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음이라는 것보다 더 절박한 수수께끼를 알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것의 안을 들여다볼 때 자유죽음은 그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몇 배는 더 끌어올린다. - P59

 바이닝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게 아니지 않은가. (중략). 결국 자유죽음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모든 경우에 남김없이 적용될까? - P61

 하느님 맙소사, 8년이라는 세월에도 나는 조금도 더 지혜로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 새로운 것은 안겨다 주었다. 세월은 흐르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 P62

여기서 지금 내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경험상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꿰어 맞춰가며 증명하려 하고 있다고? 의미도 근거도 없는 말들을 늘어놓아 가면서 불합리한 소리를 주절대고 있다고? - P64

 우선, 우리의 생각은 실증과학이라는 영역의 테두리 안에서 이른바 ‘자살‘이 밝혀낸 모든 것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확인해낸 것은, 논리라는 게 무엇이 되었든 생명의 논리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살이란 일체의 구속을 깨뜨리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골로 만이 형 클라우스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³⁵

35 골로만(Golo Mann)은 토마스 만의 여섯 자식 가운데 셋째 아들로는 둘째다(1909~1994). 역사학자이자 시사평론가면서 작가로 활동했다. 클라우스 만(Klaus Mann)은 둘째이자 장남으로(1906~1949) 역시 작가로 활동했다. 나치스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아버지를 따라갔던 클라우스는 이후 계속 세계를 떠돌던 끝에 자살했다. - P65

우리는 현대 논리학이 이른바 ‘가짜 질문‘으로 치부해 버린 문제를 파고들어가 그게 겉보기처럼 가짜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 P66

게다가 독자는 언제라도 인간의 건전한 상식으로 도피할 수 있다. - P66

자유죽음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모순을 뿌리째 뽑으려는 시도지만, 이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 P67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죽음과 자아 소멸이라는 이런 상황을 다분히 의식해서 체험한다. 어떤 이는 짐짓 밝은 기분인가하면, 또 어떤 이는 열광하기도 하며, 히스테리와 함께 온갖 소동을 벌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침착하고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 P67

 존재, 곧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연구하기 아주 힘든 문법적 구문을가지고 있다. ‘있음‘이라는 말은 그 모순, 즉 ‘있지 않음‘이라는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를 모순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있지 않음‘, 곧 ‘없음‘이라는 말뿐인 불가능성을 강제로 이끌고 오는 사람은 무의미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어디까지나 무의미한 사람일 뿐,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힌 괴상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³⁶

36 이 문장의 원어 표현은 다음과 같다. "Des Unsinns, nicht des Wahnsinns." 여기서 ‘Unsinn‘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의 무의미다. 그러니까 자살을 무의미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유죽음이라는 행위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게 아니다. 이게 저자의본뜻이리라 본다. 간결한 문장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는 옮긴이의 고충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원어에서 대립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원문을 소개해둔다. - P68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제 막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눈을 좀 더 길들여야 한다. - P69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Wie natürlich ist der Tod?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자격이 있다.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 P72

자연스러운 죽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것, 심지어 반자연적인 죽음까지 볼 수 있다. - P74

 근본적으로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울 수 없다. 특히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 P77

다시 말해서 인과관계로서의 외부 세계가 우리의 존재를좌지우지하는 주인으로서 우리의 자아를 지배하고 있다면, 죽음은 자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자아(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현상, 나라면 ‘감각의 묶음‘에 불과하다고 표현하리라)에게 있어 신장, 위장, 심장 등은 모두 외부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P78

 다시 말해서 일상 언어에서 ‘자연‘이라는 말은 특정 시점에 특정 인구에서 양적인 기준으로 보아 ‘일반적인 것‘을 보통이라고 하며, ‘자연적‘이라고 표현한다. - P78

죽어가면서도 아직 분명한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그의 죽음이 어쨌거나 비자연적으로 보인다고 내가 말한다면, 나는 이 말로 일상 언어와 논리 언어 사이에 끼어 있는 셈이다. - P79

