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릴 적, 한동안 공상 과학 소설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중략).
하지만 스푸트니크가 우리 세대의 관심을 공상 과학물에서 떼어놓기 전 우리는 ‘자동화‘라고 불리는 무언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해왔었다. 머지않아 자동화가 지능이 필요 없는 일터를 장악하게 될 거라고 했다.  - P79

나는 아직도 일본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치과의 엑스선 촬영기계처럼 생긴 로봇이 분주히 움직이며 용접하는 뉴스 영상을 처음 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자동화였다.  - P80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육체 노동자들은 자동화의 영향에 무뎌져갔다. 요즘 공장 노동자들은 회사가 싼 노동력과 관대한 환경법을 찾아 아시아 등지로 이동할 때만 산발적으로 파업을 벌인다. - P80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된 후로는 중간관리직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 물론 그 단계에 약간의 인력이 필요하긴 하다. 컴퓨터를 다루고, 특정 작업을 맡아 처리해줄 사람들. 하지만 수백, 수천 명의 관리자는 너무 많다.
나 같은 사람들. - P81

서랍에서 꺼낸 이력서 여섯 통의 주인들도 내 경쟁자다. 이 뚜렷한 변화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 중간 관리직을 맡고 있는모든 이가 내 경쟁자가 된 것이다. 이제 곧 굶주린 수백만 개의 얼굴들이 몰려들 것이다. 학력 좋은 중년의 중산층 사람들.
홍수가 나기 전에 내 자리를 확고히 지키는 수밖에 없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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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고속도로의 통행료는 꽤 부담스럽다. - P85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이 없다. (중략). 다인스가 보란 듯이 베트남참전 경력을 이력서에 적어놓았다는 사실이 거슬린다. 그래서 어쩌라고? 25년이나 지나서 무슨 보상이라도 받아내겠다는 거야? 그게 무슨 특별한 참작 사항이라도 돼? - P85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특별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진행자는 ‘과도적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철도 시설에 대한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도적 기술은 쉽고 상식적인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쓰이던 성가신 기술이다. 미봉책 치고는 개발에 들인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엄청난 것으로 이를테면 철도 교량, 운하 등.
하지만 모든 것이 과도적 기술이다.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닫기 시작한다. - P87

이 동네 집들은 독립형 차고를 하나씩 갖추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집의 옆이나 뒤편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 날씨 탓에 집과 차고를 이어주는 통로를 만들어 놓은 곳도 간간이 목격된다.
264번지의 차고는 통로 없는 독립형 차고다. - P89

말. 과도적 기술.
나는 264번지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지점에 차를 세워놓고 있다. 바로옆에는 매물로 나온 집이 우뚝 서 있다. 앞뜰 잔디에는 ‘매물‘ 표지판이 박혀 있고, 창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지 않다. 오늘은 집을 보러 온 연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의 누군가가 블라인드 뒤에 숨어 의심에 찬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 P91

내가 기름을 넣고, 공중전화를 썼던 주유소는 8번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주유소의 대각선 맞은편에는 식당이 하나 서 있다. 
(중략). 그는 여전히 신중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목적지는 있지만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 (중략).
. 나는 교차로의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춰 세운다. - P94

4시 50분. 그가 안으로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안에 여자 친구라도 있는 건가? 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대낮에 식당에서 월하길래? 그는 신문을 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포츠 재킷 주머니에 문고판 소설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청소 중인 아내를 위해 및시간 집을 비워주기로 했는지도 모르고 - P95

차문을 걸고 식당으로 들어가본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 P95

하지만 대체 왜? 아까 추측한 대로 여자 친구와 밀회를 즐기러 사라진걸까? 아니면 새 일자리를 구하기 전에 은행이라도 털려는 걸까? (물론 그건 나 역시 생각해본 적 있다.)혹시 날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전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보나마나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 P96

그가 카운터 뒤에 있는 스윙 도어를 열고 불쑥 튀어나온다.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그는 피쉬 앤 칩스 접시를 들고 있다. 그가 내 왼쪽에 앉은 손님앞에 접시를 내려놓는다.
그는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충격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 P96

중간관리자 출신이 동네 식당에서 일을 하다니. 여기서 버는 돈으로는 세 블록 떨어진 집의 융자금도 제때 갚지 못할 것이다. - P97

그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 안 돼.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세워뒀던 방침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다짐해온 내용이었다. - P97

하지만 이제 난 어찌 해야 하나? 그는 언제까지 여기서 일을 할까? 주차장에 세워놓은 보야저에서 여덟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닌가?
여섯 시간! 열두 시간? - P98

(전략).
나는 맞장구친다. 부디 이것으로 불편한 대화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그가 팔짱을 풀고 내 오른쪽을 가리킨다.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본다. 지금손에 루거가 쥐어져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볼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8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2.5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도슨스 모텔이 있습니다. 거기서 묵어본 적은 없지만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 P99

드디어 궁금증을 풀 기회가 왔다. 나는 묻는다.
"여기서 풀타임으로 일하십니까?"
"거의 풀타임이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합니다. 일주일에 네 번 나오고요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 - P100

그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제 전문 분야와는 거리가 멀죠 전 페이퍼 업계에서 25년간 일했습니다."
그가 말한다.
나는 모르는 척하며 묻는다.
"신문 말씀입니까?"
"아뇨. 제지업 말입니다." - P101

나는 말한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이 주문하신 게 다 된 모양입니다."
벨 소리가 난 주방을 돌아보며 그가 말한다. 그리고 다시 스윙 도어 안으로 사라진다.  - P101

(전략).
"메모지, 주문서, 회계 문서, 뭐 그런 것들을 취급했죠. 중간관리직으로, 생산 라인을 감독했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킬킬 웃는다.
"그러니까 선생 쪽으로부터 재료를 공급받아 왔던 거죠."
"저희 쪽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흰 산업용 특수 용지만을 취급했거든요."
그가 씨익 웃으며 말하곤 이내 다시 고개를 젓는다. - P103

"요즘 벌어지는 일들 말입니다. 범죄나 다름없어요."
"대량 해고 말씀이죠?"
"인원 삭감, 직원 줄이기. 그들이 어떤 완곡어법을 쓰든 범죄는 범죄죠." - P103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보스들이 이러도록 내버려두는 사회가 문제죠. 아시아 어떤 나라의 미개한 부족들은 신생아들을 산허리로 데려가 죽인다고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먹일 필요도, 돌봐줄 필요도 없어지니까요. 먼 옛날 에스키모들은 나이 든 부모를 빙산에 놓아두고 왔다죠? 그렇게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죽도록 말입니다. 더 이상 부양이 힘들어지면 그런 방법을 쓴다고 하네요. 하지만 지금 이 사회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들, 한창때의 사람들, 인생의절정에 다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폐기 처분시키고 있습니다. 이게 미친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 P104

