로 저해하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선진국들의 성장과정을 고찰함으로써 현재의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는 이러한 자유시장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23가지 주제로 정리해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있었던 것들을 바로잡고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는 경제주체의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를 최대의 가치로 보장하는 체제이다. 하지만 현실에는 그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치적, 도덕적, 법적 규제가 있기 때문에(아동 노동을 규제하거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한하는 것, 최저임금을 책정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객관적이고 순수한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동시에 우리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전부 옳은 것만은 아님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만약 그러한 전제들이 모두 옳다면, 왜 최고 경영진과 은행가들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동안 평범한 사람들의 임금은 오르지 않고 고용은 불안정해지는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들이 확고한 증거와 제대로 된 논리에 근거한 것들인지를 따져 봐야 된다.
23가지 주제 중에 특히 인상깊었던 부분들이 있다. 먼저 저자는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변화 중 가장 혁신적인 것은 인터넷보다도 가전제품으로, 집안일에 소비되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됨으로써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가정부와 같은 직업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세탁기가 도입된 이후 같은 양의 빨래를 세탁하는 시간이 거의 1/6으로 단축되었고 수도시설의 도입으로 더 이상 물을 긷지 않을 수 있었다. 아직도 제3세계의 일부 국가에서는 물을 긷는 데에 하루 평균 2시간을 소비한다고 하니, 수도가 절약해 준 시간은 엄청난 것이다. 물론 인터넷이 우리의 삶을 굉장히 많이 바꾸어 놓기는 했지만, 생산성에는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을 도울 때 컴퓨터를 마련해 주고 인터넷 센터를 세우는 것보다는 안전한 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우물을 파 주고 전기를 넣어 주며 세탁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더 보탬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을에 컴퓨터 한 대 놓아주는 것보다 우물을 하나 파 주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파이를 지금 나눠주기보다는 파이의 크기를 더 키운 다음에 나눠줘야 한다는, 분배보다는 성장을 우선하는 체제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이것이 트리클다운(Trickle Down) 이론인데, 이러한 부자들에게 유리한 소득 재분배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하거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냥 시장에 맡겨 두면 상류층의 부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정도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득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로빈곤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복지 지출을 늘리는 방식 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재분배한다면, 노동자들은 추가 소득을 자신의 교육이나 건강에 더 투자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노동 생산성과 경제 성장이 촉진되어 국민들의 전체적인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꽤 의외였던 것은, 교육 수준이 높다고 그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선진국 국민들의 대다수는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고 있고, 제3세계 빈국의 국민들은 그보다 평균 교육 기간이 훨씬 짧다. 또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일본, 한국, 홍콩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교육 수준은 양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우수해서 항상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지만, 이 상식에 반하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우선 모든 교육이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문학이나 철학, 어학을 배운다고 해서 생산성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수학이나 물리 같은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생산성 향상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과목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지식과 교양을 쌓을 수 있게 하므로 꼭 필요하다. 또한 경제가 발전하고 고등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선진국에서는 학력 인플레이션이 심해졌지만 이러한 대학 교육의 절반 정도는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인 '분류' 과정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나친 교육열보다는 제대로 된 제도와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진정으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확실히 그렇다. 2~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지금과 같이 높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9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고, 이로 인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재화를 낭비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 역시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기회의 균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회의 균등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 아이들은 무상교육이 제공되더라도 학업 성적이 저조한 경우가 많다. 식사를 걸러서 배가 고파서 공부에 집중하기도 힘들고, 어린 시절의 영양결핍으로 인해 몸도 약하고 병에도 잘 걸려서 결석도 잦을 수 있다. 또한 교육 수준이 낮거나 오랜시간 일하는 부모가 아이 공부를 봐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니다. 그러므로 공정한 기회 비슷한 것이라도 확보해 주려면 그 가정의 소득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페루의 가난한 마을의 소년이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런 사람이 한 명 있다면 고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페루 아이들은 수백만 명에 달한다. 공산주의에서처럼 지나치게 결과를 균등하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롭지만, 최소한의 교육과 의료 혜택 등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아주 속이 후련한 부분이었다. 단적인 예로, 서울대 신입생 중 외고, 강남권 출신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반면 가난한 집 자녀들은 위험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리고 모 반도체 회사의 경우처럼 꽃다운 나이에 유해물질로 인한 백혈병으로 사망하기도 한다. 이 지독한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의 성장 실패는 다른 요인들보다도 선진국에서 강요한 자유 시장 정책이 주된 원인이고, 탈산업화는 신화에 불과하므로제조업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고,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가 바람직하며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는 것 등의, 지금까지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말해 주지 않은 여러 가지 중요한 진실들을 이 책에서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쉽지 않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지만 자상한 설명 덕분에 경제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추지 않아도 이해하는데 그다지 무리가 없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이제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씌워 놓은 장밋빛 색안경을 벗고, 빈곤과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정당한 몫을 분배할 때가 왔다. '이제 불편해질 때가 왔다.'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상당히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