이처럼 세월이 흐르면 슬픔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죽음을 끌어안고 살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신비롭게도 일상언어는 다시금 논리적으로 깔끔한 의미론의 개념에 근접한다. - P80

물론 죽음 바로 곁에 가 있는 사람의 사정은 다르다. 그에게 객관적인 현실쯤은 아무래도 좋다. 그는 심장에 어떤 물질이 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80

. 일단 죽음이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람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난다. 다만, 안간힘을 쓰며 화를 간신히 억누를 뿐이다. - P81

여전히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 죽은 사람의가장 가까운 가족이 "망자는 자신의 ‘평안을 찾았습니다!" 하고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것을 들어야만 가까스로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이때 죽은 육신, 곧 시체가 평안할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 P81

죽음은 누구나 한 번 마주치지만, 신은 언제나 숨어 있다. 이게 바로 신이 현현하는 방식인 것을 어쩌랴. - P82

안타깝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목을 향해 날아드는 칼의 바람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든 듣지 못했든, 우리는 죽음을 알고 있다. - P82

사실 나는 죽음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본래의 나다. - P83

자연적이기만 희망했던 죽음은 비자연이자 반자연이라는 모습을 취하기 시작한다. - P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문

필자의 책을 알고 있는, 콕 집어서 《늙어감에 대하여》를 읽은 독자는 벌써 감을 잡을 수 있으리라. 그 책에서 나는 자유죽음(Freitod)이라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볼 것을 권했다. - P19

자살? 나는 이 단어가 싫다. - P19

차라리 나는 자유죽음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 P20

물론 자살이라는 행위가 참을 수 없이 강제된 상황 탓에 빚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은 익히 안다. - P20

 여기서 자살이란 ‘수이 카에데레(sui caedere)‘, 곧 ‘스스로 자신을 죽임‘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된 ‘자살(Suizid)‘을 말한다. - P10

하지만 아직 세밀한 구분을 할 정도로 우리의 이야기가 충분히 진척되지 않았다.  - P21

충동 자살? 제법 그럴싸한 말이다. 또는 나르시시즘의 위기? 이 또한 나쁘지 않다. 심지어 복수 행위라는 개념도 있다. - P21

마치 은하계나 소립자 같은 것을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물리학자처럼 객관적인 사실로만 자살을 바라본다면, 사실과 자료를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우리는 자유죽음에서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 P22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료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실증적 자료와 사실로 자유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돌려세운다?  - P22

 우리는 법의학자가 시체 조직의 일부를 잘라내듯 "자살 행태"를 해부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 P24

자신을 파괴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연이라는게 그를 살려주기로 작정했다면, 그는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리라.  - P25

심리학은 아주많은 종류의 "자살 행태"를 이야기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아주 까다로운 것도 많다. - P25

 자유죽음에는 여러 형태와 그 발달사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생각들이있다. (중략). 다름이 아니라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곧 자유죽음을 구하고 있다는 데서 그 공통성을 찾아야 한다. - P26

일단, 구하고 찾은 사람들, 즉 이미 자살을 한 사람들부터살펴보자. 먼저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리라.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게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 곧 이들이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없을까?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보자. - P26

(전략). 사람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법칙이라는 게 과연 법칙인가? - P30

이렇게 따지고 들어도 ‘자살학‘이 말하는 법칙들이 무력해지지는 않는다.  - P30

. 다만,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일 따름이다.  - P30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우리의 사례들이 객관적인 사실, 즉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겼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객관적인 사실 말고, 어떤 점을 공통으로 가질까 하는 물음이다.  - P31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바로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다. - P31

관련 학문이 ‘결산자살(Bilanzsuizid)‘⁹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죽음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9 ‘결산 자살‘이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차분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돌이켜보고택하는 죽음을 이르는 표현이다. - P31