비치 보이스의 <굿 바이브레이션스>가 흘러나온다. (중략). 꿈에서 깨보니 나는 도슨스모텔에 누워 있다. 맞춰놓은 대로 밤 11시 30분이 되자 라디오가 켜진것이다. (중략).
도슨스 모텔은 고풍스럽게 꾸며진 곳이다. (중략).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나이 든 남자는 간만의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내민 현금을 보자 그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난 신용카드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겠죠." 그가 말했다.
현금, 과도적 기술. - P106

모텔 문도 구식이다. 나갈 때마다 열쇠로 일일이 잠가야만 한다. 다행히 지붕이 돌출돼 있어 문을 걸어 잠그는 동안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  - P106

왼편의 주유소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오른편의 식당은 아직 영업 중이다. 내 바로 앞 교차로를 건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스포츠 재킷에 모자. 빗속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터덕터덕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남자. 에버릿 다인스다!
젠장! 빌어먹을! 이렇게 일찍 나올 줄이야! 일부러 시간을 정확히 맞춰왔건만! - P107

나는 헤드라이트를 끈다. 그렇게 차는 밤의 어둠 속에 파묻힌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기가 무섭게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조금씩 속도를 내본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차의 왼쪽 좌석에 앉은 채 오른쪽 창밖으로 총을 쏘는 것 말이다. - P108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보야저가 미끄러지며 앞으로 돌진한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는 그저 검은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비에 젖어 반짝인다. - P108

브레이크를 더 세게 밟아 차를 세운다. 그런 다음, 헤드라이트를 켜고후진 기어를 넣는다. 후진등이 들어오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룸미러, 왼쪽 백미러, 그리고 오른쪽 백미러로 그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는아직 움직이고 있다.
오, 맙소사, 안 돼. 그냥 쓰러져 죽어버리라고. 이걸로 부족해? 그는 몸을 굴려 일어나려 하고 있다. - P109

이번에 확실하게 끝내야 해 나는 다시 기어를 주행에 넣고 천천히 전전하기 시작한다. 그의 머리를 가는 채로 쿵, 왼쪽 앞 타이어 중 왼쪽 뒤 타이어 됐어나는 차를 멈춘다. 후진 기어를 넣자 다시 후진이 들어온다. 나는 세 개의 백미터로 그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 P110

모텔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흐느껴 운다. 모텔에 도착해서도 흐느낌은멈추지 않는다. 기운이 빠져 핸들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 지경이다.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을 힘도 없다. - P110

흐느낌은 멎어 있다. 하지만 극심한 피로는 여전하다. 침대 옆 라디오 시계는 12시 47분을 알리고 있다. 에버릿 다인스를 죽이러 모텔을 나선지 딱 한 시간 만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천 년도 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침대로 들어가 불을 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또다시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머릿속에서는 비와 어둠과 보야저의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뒤덮인 네더 가의 풍경이 계속 아른거린다. - P111

미쳐가고 있는 걸까? 어떻게 내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허버트 에벌리, 에드워드 럭스와 불쌍한 그의 아내, 그리고 에버릿 다인스. 그는 나와 같은 처지였다. 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 P112

지금까지 총 네 명을 죽였다. - P113

내 마지막 이력서.
서명은 하지만 날짜는 적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일 내가 무슨 일을 꾸미게 될지 알 길이 없다. 저기 옷장 속 파이프막대에 걸린 레인코트에서 루거를 꺼내와 자살을 하거나 다시 리치계에트로 돌아가 자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 P114

14

모처럼 푹 잤다. 눈을 떠보니 개운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며칠 굶은 곰처럼 배가 고프다. 일부러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 정말로 원 없이 잘 수 있었다. 라디오 시계는 9시 27분을 알리고 있다. 원래 7시 30분이면 가뿐히 일어나던 나였다. 오늘 이런 모습은 나답지 않다. - P115

나는 테이블에 앉아 어젯밤 적어놓은 고백의 내용을 다시 읽어본다. 오싹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다. 어젯밤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긴장고 불안했고 겁에 질려 있었다.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이 고백의 글 덕분에 모처럼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 - P116

 운전을 하는 내내 차에 남은 살인의 흔적을 걱정한다. 우선 수리를 해야 할 것이다. 보험회사에 보고도 해야 할 거고. 물론 공제액을 넘을 가능성은 적지만. 마저리에게도 차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다. - P116

경찰이 이 밴을 찾아 나설 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장 살인으로 단정 짓고 수사를 벌이지는 않겠지만 뺑소니 역시 과실치사로 꽤 중한 범죄다.
그들이 어떤 단서를 잡았을까? 보나마나 타이어 자국이 전부일 것이다. - P117

도로 왼편으로 재목 저장소가 보인다. 그 앞에는 차가 몇 대 세워져 있다. 차들은 전부 도로를 등지고 있다. 갑자기 소형 오픈 트럭 한 대가 뒤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맹렬히 후진해 나오기 시작한다. (중략). 오히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트럭과 충돌하게 만든다. 내차의 왼쪽 앞부분과 트럭의 왼쪽 측면이 스치면서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 P118

그중 하나가 트럭으로 달려가 운전자에게 시동을 끄라고 한다. 남자는 시키는 대로 한다. 시동이 꺼지자 요란한 음악이 뚝 멎는다. 또 한 명이 내게 말한다.
"경찰을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저 친구가 뒤도 안보고 튀어나왔다니까요."
나는 말한다. - P119

모두가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트럭 운전사조차도 음악을 크게 튼 채 뒤를 확인하지 않고 튀어나온 자신을 탓한다.
주 경찰은 선량한 피해자 대하듯 나를 다룬다. 젊은 트럭 운전사는 졸지에 나쁜 놈이 돼버린다.  - P119

15

마저리와 나는 아직도 일요일을 특별하게 여긴다. 더 이상 그럴 이유가 남아 있지 않음에도. - P121

"버크! 버크!"
마저리와 나는 가운 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일요일판 『타임스』를 훑고 있는 중이다. (중략). 마저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왼쪽 소파에 앉아 있다.  - P122

아내가 말한다. 아내의 눈 밑에는 흰색의 작은 얼룩이 나 있다. 광대뼈 바로 위에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말한다.
"일 때문에 그래, 여보, 지금 내 정신이......" - P124

