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직관적 평가에 의존해 판단할 때, 우리는 누군가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우리의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선택에 상당히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인간관계란 바로 이러한 직관이 작동하는 영역으로, 인간적 상호작용의 과정은 일련의 일반화되고 언어화된 원칙에 비춘 평가와 반응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 맥락, 분위기, 과거 경험, 그 사람의 전인적 면모를 고려하는 종합적 판단과 반응을 요구한다. - P98
우리는 분명 인간관계에서 많은 판단을 내리며,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중략). 긍정적 기대가 긍정적 결과를 유발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와 반대되는 ‘골렘 효과Golem effect‘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 기대가 실제로 부정적 결과를 유발하는 현상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는 과도한 경계심으로 골렘 효과를 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98
손절과 잠수
고역스러운 평가노동은 ‘자격‘과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다. - P100
오늘날 학자들은 관점의 독창성이나 사회와 학계에 대한 공헌 등이 아니라 상위 몇 퍼센트 학술지에 얼마나 많은 수의 논문을 남겼는지,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따냈는지로 평가받는다. - P100
모든 것이 서열화와 경쟁의 대상이 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대학이건 병원이건 기업이건 간에 이런 식의 평가와 감사를 준비하고 수행하느라 핵심 업무보다 불필요한 서류와 행정 작업에 더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 P101
이러한 면에서, 실제로 인간관계를 해보는 것보다 이런저런 지식으로 무장한 채 인간관계에 관해 평가하는 것을 강조하고, 이런 평가 결과가 어떤 명확한 기준에 미달하면 가차 없이 투자를 끊으라고 말하는 이 문화는 실로 신자유주의적이다. (중략). 앞서 보았듯이 우리의 선택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인지 알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P101
정신과 의사, 유튜버, 인플루언서, 각종 커뮤니티의 익명 조언자들 그리고 이제는 챗 GPT까지, 어떤 정답을 알려주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이다. - P102
그리고 나에게 이처럼 다양한 기준에서 타인을 평가할 자유가있다는 것은 타인에게도 나를 평가할 자유가 있음을 뜻하기에, 우리의 자아는 한층 더 깊은 불안에 빠진다. - P102
(전략). 결과적으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과 괴로움을 피하려는 발버둥은 때로 더 큰 갈등과 괴로움을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 P102
그러나 자존감을 보호하고 심적 고통과 갈등을 겪지 않는 것이하나의 지향을 넘어선 도덕적 가치가 된 사회에서 그러한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 P103
인간관계를 돌연 끊어버리는 손절외에도, 아무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리는 잠수 혹은 ‘고스팅 ghosting‘부터 일본에서 늘어난다는, 인간관계를 끊고 잠적해버리는 ‘인간관계 리셋 중후군‘까지, 인간관계의 돌연한 단절은 오늘날 다양한 문화권에서 널리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 되었다. - P103
이러한 현상과 관련해 일루즈는 "선택하지 않음의 선택"이 오늘날의 주체를 이루는 결정적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⁵⁷ - P103
57 에바 일루즈, 《사랑은 왜 끝나나》,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20, p. 42 (Illouz, WarumLiebe endet: Eine Soziologie negativer Beziehungen, Suhrkamp Verlag, 2018). - P361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체화된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대화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그렇기에 관계를 단절하는 것 또한 하나의 표현이자 극단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P104