.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은 다른 모든 일을 심드렁하게 여기는 상식 밖의 무관심을 빚어낸다. 뭐가 어떻게 다르다느니 하는 따위의 시시콜콜 따져야 하는 문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남겨진 가족의 몫이거나 과학의 차지일 따름이다.  - P32

. 대개 아주 잠깐이지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을 끌기도 하는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신분이라는 차이까지 깨끗이 지워버린다. - P33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무어라 중얼거렸던가. 이제 남은 것은 고통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런 게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다. 이를 두고 감히 비웃음을 흘리거나 훈계해도 좋을까? - P34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자살학‘의 여러 자료를 통해서도 잘 증명되어 있다. 여기서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이 어둠 안으로 들어와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 P34

 여기서 자살 행위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함께 싸잡아 역사성을 운운하는 것은 삼가야 좋다는 게 내 의견이다. - P35

내가 개인적으로 인생의 한창때를 사는 40대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는 점은 인정한다. (중략) 다시 강조하지만, 자살을 바라보는 데 있어 역사성의 관점은 피해야 한다 - P36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은 앞으로도 거듭 이야기하게 되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자살이라는 문제의 알파요 오메가다. - P36

 죽음은 어쨌거나 우리가 함께 끌어안고 살아야만 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 안에서 자라나며 공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 P36

 외부로부터 다가온 죽음은 우리를 강제로 떼어놓는다. ‘밖에서 다가와 떼어놓는다‘라는 말은 비유적으로 볼 때 이중의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마치 우리가 죽음에로 도망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 P37

.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 이중의 역설이 허락하는 한, 일종의 수동태다. 없는 무엇인가를 우리는 기다린다. - P37

하지만, 자유죽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문법적으로나 실제로나 적극적인 행위다. - P37

 하지만 자살을 감행한 사람 혹은 자살할 뜻을 품은 사람은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첫마디부터 직접 한다. 어떤 형태로든(이를테면 병이나 사고 혹은 그냥 단순하게 기력이 떨어져서) 죽음이 말을 걸어오고 난 다음에는, "죽음아, 네 가시는 어디에 있느냐?" 하고 결코 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소리쳐 부른다. - P38

자유죽음을 갖는 사람은 책을 깨고 나온다. 여기서 이란, 내가 이미 암시했듯, 생명의 논리를 말한다. 생명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다.  - P38

그러나 다시 한번 묻자. 살아야만 한다고? 일단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다. - P39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말이다. "생명은 최고의 자산이 아니다." - P40

 생명은 최고의, 궁극적인, 가장 심오한, 제일 좋은 자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이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모순된 판단은 돌연 좋은 의미를 갖는다. - P40

‘자살학‘이라는 학문 분과의 가장 철저한 연구자도 손끝조차 댈 수 없는 곳에 생명보다 소중한 자산이라는 게 있다. - P40

 내 눈으로 보는 차원에서는 심리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저 유명한 심리학자 P. F.의 자살 역시 못지않게 맹랑하다. 그 사람도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지 않았는가. 아니, 차라리 존재의 법칙을 무시했다고 하는게 나을까? - P43

. 정말 진지하게 나는 자유죽음 논의는 심리학이 끝나는 곳에서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는다. - P43

 우리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 아니 범위를 좀 더 좁혀보자면, 이미 뛰어내리기 위한 디딤판으로서의 문틀에 서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 P44

지금 우리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꾸 심리학을 기웃거리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거듭 강조해두지만 우리는 심리학 바깥에 있다 - P47

 다시 말해서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풀 수 없다. - P47

멋지고 훌륭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 P48

있는 동시에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 P49

 죽음의 논리는 우리가 흔히 이성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다는 의미의 논리가 아니다. 죽음의 논리는 끊임없이 단 하나의 결론만 허용한다. - P49