그녀가 말한다.
"곧 그렇게 될 거야. 우린 서로를 사랑하고 있잖아. 우린 충분히 강하다고"
"우린 강하지 않아요. 난 강하지 않아요. 이젠 지쳤어요. 더 이상 비참해지긴 싫다고요. 이런 절박함도 싫고 마치………… 마치 덫에 걸린 마멋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서식하는 설치류 동물로 오소리와 비슷하게 생겼음)이 된 기분이에요!"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이미지다. 아내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왔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아무 낌새도 채지 못했다. - P125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말한다.
"마저리, 우리 사정을 들어줄 제삼자는 필요 없어. 그냥 우리끼리 대화로 풀면 된다고, 그동안 우리 잘해왔잖아.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도......"
"당신이 날 버리고 떠나려 했을 때 말이죠?"
그녀가 말한다. - P126

"마저리, 일에 대한 문제라면 얼마든지 대화로 풀 수 있잖아."
"당신과는 대화가 안 돼요."
아내가 말한다. 아내의 시선이 전망창 쪽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많이 진정된 상태다.
"그게 문제라고요. 당신과는 대화가 안 된다는 거 말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무관심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지금부터 달라질게. 확 달라질 거라고."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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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이 책은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콘란과 디자인 비평가 베일리가 쓴 일종의 백과사전식 디자인 역사서다. 디자인 분야의 실무자와 경영자. 이론가가 함께 책을 쓴 드문 경우인 만큼 책의 성격도 특별하다.
대부분의 사전류 또는 용어 해설집의 경우. 다른 글을 이해하는 데에 보탬이 되는 참고서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앞부분의 디자인 사적인 고찰과 뒷부분의 사전식 설명이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독립적인 한 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 P-1

좋은디자인에 대한 단상

테렌스 콘란 Terence Conran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흔하지만 여기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사실 답은 간단하다. 좋은 디자인이란 사물 그 자체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 P10

나는 좋은 디자인 또는 사려 깊은 디자인이란 98퍼센트의 상식과 2퍼센트의 신비한 요소, 즉 우리가 흔히 예술 또는 미학이라고 지칭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 P10

혁신성은 좋은 디자인의 결정적 요소다.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디자이너가 해야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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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물리학의 객체 개념



물리학은 일반적으로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해우리 주변의 실재를 설명한다. (중략). 이번 장에서는 물리학의 객체 개념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더 엄밀하게 규정하고자 한다. - P181

1. 이상화

우리 주위의 실재는 완전무결하게 서술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중략). 그러나 앞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 물리학은 입자에 의한 합성(Zusammensetzung aus Teilchen)이라는 개념을 폐지했다.  - P181

엄밀히 말해, 물리학적으로 관찰된 것이 "실재"는 아니지만, 모든 물리학 이론은 이상화된 물리적 ‘객체(Objekt)‘를 다룬다. 게다가 그것은 두 가지 관계에서 이상화(Idealisierung) 하고 있다.

1. 실재 전체에서 개별 사물이나 객체를 따로 분리하는 것은 결코 실재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이상화이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물리학은 각각의 사물에서 "물리학적으로 적절한(physikalischrelevant) 소수의 속성들만을 관찰할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논할 것이다.
- P182

. 이것은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양자역학과 모순되는 전제이다. - P183

도대체 이때의 객체란 ‘누구에 대한(fürwen)‘ 객체란 말인가? - P183

물론 객체의 외부에는 항상, 예언된 측정값을 기록하고, 그 객체를 서술하는 관찰자가 존재해야 한다. 엄밀한 의미의 전체로서의 세계는 ‘그 누구에 대한‘ 객체도 아니다.  - P183

 객체 개념에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도식에 따라 구분되는 단계들로 나타난다. - P183

a) ‘자유 객체(freies Object)‘: 하나의 객체는 주변 세계로부터 따로 분리되며, 주변 세계의 특별한 속성들과 전혀 상관없이 관찰된다. (후략).

b) ‘외부 장에 있는 객체(Objecte im äußeren Feld)‘: 이 근사 단계(Naherungsschritt)에서는 객체에 대한 주변 세계의 영향이 관찰되며, 이러한 영향이 어떻게 객체의 상태에 의존하는가가 관찰된다. (후략).

c) 상호작용(Wechselwirkung): 객체(A)의 주변 세계에 대한 영향도 많은 경우에 중요시된다. (중략)., 그것을 앞서 말한 객체(A)와 연결해 새로운 객체(A&B)로 결합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서술을 "(부분)객체 A와 B의 상호작용"이라 부른다. - P184

2. 추상적 객체 개념

우리가 세계 속의 개별 사물들을 성공적으로 격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사물‘은 무궁무진한 속성을 소유한다. 반면 물리학 이론의 ‘객체‘들은 몹시도 빈약하다. - P185

우리는 그러한 객체들의 "본질"에 대해, 예를 들어 "질점 자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 P186

질점은 많은 경우, 실제의 사물에 대한 근사적 서술로 적합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령 물체의 ‘회전 위치 (Lage)‘와 그것의 ‘회전 운동량‘을 추가로 제시함으로써, 더 정확히 서술해야 한다.  - P186

이론에 등장하는 객체는 항상 그것의 일시적 상태를 표시하기 위해 반드시 진술해야 하는, 우연적 속성(양)에 의해 정의된다. (중략). 그 기준은무엇일까? 우리는 그 대답을 ‘객체 개념의 정의‘로 파악하고자 한다. - P188

이와 같이 정의된 객체 개념은 19세기에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한 ‘장(Feld)‘의 개념도 포함하는 것이다. 가령 전자기장의 개념은 어떻게 얻게 된 것일까? - P189

역장(場)은 무엇보다 물체들 간의 힘을 통일하는 보조 구성체(Hilfskonstruktion)이다. 장은 "원인이 되는" 객체의 변화가, 예를 들어 운동이 다른 장소에서는 조금 뒤에야 알아챌 수 있게 되면서 독자적인 수명을 유지한다.²



2 유한한 전파 속도", 3장 1절 참고. - P189

양자역학적 객체를 관찰할 때는, 객체 개념의 이러한 추상 단계(Abstraktionsstufe)를 기억해야 한다. - P191

양자역학적 객체를 관찰할 때는, 객체 개념의 이러한 추상 단계(Abstraktionsstufe)를 기억해야 한다. 전자(Elektron)는 작은 핀머리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191

양자역학적 객체에는 단지 추상적 객체 정의만이 들어맞는다. 어떤 시간의 상태에서 다른 시간의 상태가 예언될 수 있다. 즉 가능한 측정을 위한 확률이 제시될 수 있다. - P191

3. 아 프리오리한 물리학

(전략). 우리는 어떤 자연법칙의 타당성에 대해, 그 자연법칙이 타당하지 않다면 ‘일반적인 경험‘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파악할 때, 아 프리오리하게, 즉 각각의 구체적 경험 이전에 알 수 있다(2장 참고). - P193