인터넷이 치료요법적 자기 계발 정보가 유통되는 유일한 장소는아니며 자기 계발서와 TV, 신문 등의 전통 매체 또한 치료요법 문화의 확산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략). 우리의 눈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조언을 받는 일이 흔해진 만큼,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관계 맺기와맺지 않기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에게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 즉 깊이 있는 관계로부터도 도피하기를 택한다. - P105
2부
너 자신을 알라 치료요법 문화의 인간 상품화 프로젝트
4장
프로필 대 프로필의 만남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가 된 MBTI
최적화를 추구하는 문화는 필연적으로 지름길이나 정답을 알려주겠다고 주장하는 상품과 콘텐츠의 범람을 낳는다. - P109
최적화를 추구하는 문화에서는 인간 또한 쉽게 요약하고 파악할 수 있는 몇 줄의 정보가 되어버린다. - P110
* 휴리스틱, 혹은 발견법發見法이란 인간이 시간이나 정보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곤 하는 일련의 간편한 추론 방법을 말한다. 가령 대표성 휴리스틱은 어떤 원형이나 대표적인 이미지와 비교해 어떤 사건의 확률을 추론하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들어 우리는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가 변호사일 확률보다는 의사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 P110
MBTI는 심리학이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 P111
사실 MBTI의 설득력은 보편적 성격 특성을 자신만의 특별한 성격으로 여기는 심리적 효과를 뜻하는 ‘바넘 효과 Barnum effect‘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 (중략). 그러나 ‘MBTI별 궁합‘은 물론 ‘걸러야 하는 MBTI‘나 ‘성격 더러운 MBTI, 심지어는 ‘MBTI별 연락 속도‘ ‘MBTI별 애정 표현‘ ‘금사빠 MBTI‘ 같은 제목을 내세우는 MBTI 이차 창작 콘텐츠가 (후략). - P112
이때 흥미로운 점은 MBTI에 대해 가장 높은 신뢰를 보여주는 연령층이 바로 청년층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성별로 보면 여성 40%가 ‘매우‘ 또는 ‘그런 편‘에 답한 반면 남성은 32%가 같은 문항에 답했다. - P113
이러한 조사 결과는 오늘날 심리학 문화의 선두 주자가 청년층,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⁴ - P113
4 이동한, "[별난리서치] MBTI,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 2022, https://hrcopinion.co.kr/archives/20518. - P361
MBTI가 한 사람이 ‘소유하는‘ 일련의 특징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MBTI 결과의 신뢰도, 즉 다시 검사했을 때 같은 결과가 재현될 확률은 대단히 낮다. - P117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인간의 이 같은 놀라운 가변성을 보여주는 르포다. (중략). 그렇다면 여린 마음을 가진 소녀와 냉정한 살인자와 용기 있는 전우 어떤 것이 그들의 진정한 원래 모습이었을까? - P116
끔찍한 상황만이 인간의 인격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부와 높은 지위가 인간성의 추락을 불러오거나 인간의 비윤리적인 모습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것은 잘 증명된 심리학적 사실이다. (중략). 상층계급은 하층계급과 비교해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떨어지며,⁷ ⁸ 친사회적 행동에 참여하는 빈도도 더 낮다.⁹ - P117
7 Michael W. Kraus, Stéphane Côté and Dacher Keltner, "Social Class, Contextualism, and Empathic Accuracy", Psychological Science, 21 (11), 2010, pp. 1716~1723.
8 Pia Dietze and Eric D. Knowles, "Social Class Predicts Emotion Perception andPerspective-Taking Performance in Adult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47(1), 2020, pp. 42-56.