 뛰어내리는 사람은 생명의 논리와 죽음의 논리 사이에서 찢기어 있다.  - P51

 더구나 불편한 것은 그런 해부와 접근의 목적이 본인보다는 가족,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보상 심리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자살을 기도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건져 다시 생명 논리와 그 언어의 세계로 되돌아온 사람을 붙들고왜 그랬냐고, 어째서 우리를 그토록 놀라게 만들었냐고 추궁하는 셈이다. - P51

 우리 문화에서 자살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P52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글에 다음과 같은 게 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하지도 말아야 한다." 몇 줄 더 나아가 결론이 내려진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만 한다."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적어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판단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이런 철저한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 P56

신실증주의는 생명의 논리라는 영역 안에서 의미 있는 판단을 이끌어내기 위해 가짜 질문을 거부하고 솎아낸다는 점에서는 옳다. 하지만 이 영역을 넘어가야만 하는 경우에 신실증주의의 태도는 옳지 않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

"이번 사건을 어렵게 만든 원인은 연립주택의 일층에 사는 집주인, 가와하라 겐사쿠의 증언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P38

"가와하라 겐사쿠는 ‘귀가하는 요시모토 히토미와 마주쳤다‘라고 증언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P39

"그렇다면 아가씨는 이미 이해하셨겠지요. 연립주택 이층에 사는 대학생 모리타니 야스오의 증언 중에 나왔던 ‘쿵쾅‘ 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 같은 소리‘의 정체를요." - P41

"잊은 것이 어디 있었다는 거야?"
"베란다에 있었습니다."
가게야마는 마치 직접 보고 왔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베란다? 확실히 베란다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었는데, 셔츠나 청바지하고 속옷들, 그리고 운동화. 그 여자가 잊은 물건이란 대체 어떤 거지?"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엘라의 제안


내 잘못, 내가 문제?

월요일 아침.
공휴일 아님, 개교기념일도 아님, 학교 가는 날임. 날씨 맑음. 주말 내내 입맛과 밥맛이 없고 잠도 설쳤는데 악몽을 꾸는 바람에 평소보다 20분이나 일찍 깼음. - P20

"밥도 거르고,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빠, 나 전학 가면 안 돼요?"
새고방은 메시지 알림을 꺼놨다. 호수가 평소보다 1.3배쯤 자주 연락해서 호수도 꺼 놓고 싶었다. 온 세상 사람이 날 손가락질하면서 수군대는 느낌이라 호수 보기도 창피했다. - P21

현서 머리숱 많고 반곱슬이라 까딱하면 사자 머리 되는 거 알면서 월요일 아침 7시 43분에 말 건 내 잘못이지. 아빠 회사까지 50분 넘게 걸리고 회의에 늦으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월요일 아침 7시56분에 전학 얘기 꺼낸 내가 나빴지.
"아무것도 아냐. 귤이야, 누나 갔다 올게." - P21

교문이 보이는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현서에게 나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만 같다. 몇 달이 지나 내년이 되어도 현서가 날 기억해 줄까.  - P22

문을 연다.
나를 본 아이들이 조용해진다. - P22

주말 동안 새고방 사건을 까먹지 않았을까 하는 가느다란 기대가 끊어졌다. 다들 아는 거다. 기억하는 거다. 앞쪽으로 가는 동안, 칠판과 벽을 뚫고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 P23

은율이는 너뿐이잖아."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별중에서 최은율은 1학년 2반에 한 명뿐. 엘라도 점셋의 메시지를 봤구나, 직감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 P23

"시간 없으니까 요점만 말할게. 우선 이거부터"
엘라가 폰을 내밀었다. (중략).
"누가 그랬는지 알고 싶지 않아?" - P24

"딱 누군지는 모르는데, 어느 모둠인지는 알아. 우리 반이야."
"모둠? 무슨 모둠?"
"안 궁금하다면서 하나씩 다 물어보네?"
엘라가 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탓했다. 그러자 마법처럼 나 자신이 엉큼하고 뻔뻔하게 느껴졌다.  - P24