지금까지 자연과학은 다섯 개의 큰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1. 양자역학: 임의의 객체들에 대한 일반 이론(8장 참고).
2. 열역학: 다양한 근사 조건하에서 실재하는 객체를 기술하는 이론(6장 5절 참고).
3. 상대성이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론(3장과 4장).
4. 소립자론: 현재 알려지지 않은 객체의 가능한 종류에 대한 이론(이하 참고).
5. 우주론: 실재하는 객체 전체에 대한 서술(4장 5절 참고). - P193

경험 일반의 가능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연과학으로서의 "경험"을 엄밀하게 규정해야 한다. - P194

 그런데 ‘경험 일반‘이 자연과학을 토대로 엄격한 규정을 함으로써 어떤 제한을 받지는 않을 것 같다. 도대체 여기서 경험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 P194

(전략). 무엇보다 개념의 형성이 이에 속한다. 우리가 이러한 "올바른 길을 찾는 일(Sich-zurechtfinden)"을 엄격하게 규정한다면, 우리가 앞서 인용했던 자연과학의 개념에 정확히 도달하게 된다. 경험을 근거로 무엇을 안다는 것은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구나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개념과 법칙을 근거로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 P195

여기서 "양자역학"이라고 지칭된 것은, 원래는 양자역학의 "힐베르트 공간 구조", 즉 가능한 예언들 상호 간의 확률 관계의 일반적 구조일 뿐이다. - P196

4. 공간


특수상대성이론의 푸앵카레 대칭은 공간과 시간 좌표에서도 대칭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기초를 설명할 때 시간이 지닌 특별한 역할을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추상적 논의의 테두리 내에서 공간이란 무엇일까? - P197

(전략).
따라서 공간은 존재하며, "우연하게도" 상호작용이 바로 공간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우연"은 어떤 숨은 관계를 나타낸다. 혹시 공간을 그것에 모든 객체의 상호작용이 의존하는 매개 변수들의 약칭(Zusammenfassung)으로 ‘정의‘할 수는 없을까?  - P198

우리는 ‘상호작용‘을 객체 개념의 접근 과정 속의 한 단계로 알고 있다(7장 1절). 그것은 객체들을 합성하고 분해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도 매우 추상적인 형식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 P198

(전략). 양자역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A의 (어떤 상태의) 속성과 B의 속성에 대한 진술이 객체 A&B의 속성을 진술한다는 것은 여기서도 타당하지만, 전체적 객체 A&B가 훨씬 더 많은 속성을 소유한다.⁸


8 이것은 수학적으로, 두 상태 공간의 ‘직접곱(direktes Produkt)‘과 ‘텐서곱‘ 간의 차이다. 첫 번째집합을 구성하는 원소 V와 두 번째 집합의 원소 U가 있을 때, 두 집합의 직접곱은 모든 (V, U)인쌍들의 총체이다. 반면 두 벡터공간의 텐서곱은, 막말로 하면, 각각 하나의 벡터공간에서 나온 벡터의 모든 쌍 이외에, 그러한 쌍들의 모든 선형 조합(Linearkombination)도 포함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텐서 1계산에 대한 입문서들, 예를 들어 Halmos 1958을 참고할 것. 8장 1절 d항도 참고. - P199

바이츠제커(1971)는 양쪽의 생각을, "모든 객체는 각각 하나의 이차원 상태 공간을 갖는 가장 단순한 "원초적Ur") 객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 하는, 그의 ‘원초-객체 (UrObjekt)들의 가설‘로 연결시켰다. 이것에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모든 개념이 매우 추상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 P199

. ‘원초적 존재(Ur)‘의 속성들은 하나의 이차원적 상태 공간을 형성하는데, 측정에서는 항상 "그렇다/아니다", "+" 따위의 ‘두 가지‘ 가능성만을 구분할 수 있다. 구분 가능한 속성을 갖는 더 작은 객체는 생각할 수 없다. 원초적 존재는 예를 들어 위치를 가질 수 없다.  - P199

원초적 존재의 가설이 주장하는 것은 ‘각각의‘ 상태 공간이 그와 같이 합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주장이다. - P200

앞에서 설명했듯이, 공간은 (비상대론적으로) 상호작용의 매개변수로서 도입되는데, 이때 원초 존재-가설로부터 이러한 공간이 삼차원적이며 닫혀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상대론적 사고는 이에 대해 등각군 KonformeGruppe[SO(4, 2)]을 근본적인 것으로 제시할 수 있다) [등각군은 도형이나 어떤 양의 각이나 변화 비율만을 보존하는 변환들로 이루어지는 군이다. 어떤 군의 원소의 부분집합이 그 군과 같은 연산에 대해 특별히하나의 군을 이루면, 그것을 부분군이라 하는데, 이때 S를 붙여 어떤 군의 특별한(Special) 부분집합으로서의 군으로 표시한다. 괄호 안의 숫자들은 연산이 사차원이며, 어떤 변환에서 다른 변환으로의 행렬식의 값이 2라는 것, 즉 사차원 시공에서의 ‘동일한 거리‘를 갖는 등각변환들의 집합이라는 뜻이다.-역주). 그러나 이것은 수학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아직 유동적이다.⁹ - P201

우리는 이제 다시 한번, 물리학 이론으로서는 이미 "낡은" 것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 최근 몇 년 동안 현저한 발전을 이룩한 양자역학을 살펴보자. 앞서 다룬 이론들이 서로 차이를 보인다고 해도 이점에서는 강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져 있다. - P202

5장 양자론

1. 양자가설


1875년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물리학 공부를 시작할 때, 그의 스승인 졸리(Jolly) 교수는 그에게, 물리학이 아주 재미있는학문이긴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는 분야라고 말했다. - P125

플랑크가 다룬 문제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보인다. 빈(Wien, 1864~1928)의 스펙트럼 방정식은 "흑체[swarzer Körper. 모든 파장의 복사를 완전히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있는 이상적 물체.-역주]"의 스펙트럼 분포를 다루는 것으로, (후략). - P125

막스 플랑크는 전자기복사의 열역학에 몰두해 있었으며, 특히 자외선 파국을 고전 이론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P127

(전략). 1911년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는 양자가설이 자외선 파국을 피하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 P128

드디어 아인슈타인은 양자가설을 심화시켜, 빛의 에너지가 플랑크의 양자로 방출되고 흡수될 뿐만 아니라, 결국 빛은 그러한 양자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² - P-1

(전략). 따라서 빛은 파동과 입자라는 수수께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파동-입자 이원론‘은 8장 3절에서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 P129

2. 원자물리학

1896년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이 우라늄에서 천연 방사능을 발견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방사선을 집중 실험하고 그 특성을 분석하다가, 1911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원자핵을 발견했다. - P129