9 Paul K. Piff, Michael W. Kraus, Stéphane Côté, Bonnie Hayden Cheng and DacherKeltner, "Having Less, Giving More: the Influence of Social Class on Prosocial Behavior,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9(5), 2010, pp. 771-784. - P361
높은 지위와 이기적이고 냉정한 성격이 단지 상관관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인과관계를 통해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도있다. - P116
우리가 타인 및 세상과 맺는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은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키며, 그렇기에 인간은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타고난 고유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 P118
우리에게는 분명 각자가 타고난 기질이 있다. (중략). 그러나 이런 기질적 특징만으로 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 P119
개인의 관점과 가치관은 이처럼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 행동과 성격의 복잡성을 심화하는 요인이자, 그 자체로 환경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 P119
보상에 대한 어린이들의 자기 조절 능력을 살펴봄으로써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마시멜로 실험‘은 흔히 인내심 있고 성실한 성격을 계발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정작 마시멜로패러다임의 창안자인 심리학자 월터 미셸은 특정한 성격 분류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 P119
심리학적 명칭처럼 개념화된 자기를 포함해 한 가지 자기 개념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을 심적 고통과 외부의 피드백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¹⁴ ¹⁵ - P120
14 김병수, "내 모습이 다양할수록 건강한 것이다", <인물과사상>, 195호, 2014. 7. pp.174-185. 15 김병수.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깊게 파고들지 마라", <인물과사상>, 193호, 2014.5, PP.163~173. - P362
그럼에도 MBTI를 위시한 각종 치료요법적 기술들은 자신이나 타인이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별 노력 없이 쉽고 빠르게 얻어낼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 P121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친밀감과 유대감은 사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보기 위한 인내와 노력, 특히 집합적 노력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략). 심리학 연구들은 일제히 같은 행동을 하기만 해도 강한 사회적 유대감을 경험하고, 더 많은 친사회적 행동을 보이며, 동기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유대감의 질 또한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¹⁷ - P122
17Arran Davis, Jacob Taylor and Emma Cohen, "Social Bonds and Exercise: Evidencefor a Reciprocal Relationship", PloS One, 10(8), 2015, e0136705. - P362
스피닝과 크로스핏 등 함께 고강도 동작을 하는 운동들이 현대 사회에서 거의 컬트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¹⁹ 인기를 끄는 것도 그런 이유다. - P123
19 어맨다 몬텔, 《컬티시>, 김다봄. 이민경 옮김, 아르테, 2023 (Amanda Montell, Cultish:The Language of Fanaticism, Harper Wave, 2021). - P362
자기 이해 산업과 산업을 위한 자기 이해
(전략). MBTI가 일종의 사교술이나 인간을 알기 위한 보편문법의 하나로 통용되는 현상의바탕에 있는 현대 치료요법 문화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있다. - P124
첫째, 환경이나 사회의 영향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핵심, 혹은 진정한 나를 발견하라는 강박적 명령이 도처에 산재한다. - P124
특히 칼 로저스가 중심이 된 인본주의 심리학 운동은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막대한 창조적 잠재력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자아를 실현할 놀라운 힘이 있다고 믿었다. - P125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성 개념을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략 ‘나답게 살기‘ ‘나 자신이 되기‘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 P125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 운동에 영향을 받아 시작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자존감 열풍 이후로 "당신은 특별하다" "나는 특별하다"는 말은 일상에서 매일같이 접하는 일종의 현대적 만트라로 자리 잡았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것은 곧 나의 특별함을 찾는다는(계발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 P126
(전략). 현대 사회에서는 정체성이라는 말을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본래 정체성이라는개념은 특히 1940년대에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 고안한 ‘정체성위기 identity crisis‘ 개념과 더불어 처음으로 대중적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 P126
그러나 정체성 개념이 널리 대중화된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체성은 점점 더 "당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자 개인의 독특함, 남들과 다른 특징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²⁶ - P127
26 Frank Furedi, 100 Years of Identity Crisis: Culture War Over Socialisation, De Gruyter, 2021, pp. 12~13. - P363
치료요법의 시대에 성행하는 것은 비단 MBTI 검사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뉴스까지 수도 없이 많은 매체가 앞다투어 온갖 심리학적·정신의학적 자가 진단을 제시하면서 당신의 ‘증상‘을 이해하게 하는 단 한 가지 명칭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 P128
예를 들어 HSP의 특성으로 자주 제시되는, 관계에서 갈등을 피하는 성향이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버거워하는 성향 등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현대 사회에서점점 더 흔해지는 행동 양식이다. 한편 뛰어난 창의력, 공감능력, 눈치, 자기 성찰, 예술에 대한 민감성 등은 아무도 거부하지 않을 법한 긍정적 특징들이다. - P129
일례로 ADHD를 위한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표방하는 <애디튜드ADDitude)>는 ADHD의 증상이나 치료법을 알려주는 데 그치지않고, ADHD가 정의에 대한 민감성³¹이나 창의력³² 등 많은 긍정적 자질을 포함하는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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