"몇 모둠인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난 알아"
엘라가 싱긋 웃자 나는 바보처럼 설득당해서 고개까지 끄덕일 뻔했다. 엘라라면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 P25

"걱정 마, 떠벌리지 않을게. 아무튼 호수한테 나 좀 소개해 줄래?"
잠깐 뭐라고요? 소개?
"호수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연결해 줬으면 해. 그게 내 부탁이야."
"그러니까 지금, 한호파······, 한호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거야?"
"자세히 알아볼 게 좀 있어서."
"지, 지, 직접 가서 말하면 되잖아."
어이가 없어서 말까지 더듬는다. 엘라 공주가 호수에게 관심이 있다고? - P26

새고방 방장, 홍쌤


담임쌤이 와서 조례를 하고 회장이 폰을 걷는 동안 구름 속에 갇힌 듯 멍했다. 이 느낌 뭐야. 최은율과 점셋, 엘라와 호수, 누구 때문이야. 그러다가 퍼뜩 국어 모둠이 생각났다. - P27

나는 피해자다. 나쁜 쪽은 점셋이다. - P27

몇 모둠 누구일까? 나한테 왜 그랬을까?
궁금하다. 알고 싶다.
알아서 뭐하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묻힐 텐데 다들 잊을 텐데. - P28

"거기 엎드린 사람 누굴까?"
(중략).
"은율이 어디 아프니?"
"아, 아뇨!"
부인하고는 수학 교과서를 펼쳤다. 홍쌤은 애들 이름을 다 외운다. 그럴 정성으로 새고방 관리도 좀 하시죠! - P29

무시와 직시


마음 들여다보기

다들 급식실로 가는데 나는 1층 상담실로 갔다. (중략).
홍쌤이 나를 맞았다.
웬 떡볶이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진짜 떡볶이였다. 튀김을 포함한 컵볶이 2인분에 아아까지! 밥맛이 1도 없다고 믿었는데 그건 밥 얘기고, 떡볶이는 또 다른 자원이었다. - P31

주말에는 떡볶이를 먹지 않아서 그렇게 우울했었나? 떡볶이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우울했다고 치자.
"새고방 때문에 속상했지?"
"캡처 보셨어요?"
"응.."
"누군지는 모르시죠?"
"익명 방이라서." - P32

"그 방, 선생님이 만드신 거죠?"
"그렇지." - P33

새고방에서 선생님의 정서와 심리 상태는 인기 있는 분야다. 이번 주에 상태 안 좋은 선생님, 이건 참 귀중한 정보거든. 그 선생님 시간에는 숙제를 빼먹거나 떠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폭풍 설교나 벌점이다. - P34

"은율이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 뭘요?"
기습 질문에 허둥댔다.  - P34

"둘 다 장단점이 있지. 무시는 신경을 안 쓰니 에너지가 덜 들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찜찜함이 남지 않을까? 직시는 감춰진 걸 들추다 보면 귀찮기도 하고 힘도 들지. 그 대신...?"
"속은 시원해지고요?"
"그런 면이 있겠지. 그런데 진실을 발견한다는 게 항상 상쾌한 일만은 아니야. 진실이 아프고 슬플 때도 있거든. 어이없을 만큼 단순하고 간단해서 허탈할 수도 있고." - P35

"근데 한호수한테 너 소개해 주는 거 말이야. 그거 어떻게 해야 돼?"
(중략).
"내가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말만 전해 줘. 그다음엔 우리가 알아서 할게." - P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가자마쓰리 경부는 올해로 서른두 살에 독신. 그러나 단순한 독신은 아니다. 아버지는 중견 자동차 제조 회사 ‘가자마쓰리 모터스‘의 사장이다. 즉 그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 P12