역시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으며, 원자핵을 발견한 지 얼마 후에러더퍼드의 연구진에 들어온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26)는 그러한 원자 모델을 고전물리학에 입각해서 설명하려는 것은 ‘가망 없는‘ 짓이라는 점을 재빨리 알아챘다. - P130

(전략). 양자역학을 발견하기까지 수년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성과들이 새로운 난점으로 이어지면서 제공되었다.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두 개의 주제, 즉 대응 원리 (Korrespondenzprinzip)와 슈테른게를라흐(Stern-Gerlach)실험만을 언급해 보자. - P131

보어의 ‘대응 원리‘란 원래 자명한 정합성의 요구(Konsistenzforderung)다. 즉 고전물리학이 확증되는 영역에서 양자론의 서술은 (실제로)고전 이론과 같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 P131

오토 슈테른과 발터 게를라흐는 1921~1922년 특별한 방법으로 양자론의 특성을 설명하는 실험을 했다. 한쪽 끝에 화로(Ofen) 속에서은의 원자(은증기 Silberdampf)가 흘러나오는 진공그릇을 상상해 보자(그림 5-1).
이 흐름은, <그림 5-2>와 같은 형태의 극편에서 발생하는 매우 이질적인 자기장을 통과한 후 유리판에 부딪힌다. - P-1

실험 결과는 이러한 기대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실제로 은 증기의 흐름은 두 가닥으로 ‘갈라졌다‘. - P133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은 처음으로 전자기 복사 이외의 전형적 양자효과를 보여 주었다.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후에 증명되었듯이, 은의 외각 전자의 ‘스핀‘(Spin des äußeren Silber-Elektrons)이라는 특히 전형적인 양자역학적 양을 확증했다. - P133

3. 양자역학

1923년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빛의 기묘한 이중성을 전자에 부여했다.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갖는 것으로 보이듯이, 전자도 지금까지 확인되어 온 입자성과 함께 파동성도 가질 수 있다는것이다. - P134

(전략).
결국 양자역학은 1. "입자의 운동은 확률 법칙을 따르지만 확률 자체는 인과율과 일치하여 분포한다"라는 막스 보른이 공식화한 "통계적 해석"에 의해, 그리고 2. P. 요르단과 P. 디랙이 추상적으로 형식화한 W. 하이젠베르크와 E. 슈뢰딩거의 이론에 대한 수학적 등가성의 증명에 따라, 그리고 마침내 J.V. 노이만의 "통계적 변환 이론"에 따라 수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 P136

역사를 참고해 보는 것도 철학적인 물음을 위해 흥미 있는 일이다. - P137

 이에 따라 오늘날도 양자역학의 해석과 관련된 두 개의커다란 집단이 존속하고 있다. 그 하나는 보어와 "코펜하겐 학파처럼 고전물리학의 수정을 환영하고 물리학 이론으로서의 양자역학에 만족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집단은 드 브로이, 아인슈타인 그리고 슈뢰딩거처럼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이 수행하는 것과 같이 실재 자체의 객관적 인상을 제공하지 않는 한, 양자역학에 대해 불만을 크게 느끼는사람들이다.⁷


7 A 아인슈타인과 N. 보어 간의 토론은 이러한 논쟁의 정점을 이룬다. 이것은 쉴프(P. A. Schillpp)가 편집한 아인슈타인 선집과 N. 보어의 책(1958)에 나와 있다. B. Hoffmann/H. Dukas도 참고 - P137

두 가지 전혀 다른 근본 입장에서 발전되어 나온 서로 다른 이론들이 수학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갖는("동형적인 isomorph") 것으로 밝혀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배후에는 분명 매우 일반적인, 단일한 근본 구조가 숨어 있을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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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are all kinds of love in this world, but never the same love twice.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이 있지만,
그 어떤 사랑도 두 번 다시는
같은 얼굴로 찾아오지 않는다.
- <분별 있는 일> - P7

분별있는 일

The Sensible Thing


1924년 7월 15일 자 잡지 《리버티》에 발표, 이후 《슬픈 남자들 All theSad Young Men》에 수록되었다. 사랑과 상실을 다룬 이 작품은, 매우 뛰어난 ‘개츠비‘ 계열의 단편으로 평가받는다. <겨울 꿈>을 비롯한 피츠제럴드의 여러 단편과 마찬가지로, <분별 있는 일> 역시 급격한 운명의 반전을 이야기의 중심 축으로 삼는다. 이러한 특징은, 피츠제럴드가 1919년과 1920년에 직접 겪었던 경험, 즉 처음으로 성공을 맛보고 사랑하는 여인을 되찾았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 P92

1

미국인의 점심시간 진풍경 속에서, 젊은 조지 오켈리는 일부러 천천히 책상을 정리하며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중략). 성공이란 결국 분위기의 문제이기에, 마음이 일에서 한참 멀어져 있다는 기색을 드러내는 건 결코 좋을 리 없었다. - P93

마음이 1,100킬로미터 너머에 가 있는 조지 오켈리에게 바깥세상은 그저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서둘러 지하철에 올라탔고, 95블록을 달리는 내내 광고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광고에는 앞으로 십 년 동안 치아를 온전히 보존할 확률이 겨우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 P94

그는 엉망진창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흔한 일상처럼닥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일들은 맹금처럼 가난을 따라다닌다. - P94

불과 2년 전 그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테네시 남부의 한 건설 엔지니어링 회사에 취직했다. (중략).
하지만 지금 그는 주급 사십 달러를 받는 보험회사 사무직원이었다. 꿈은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 P95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체임버스 씨."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중략).
"나흘간 휴가를 내고 싶습니다."
"뭐라고? 자네 이 주 전에도 휴가를 썼잖아!" 체임버스 씨가 놀란 듯 말했다. - P97

"이번에도 테네시에 좀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적어도 일관성은 있군." 지점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외근 영업사원으로 고용된 건 아닐 텐데."
- P97

"그렇게 하게. 하지만 다시 돌아올 필요는 없어. 그러니 돌아오지 말게!" - P98

체임버스 씨는 벨을 눌러 속기사를 불러 요즘 오켈리가 이상한 낌새를 보인 적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해고해 왔고 사람마다 반응도 제각각이었지만, 해고당하고 감사 인사를 건넨 사람은 단 한 명도없었다. - P98

2

그녀의 이름은 존퀼 캐리였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조지 오켈리를 향해 달려오는 그녀만큼 상큼하면서도 창백하게 빛나는 얼굴은 세상에 없었다. - P99

"여기는 크래독 씨랑 홀트 씨야." 그녀가 발랄하게 말했다.
(중략). 게다가 존퀼의 집까지 데려다줄 자동차가 그 두 청년 중 한 사람의 차라는 걸 알고 나니 혼란은 더 커졌다. - P99

