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음이라는 것보다 더 절박한 수수께끼를 알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것의 안을 들여다볼 때 자유죽음은 그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몇 배는 더 끌어올린다. - P59

 바이닝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게 아니지 않은가. (중략). 결국 자유죽음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모든 경우에 남김없이 적용될까? - P61

 하느님 맙소사, 8년이라는 세월에도 나는 조금도 더 지혜로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 새로운 것은 안겨다 주었다. 세월은 흐르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 P62

여기서 지금 내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경험상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꿰어 맞춰가며 증명하려 하고 있다고? 의미도 근거도 없는 말들을 늘어놓아 가면서 불합리한 소리를 주절대고 있다고? - P64

 우선, 우리의 생각은 실증과학이라는 영역의 테두리 안에서 이른바 ‘자살‘이 밝혀낸 모든 것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확인해낸 것은, 논리라는 게 무엇이 되었든 생명의 논리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살이란 일체의 구속을 깨뜨리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골로 만이 형 클라우스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³⁵

35 골로만(Golo Mann)은 토마스 만의 여섯 자식 가운데 셋째 아들로는 둘째다(1909~1994). 역사학자이자 시사평론가면서 작가로 활동했다. 클라우스 만(Klaus Mann)은 둘째이자 장남으로(1906~1949) 역시 작가로 활동했다. 나치스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아버지를 따라갔던 클라우스는 이후 계속 세계를 떠돌던 끝에 자살했다. - P65

우리는 현대 논리학이 이른바 ‘가짜 질문‘으로 치부해 버린 문제를 파고들어가 그게 겉보기처럼 가짜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 P66

게다가 독자는 언제라도 인간의 건전한 상식으로 도피할 수 있다. - P66

자유죽음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모순을 뿌리째 뽑으려는 시도지만, 이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 P67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죽음과 자아 소멸이라는 이런 상황을 다분히 의식해서 체험한다. 어떤 이는 짐짓 밝은 기분인가하면, 또 어떤 이는 열광하기도 하며, 히스테리와 함께 온갖 소동을 벌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침착하고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 P67

 존재, 곧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연구하기 아주 힘든 문법적 구문을가지고 있다. ‘있음‘이라는 말은 그 모순, 즉 ‘있지 않음‘이라는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를 모순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있지 않음‘, 곧 ‘없음‘이라는 말뿐인 불가능성을 강제로 이끌고 오는 사람은 무의미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어디까지나 무의미한 사람일 뿐,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힌 괴상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³⁶

36 이 문장의 원어 표현은 다음과 같다. "Des Unsinns, nicht des Wahnsinns." 여기서 ‘Unsinn‘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의 무의미다. 그러니까 자살을 무의미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유죽음이라는 행위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게 아니다. 이게 저자의본뜻이리라 본다. 간결한 문장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는 옮긴이의 고충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원어에서 대립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원문을 소개해둔다. - P68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제 막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눈을 좀 더 길들여야 한다. - P69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Wie natürlich ist der Tod?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자격이 있다.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 P72

자연스러운 죽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것, 심지어 반자연적인 죽음까지 볼 수 있다. - P74

 근본적으로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울 수 없다. 특히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 P77

다시 말해서 인과관계로서의 외부 세계가 우리의 존재를좌지우지하는 주인으로서 우리의 자아를 지배하고 있다면, 죽음은 자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자아(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현상, 나라면 ‘감각의 묶음‘에 불과하다고 표현하리라)에게 있어 신장, 위장, 심장 등은 모두 외부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P78

 다시 말해서 일상 언어에서 ‘자연‘이라는 말은 특정 시점에 특정 인구에서 양적인 기준으로 보아 ‘일반적인 것‘을 보통이라고 하며, ‘자연적‘이라고 표현한다. - P78

죽어가면서도 아직 분명한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그의 죽음이 어쨌거나 비자연적으로 보인다고 내가 말한다면, 나는 이 말로 일상 언어와 논리 언어 사이에 끼어 있는 셈이다. - P79

이처럼 세월이 흐르면 슬픔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죽음을 끌어안고 살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신비롭게도 일상언어는 다시금 논리적으로 깔끔한 의미론의 개념에 근접한다. - P80

물론 죽음 바로 곁에 가 있는 사람의 사정은 다르다. 그에게 객관적인 현실쯤은 아무래도 좋다. 그는 심장에 어떤 물질이 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80

. 일단 죽음이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람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난다. 다만, 안간힘을 쓰며 화를 간신히 억누를 뿐이다. - P81

여전히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 죽은 사람의가장 가까운 가족이 "망자는 자신의 ‘평안을 찾았습니다!" 하고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것을 들어야만 가까스로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이때 죽은 육신, 곧 시체가 평안할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 P81

죽음은 누구나 한 번 마주치지만, 신은 언제나 숨어 있다. 이게 바로 신이 현현하는 방식인 것을 어쩌랴. - P82

안타깝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목을 향해 날아드는 칼의 바람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든 듣지 못했든, 우리는 죽음을 알고 있다. - P82

사실 나는 죽음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본래의 나다. - P83

자연적이기만 희망했던 죽음은 비자연이자 반자연이라는 모습을 취하기 시작한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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