호쇼 레이코는 이 경부를 꺼려한다. - P12

시체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앞에, 바닥에 큰 대자로 엎어지듯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시체에서 출혈은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목이 졸려서 죽은 듯했다. 피투성이의 처참한 현장을 각오하고 있던 레이코는 그 점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레이코는 그 시체에서 기묘한 인상을 받았다. - P13

"확실히 경부님의 말씀대로 이상하군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쩌면 피해자는 다른 장소에서 살해돼, 시체 상태로 이 방까지 운반되었을지도 모른다. 범인이 시체를 짊어지고 운반하면 복도나 플로어링에 피해자의 발자국은 남지 않을 테니까. - P14

"경부님, 남자의 단독 범행이라고 단정 내리는 것은 좀 뭐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들을 것도 없이, 현장을 한눈에 본 순간에 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지."
이봐, 그건 거짓말이겠지! 지금 내 말을 듣고서 생각한 거잖아! 저 잘난 맛에 사는 남자 같으니! - P15

가자마쓰리 경부는 빨래보다 빨랫줄에 흥미를 느낀 듯,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중략).
"경부님, 설마 살인범이 피해자를 교살한 뒤에 그 끈을 베란다에 치고 빨래를 널었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 P16

경부는 재빨리 빨랫줄에 작별을 고하고 플로어링이 깔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슬슬 첫 발견자를 조사하러 가볼까."
곧바로 첫 발견자인 여성이 불려왔다. 같은 연립주택 301호에사는 기무라 에리라는 회사원이다. 피해자와 같은 스물다섯 살로, 두 사람은 평소에 같이 술을 마시곤 하는 이른바 술친구였다고한다.  - P17

우선은 이 연립주택의 소유주이며, 일층에 살고 있는 가와하라 겐사쿠라는 중년 남성. 그는 "생전의 피해자의 모습을 목격했다"라고 증언했다. - P18

가자마쓰리 경부가 롤렉스 시계를 자랑스러운 듯 은근슬쩍 내보이면서 물었다.
"다섯시쯤 시작한 텔레비전 방송이 끝나고 조금 지났을 무렵이니, 오후 여섯시쯤이었겠죠." - P18

"요시모토 씨와 지나친 뒤, 당신은 무엇을 하셨죠?"
"당연히 바로 집으로 돌아왔죠. 거짓말이 아닙니다. 의심이 된다면 연립주택 맞은편의 과일가게 주인에게 물어보세요. 저와 요시모토 씨가 마주칠 때, 마침 가게 주인이 밖에 나와 있었으니까요." - P19

두 형사는 탐문 수사를 마치고 다시 삼층의 현장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경부님."
도중에 레이코가 물었다.
"모리타니 야스오가 들은 발소리는 정말로 범인이 도주할 때의 발소리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 P20

(전략).
피해자가 부츠를 신은 채로 죽어 있었다는 점에서 도출되는 당연한 추리다. 그러나 가자마쓰리 경부는 레이코의 추측을 야유하듯이, (후략). - P21

가자마쓰리 경부는 곧바로 동의했다.
"시체에 부츠를 신기다니, 바보 같은 짓에도 정도가 있지. 만약 그런 짓을 했다면 분명히 시체에 부자연스러운 정황이 나타나서 검시할 때 이야기가 나왔을 거야. 그래, 시체에 나중에 부츠를 신기는 것은 불가능해 있을 수 없어. 안 그런가, 호쇼 형사?"
"......네, 경부님이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 P22

"피해자의 컴퓨터 책상 서랍 안에서 이런 물건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사진 한 장과 열쇠였다. 열쇠는 이 연립주택의 열쇠가 아니다. 이 연립주택은 건물은 낡았어도 자물쇠만큼은 방법 효과가 뛰어난 최신식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 눈앞의 열쇠는 명백히 그것과는 다른 물건이었다. - P23

가자마쓰리 경부는 흥미가 생긴 듯이 사진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요시모토 히토미와 젊은 남자의 사진이잖아. 그렇군. 피해자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 그렇다면 이 열쇠는 그 남자의 집 열쇠인가. 흐흠, 이거 재미있군." - P23