"모든 게 잘되고 있어요." 조지는 애써 밝게 대답했다. "승진도 했고, 급여도 올랐어요."
그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참담했지만, 모두들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 P101

"회사에서 자네를 꽤 마음에 들어 하나 봐." 캐리 부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3주 사이에 두 번씩이나 여기 내려오게 두진 않았을 테니까."
"제가 허락을 받아냈죠." 조지가 급히 설명했다.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거든요." - P101

존퀼은 선풍기를 틀어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에, 조지는 결국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스스로 발을 들이고 말았다.
"나랑 언제 결혼할 거야?"
"나랑 결혼할 준비는 되어 있는 거야?"
그 말에 조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P103

그는 자신이 불안하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소파에서 일어나 건너편 흔들의자에 털썩 앉았다.
"난 결혼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편지를 보냈잖아. 이제 그만하자는 것처럼 들렸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급하게 내려올 수밖에 없었잖아."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돼." - P104

조지는 어떤 움직임도, 생각도, 희망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가올 불행에 대한 예감이 그를 완전히 마비시킨 듯했다. - P105

3


다음 날, 무더위 속에서 결국 한계점이 찾아왔다. 두 사람모두 상대방의 진심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먼저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쪽은 그녀였다. - P105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조지, 난 정말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 아마 앞으로도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거야. (중략).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분별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가 이성을 잃고 퍼부었다. 다른 남자가 있는 게 아니냐고,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 P106

처음에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예의상 다정하게 대할 뿐이었다.
"이제 그만 가줘." 마침내 그녀가 소리쳤다. 그 소리가 워낙커서, 캐리 부인이 놀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 P107

잠시 뒤, 존퀼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슬픔도, 긴장도 모두 분칠과 붉은 볼터치, 그리고 모자 아래에 감춰져 있었다.
(중략).
존퀼은 바깥 현관으로 나갔다. 조지는 코트와 모자를 걸친채 한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 P108

기차는 덜컹거리며 거리의 건널목을 지나, 점점 속도를 높여 넓은 교외 지대를 가로질러 저녁노을을 향해 달려갔다. 어쩌면 그녀도 그 노을을 바라보다가 잠시 멈춰서, 돌아서서, 그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꿈속에서 점점 더 과거로 사라져갈 것이다. - P110

4

이듬해 9월, 눅눅한 어느 날 오후, 테네시 주의 한 도시에서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한 청년이 기차에서 내렸다. 그는초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하는 듯 보였다. - P110

그는 앞으로 지난 열 달과 같은 시간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느꼈다. 그동안 그는 젊은 엔지니어로서, 누구나 인정할 만한성과를 올렸다. 우연히도 특별한 기회를 두 번이나 잡았는데, 하나는 방금 돌아온 페루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 얻게 된 뉴욕에서의 기회였다.  - P112

(전략).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 때문이 아니라 흥분해서 그렇다고 자신을다독였다. 그는 지금 그녀의 집에 와 있고, 그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 P113

그러다 문이 열리고 존퀼이 들어왔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방 안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듯했다. 그는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 P114

 그는 갑자기 밀려드는 당혹감을 입 밖으로 터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여기 온 게 혹시 불편해?"
(중략).
"약혼했어?" 그가 물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 있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P115

바로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조지는 존퀼이 지나갈 수있도록 옆으로 비켜섰지만, 그녀는 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동안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 P117

미소가 없는 표정보다도, 말 없는 침묵이 더 인상 깊게 남았다. - P117

"나랑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지?" 그가 조용히 물었다.
존퀼은 짙은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난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 없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일 아침 워싱턴으로 떠날 거야." 그가 말했다. - P118

그는 뉴욕에서 보낸 절망적인 이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암울했던 시간은 저지시티의 건설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으면서 끝이 났다. 수익은 크지 않았지만, 꽤 매력적인 일이었다. - P120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잡을 기회였다고?" 그녀가 순진한 어조로 말을 가로막았다.
"바보라도 잡았을 기회였지."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었어. 내가 뉴욕에 전보를 보냈더니..." - P120

(전략). 그가 그녀의 입술에 속삭였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든지 있어..."
세상의 모든 시간, 그의 삶, 그리고 그녀의 삶이라는 시간이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문득깨달았다. 아무리 영원을 헤맨다 해도, 잃어버린 그 4월의 시간만큼은 결코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 P121

그래, 이제 흘려보내자, 그는 생각했다. 4월은 끝났다. 4월은 끝이 났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이 있지만, 그 어떤 사랑도 두 번 다시는 같은 얼굴로 찾아오지 않는다. - P122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Three Hours Between Planes


<에스콰이어> 1941년 7월호에 발표되었으며 사후 발표된 유작 중 한 편이다. 피츠제럴드의 말년 무렵, 삶과 사랑, 기억의 허무와 복합성을 탐색하는 경향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짧은 만남 또는 재회에 대한 기대와 실망, 애틋함과 거리감이 동시에 공존한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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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 교수가 나를 그다음 주 토요일 밤 자택에서 열리는 만찬에 초대했는데, 이유는 클로드가 곧 워싱턴에 돌아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교수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내가 1963년에 대학 생활을 시작하기 이전에 클로드가 얘기해 주었는데, 그는 이유를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놀라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이야. 그때껏동성애자와 알고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동성애자가서양의 자연스러운 환경 속에서(내 말은, 동양에는 겉으로는 동성애자들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중략). 어쩌면 교수를 에워싼 문학 작품들이 향수를불러일으켰는지,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조용한 미국인에 관한 자네의 졸업 논문을 기억해 지금껏 내가 읽어본 최고의학부생 졸업 논문 중 하나였지. 내가 점잔을 빼며 미소를 띠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이, 클로드는 소파의 내 옆자리에 앉아 코웃음을쳤습니다. 난 그 책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1950년대 인도차이나전쟁과 베트남을 배경으로정치적 이념과 체제 앞에 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해지고 비인간화되는가를 그렸다. - P179

아니, 그렇지 않아. 결과적으로 그 실수를 저지른 덕분에 오늘날의 내가 될 수 있었어.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교수님?
그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네가 나를 거듭난 미국인이라고 불러도 될 거라고 생각해. 모순이기는 하지만, 만일 지난 수십 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면, 자유의 수호에는 오직 미국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거야. - P181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여러 모순을 초래하며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믿지만, 인간이 행동을 취할 경우에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모순은 자본주의의 특징은 아니었습니다.  - P182

이튿날 저녁 나는 소령을 염탐하기 시작했습니다. - P183

정해진 대로 무절제한 소령과 만남을 갖기 직전 토요일에, 본과 나는 차를 몰고 차이나타운으로 갔습니다. 접이식 테이블에서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는 오프브로드웨이의 어느 뒷골목에서우리는 정품이 아님을 보증하는 가격에 UCLA 대학의 스웨트 셔츠와 야구 모자들을 샀습니다.  - P185