2

그런 이유로 다음 날인 일요일, 가자마쓰리 경부와 호쇼 레이코는 곧바로 다시로 유야의 집을 방문했고, 근처의 찻집에서 그와 면담을 하기에 이르렀다. - P24

그 가자마쓰리 경부는 다른 두 사람이 무난하게 블렌드 커피를 주문하려는 것을 막더니, 멋대로 ‘블루마운틴 스페셜 셀렉트‘를 세잔 주문하고는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이 질문을 계속했다. - P24

이제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다시로가 처음으로 거친 목소리를 냈다.
"확실히 저는 그 사람과 열쇠를 교환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열쇠를 아직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헤어졌을 때 돌려받는 것을 깜빡해서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제가그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생각입니까?" - P26

그 후 가자마쓰리 경부와 호쇼 레이코는 다시로 유야가 말한 중언의 진위를 확인하려고 그의 낚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 그러나 그 노력은 결국 다시로의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입증할 뿐이었다. - P27

아니, 결코 가자마쓰리 경부가 무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젊은 나이에 경부가 된 사람이다. 다만 좀 더 부하의 말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보인다면, 혹은 조금 더 협조하며 신중할줄 알면 좋겠지만, 아, 그리고 졸부 취향을 훤히 드러내는 행동은하지 말았으면 좋겠고, 성희롱 같은 언동도 자제했으면 싶다.  - P29


레이코는 안절부절못하며 남자 곁으로 다가가서 "미안하게 됐네" 하고 우선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수리비는 얼마나 나올까?"
"걱정 마십시오. 기껏해야 칠, 팔십 만 정도겠죠."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조용히 일어서더니, 레이코 쪽을 돌아보며 공손히 인사했다.
"살짝 긁혔을 뿐입니다. 아가씨." - P30

"저기, 가게야마......나 여기서 한숨 잘 거니까 한 시간 정도 적당히 달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레이코의 자기중심적이기 짝이 없는 명령에 운전석으로부터 가게야마의 대답이 들렸다. - P31

그렇다. 구니타치 경찰서의 여형사인 호쇼 레이코는 젊은 미혼여성이라는 의미의 ‘아가씨‘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정한 ‘귀한 집 아가씨‘였던 것이다. - P32

3


호쇼 레이코는 새우와 렌즈콩 샐러드, 어패류 수프, 토마토 닭고기 찜, 새끼 양고기 로즈메리 구이 등으로 아주 가벼운 저녁식사를 한 뒤, 야경을 전망할 수 있는 응접실 소파에서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 형사로서 레이코는 버버리의 심플한 팬츠 슈트 등을 ‘마치마루이 백화점 고쿠분지 지점‘에서 산 것처럼 수수하게 입으며 형사다운 견실한 인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P32

이 가게야마라는 젊은 집사는 호쇼 저택에서 일하게 된 지 아직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중략). 적어도 범죄 조사에 관해서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타입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 P34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아가씨. 이 정도 사건의 진상을 모르시다니. 아가씨는 멍청이이십니까?"
"....."
몇 초, 혹은 몇 분의 침묵이 주위를 지배했다.
레이코는 텅 빈 글라스에 스스로 와인을 따랐다. 글라스를 든 채로 일어서서 조용히 창가로 걸어갔다.  - P35

 레이코는 무표정을 가장하며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나를 멍청이라고 했지. 그렇다는 얘긴, 당신은 이 사건의 진상을 간단히 알 수 있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 사건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아주 자신이 있어 보이네?" - P37

"내가 이해할 수 없으니까 범인이 누군지 말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 전혀 이해 못하겠어.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그리고 레이코는 망연히, 아가씨로서도 혹은 프로 형사로서도 아주 굴욕적인 발언을 했다.
"부탁이니까, 나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줘." - P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