. 우리 그레이리스트*의 맨 위에서부터블랙리스트의 맨 아래까지 모든 심사를 통과했던 어느 베트콩 혐의자가 체포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우리가 묵살하기에는 이미 충분히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베트콩이라고 밀고한 상태였습니다. 아니, 소령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 그레이리스트(gray list)는 혐의자 혹은 감시대상자 명단이라는 점에서는 블랙리스트와 유사하지만, 혐의 대상에 오른 사람을 특정 활동에서실제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은 채 혐의를 계속 두며 예의 주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P186

베트콩이라고요? 그 남자가 허공에 손을 흔들며 울부짖었습니다. 말도 안 돼요! 난 사업가라고요! - P187

소령이 내 몫이 든 봉투를 건네주면서 쾌활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1년치 봉급과 맞먹었지만, 요모조모 따져 보면 실제로 1년 동안 먹고살기에 충분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거절하면 의심을 살 판이라. 나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 P188

이튿날 저녁 7시 30분쯤 우리는 UCLA 대학 스웨트 셔츠와 모자를 착용한 채 주유소 아래쪽 길거리에 차를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를 주목한다 하더라도, 일이 잘만 되면 그저 UCLA학생들을 기억하게 될 터였습니다. - P189

나는 유감스러운 듯이 웅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 해줄말이 없었습니다. 거세는 입에 담기도 두려운 소리니까요. 우리는 차 두 대가 휘발유를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무절제한 소령을 위해 베풀 수 있는 단 한 가지 친절이 있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난 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 해.
그는 무슨 일이 닥쳤는지도 모를 거야. - P190

본은 양말을 신은 두 발로 좁은 길에 가장 가까운 차 두 대사이의 자리로 걸어간 다음 꿇어앉은 채 머리를 창문 밑에 두었습니다.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8시 7분. 나는 겉에 노란색 행복한 얼굴 캐릭터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인쇄된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폭죽과 오렌지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 P192

그게 뭐야? 그가 내 쪽으로 절반쯤 다가왔습니다.
독립기념일 선물요. 소령이 지나치는 중인 차 뒤에서 본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는 소령을 계속 응시했습니다. 3피트가 채 안 남았을때 그가 말했습니다. 독립기념일에도 선물을 하나? - P193

호밀 위스키 한 잔을 건넬 때 본의 한쪽 손에 난 붉은 흉터를 보았습니다. 본이 말했습니다. 소령을 위하여. 호밀 위스키의 고약한 맛이 너무 끔찍해서 우리는 그 맛을 씻어 내려고 한 잔 더. 그러고 나서또 한 잔 더, 더, 더, 계속 더 마셨고, 그러는 동안 줄곧 건국기념일을 축하하는 텔레비전 특집 방송을 지켜보았습니다.  - P195

7장


소령의 죽음에 몹시 괴로웠음을 자백합니다. 소장님. 그게 소장님께는 별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요.  - P196

내가 대성당의 습한 기후 속에서 몸서리를 치는 사이 미망인들은 기도문을 웅얼거렸습니다. 영광이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일부의 인식과는 달리 혁명 이념은 심지어 열대 국가에서도 뜨겁지 않습니다. 차갑고, 인공적입니다. - P197

 비참한 시기였다면 나는 한 자리 얻을 만한 자격도 없었겠지만, 이때는 우리가 미국으로 망명한 지도 1년이 넘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호경기가 다시 찾아와 있었습니다. - P198

 장군은 연회 초반 감동, 눈물, 술을 부추기는 연설을 하면서 그를칭찬했습니다. 모든 참전 용사들이 가세해 자신들에게 영웅적 자질이 없다는 불편한 사실을 가리느라 느닷없이 한바탕 입심 좋게 허풍을 떨며 그 영웅을 위해 축배를 들었습니다. - P199

(전략). 이성애자로 공인된 은행가들과 군인들이 그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바치며 가수가 유별나게 딱붙는 새틴 바지를 입고서 보여 주는 희롱하듯 노골적인 골반 놀림 하나하나에 소리 높여 찬동의 뜻을 표했습니다. - P199

흔히 결혼식으로 인해 학대는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 학대는 행복하고 순결한 신부와 신랑의 모습으로 인해 더 심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들의 결혼은 불화, 불륜, 불행, 이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또한 애정, 정절, 자녀, 만족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 P201

1973년과 1974년 여름에 집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 그녀는 청나팔바지를 입고 깃털 머리를 하고 블라우스를 불룩한 가슴 위로 트램펄린처럼 팽팽하게 당겨 입고 평범한 키에 몇 인치를 더해 주는 나막신을 신은 이방인으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 P203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이제 이유를 알았습니다. 무대 위의 이라나는 내가 기억하는 란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 P204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클라크 게이블이 무대로 나가더니 뜻밖의 손님, 1962년부터 1964년까지 그린베레로서 우리 나라에서 복무했고 우리가 어느새 자리 잡고 있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이 왔다고 알렸습니다. 하원의원은 훌륭한 군대 경력이 오렌지카운티에서 많은 도움이 된 덕분에,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 P206

 우리는 무언가 다른 피부색, 그것도 특히 미국인의 지갑을 소매치기하는 한심하고 작은 황인종들의 피부색을 포용할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음과 양의 이원대립적이고 인종적인 정치관을 지닌,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된 미국의 존엄성과 좌우 대칭식의 균형미를 위협했습니다. - P207

여러분은 제가 누구 얘길 하는지 아실 겁니다. 민주당 지지자들. 대중 매체, 반전 운동. 히피들, 대학생들, 급진주의자들. 미국은내분으로 인해, 우리의 대학들과 뉴스 편집실 및 보도국들과 우리 의회에 들끓는 패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과 반역자들로 인해 약화되었습니다. 슬프게도, 여러분은 그들에게는 그저 그들 자신의 비겁함과 배신을 상기시킬 따름입니다. - P209

모든 청중이 연설 내내 미친 듯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 P210

국가 제창이 끝나자 지지자들이 무대 위의 하원의원에게 떼 지어몰려든 반면, 나머지 청중들은 성교 후에 의기양양해하듯이 각자의 자리에 털썩 앉았습니다. 나는 돌아섰다가 손에 메모장과 펜을 든채 미즈 모리 옆에 서 있는 소니를 발견했습니다. - P211

전형적인 백인 남성의 행동이에요. 미즈 모리가 말했습니다. 백인 남성이 어떤 아시아 언어의 단어 몇 개만 배우면 우리가 냉큼 거기에 만족한다는 걸 눈치챈 적이 있나요? 물 한 잔을 요청할 줄 알면 우리는 그를 마치 아인슈타인 대하듯 할 거예요. - P211

자네가 바로 그런 부류야, 그렇지? 소니의 눈은 선팅된 자동차 창문만큼이나 불투명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너는저 하원의원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내 말을 인용할 건가?
자네는 익명의 제보자가 될 거야. - P212

그다음 주말에 나는 예의 하원의원의 잠재력에 대한 내 생각을 가다듬을 기회를 추가로 제공 받았습니다. - P212

(전략). 미국 생활에서 제일 나쁜 점은 ‘타락‘이에요. 본국에서는우리도 그걸 술집과 나이트클럽과 기지 안에 억눌러 놓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우리 아이들을 미국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음탕함‘과 ‘천박함‘과 ‘저속함‘에서 보호할 수가 없을 거예요. - P214

(전략).
하원의원이 말했습니다. 모든 체제에는 내부적으로 억제해야만 하는 도를 넘는 행위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우리는 히피들에게 사랑‘과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를 도용하게 내버려뒀다가 이제야 겨우 반격하기 시작했을 뿐이에요. 그 싸움은 가정에서 시작되고 또 끝나지요. - P215

장군이 말했습니다. 의원님이 바로 정부 아닌가요?
아무렴요! 그게 바로 내가 영화와 음악을 규제하는 입법에 우선적으로 앞장서는 이유랍니다. 이건 검열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충고일뿐이지요. 하지만 할리우드와 음악계 사람들은 나를 만나고 나서야다시 말해, 내가 그들의 창작물을 포식하려고 나선 사람 잡아먹는괴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를 좋아하게 될 게 틀림없어요.  - P216

어떤 남자들은 흰색 아오자이를 입은 저 청순한 여학생들을 더 좋아했지만 나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거부한 우리 문화의 목가적이고 순수한 이상에 속해 있었고, 나한테서는 내 아버지 고국의 눈덮인 산봉우리들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 P218

(전략), 나는 흰색이 단순히 순수나 순결과 관련된 색상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도와 죽음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 P219

8장


낮에는 우리가 주인이지만, 밤에는 ‘찰리*가 주인이야. 절대 그걸 잊지 마라.


* 미군이 공산국가의 군대, 그중에서도 특히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과 북베트남인들을 지칭할 때 사용한 은어. - P220

(전략).
하여튼, 이것이 감독의 개인 비서가 우편으로 보낸 영화 대본에 대한 내 해석이었는데, 다소 두꺼운 마닐라 봉투에는 내 이름의 철자가 아름다운 필기체로 잘못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있을 거라는첫째 조짐이었고, 둘째 조짐은 개인 비서인 바이얼럿이 우편물 발송주소를 묻고 할리우드 힐스의 감독 집에서 있을 면담을 주선하기 위해 전화했을 때 첫 인사말이나 작별 인사말을 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 P222

나는 처음부터 외국인으로 지정돼 있었고, 따라서 손님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운전면허증, 사회보장카드, 외국인 체류허가증을 지닌 정식 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바이얼럿은 여전히 나를 외국인으로 여겼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내 자신감이라는 매끄러운 피부를 찔러 상처를 냈습니다. - P223

내 영어가 나무랄 데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 P224

(전략). 한편으로는, 나는 유명한 ‘작가주의 영화 감독‘과 면담을 하기 위해 앉아 있었고, 그 순간에는 한때 토요일오후마다 극장에서 대낮에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더없는 기쁨을 누린 다음 약간 얼떨떨한 채로 눈을 깜박거리면서 병원 분만실의 형광등만큼이나 밝게 빛나는 햇빛 속으로 들어가던, 흔해빠진 사랑에 번민하는 영화에 불과했습니다. - P225

(전략). O자 하나는 반쯤 쓰러졌고, 나머지 O자는완전히 쓰러졌지요. 단어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어요. 그래서 뭐 의미는 여전히 파악할 수 있는데. 고마워, 바이얼릿, 건배. 

* 1970년대 후반 할리우드 표지판은 이런 상태 때문에 기부금을 통해 재정비했다. - P228

(전략). 나는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어를 제2언어로 구사하는 사람으로서 마치 나와는 다른 나라 출신의 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걸 귀 기울여 듣는 중인 것 같았습니다. - P229

제가 정확하게 기억한다면, 26, 42, 58, 77, 91, 103, 118페이지, 즉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 중 하나가 대사를 말하는 모든 대목에서, 남자또는 여자가 비명을 지릅니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비명소리만. 그러니 당신은 최소한 비명소리들이라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비명소리는 보편적이지. 내 말 맞지, 바이얼릿. - P230

바이얼릿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니 당신 대본에서 그저 그것을 지적하기만 하겠습니다. 당신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비명을 지르게 합니다. 으아아아아!!! (중략). 하지만 수많은 내 동포들이 고통스럽게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어보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은 그들이 비명을 지르는 방식이 아님을 당신에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비명을 지르는지 들어 보겠습니까? - P231

 영화감독, 바이얼릿 그리고 나의 만남은, 내가 영화 촬영 배경인 베트남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말하는 대목이없다는 것은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체로 조금 더 차분한 방식으로 얼마 동안 더 지속되었습니다. - P233

(전략), 조금 더 실감 나고, 조금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 영화 대본에서처럼 마을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 장면으로 곧장 바꾸는 대신에요.  - P233

그가 왜 그렇게 무례하게 굴었을까요? 부인이 말했습니다. 당신한테 몇 가지 의견을 달라고 요청한 쪽은 그 사람 아니었나요?
그는 예스맨을 찾고 있는 거였어요. 제가 자신에게 고무로 된 승인도장을 찍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 P234

감독이 말했습니다. 비밀 하나 알려 드리지 준비됐나. 자, 이거요. 그딴 건 아무도 관심 없어.
그는 내가 침묵하자 즐거워했습니다. - P235

. 나는 순진하게도 내가 할리우드라는 유기적인 조직이 전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대뇌 전두엽 백질 절제 수술과 소매치기를 동시에 해치우겠다는 목표를 바꾸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 P236

나는 실패했고, 작가주의 영화감독은 『더 햄릿』을 자기 의도대로 만들 터였습니다. 내 동포들은 그저 착한 황인종들을 나쁜 황인종들로부터 지키는 백인 남자들에 관한 서사시적 작품의 소재 역할만 하는 채로 말입니다.  - P236

(전략). 부인의 쌀국수는 따스했던 어머니의 부엌을 떠올리게 했지만, 십중팔구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만큼 따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략).
내가 말했습니다. 맛있군요. 여러 해 동안 이런 걸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놀랍지 않아? 나는 아내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도못했어.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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